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

24화: 가장 사적인 증명
갈라홀 입구의 첫 조명은 샹들리에가 아니라 손등 위에 떨어졌다.
커다란 화면에는 윤해정이 천을 자르고 바늘을 밀어 넣는 손이 비쳤다. 화면 아래에는 오래된 재봉틀과 새 천 견본이 놓였고 그 옆 투명 보드에는 기부금의 사용처가 시간대별로 떠올랐다.
청년 제작자의 작업 공간 임대료. 다음 시즌 재료비. 공방 안전 설비.
후원자들의 이름은 입구가 아니라 홀 가장 안쪽에 있었다.
몇몇 하객은 걸음을 늦추고 화면을 올려다봤다. 누군가는 전시된 도구 앞에서 휴대폰을 들었다. 늘 포토월로 쏠리던 시선이 오늘만큼은 바늘과 손으로 흩어졌다.
“동선을 원래대로 돌리자는 의견이 또 들어왔어요.”
소라가 태블릿을 내밀었다. 운영위원회 실무진이 보낸 메시지였다. 제작자 전시가 입구를 좁게 만들고 VIP 포토콜을 방해하니 양쪽 벽면으로 옮기자는 내용이었다.
은우는 도면 위의 붉은 선을 한 번 훑었다.
“포토콜은 줄여요. 입구 전시는 그대로 갑니다.”
“후원사 쪽에서 불편해할 텐데요.”
“오늘 불편해야 할 건 관객이 아니라 익숙한 순서예요.”
은우는 태블릿을 소라에게 돌려주었다.
“사람들이 들어오는 첫 순간에 누가 이 행사의 주인공인지 보게 해야 해. 사진은 안쪽에서도 찍을 수 있고요.”
소라는 웃으며 바로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그때 다른 화면을 보던 민규가 조용히 다가왔다.
“형수님. 기자 출입증이 열두 장 추가 발급됐습니다. 오 위원 쪽 후원사 실무자가 요청한 건데 사전 명단에는 없던 사람들입니다.”
지혁의 시선이 민규의 화면으로 향했다.
“소속과 신원 전부 다시 확인하세요. 허가 절차에 문제가 있으면 출입을 막고.”
은우가 그를 바라보았다.
“근거 없이 내보내진 말아요.”
지혁의 눈빛이 짧게 흔들렸다. 그는 오늘도 그녀가 공격받을 가능성부터 계산하고 있을 터였다.
“오늘 우리가 보여주려는 건 공정한 무대잖아요. 싫은 질문을 한다고 문밖에 세우면 우리가 만든 기준부터 무너져요.”
지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단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절차 안에서 처리하죠.”
그 한마디에 은우는 숨을 가볍게 내쉬었다. 지혁은 손을 뻗어 모든 문제를 치우는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정한 선을 먼저 확인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민규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데 추가 명단 중에 정우진이라는 기자가 있습니다. 인터넷 경제지 소속인데 강지성 부사장실 행사 사진에 몇 번 같이 찍혔어요. 공식적으로 문제 삼을 정도의 관계는 아니고요.”
“계속 확인해요.”
지혁의 대답은 짧았다.
은우는 화면 속 재봉틀을 보았다. 바늘은 천을 뚫고 지나간 뒤에야 다음 자리를 잡았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막연한 의심만으로는 아무것도 베어낼 수 없었다.
백스테이지에는 화려한 향수보다 새 천의 냄새가 먼저 퍼져 있었다.
윤해정은 마지막 단추를 잠그고 한 걸음 물러섰다. 은우가 입은 아이보리 드레스 위로 얇은 외피가 물결처럼 흘렀다. 원본과 비슷한 선을 따르면서도 어깨부터 스커트 끝까지 결이 다른 천이 은은하게 겹쳐 보였다.
원본 드레스는 무대 옆 보존 케이스에 놓였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시간을 지키면서도 새 옷의 시작이 된 자리였다.
“조명을 오래 받으면 두 겹이 더 선명해질 거예요.”
해정이 작은 주름을 펴며 말했다.
“가까이 오면 새 천이라는 것도 알 수 있고요.”
은우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유품을 걸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래된 손길에서 출발해 자기 이름으로 다음 길을 여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주 좋아요. 원래 옷을 흉내 내지 않아서 더 좋아요.”
“처음에는 똑같이 만들어야 하는 줄 알았어요.”
해정이 수줍게 웃었다.
“그런데 서 대표님이 새 천이어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할머니 바늘땀은 남기되 제 방식으로 해 봤어요.”
“그게 오늘 사람들이 봐야 할 거예요.”
은우가 말했다.
“누군가의 이름을 이어도 자기 이름이 사라지지 않는 것.”
문이 열리고 명희가 들어왔다. 그녀는 은우의 모습을 본 뒤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평소라면 완벽한 각도부터 살폈을 사람이 오늘은 드레스의 겹쳐진 결만 바라봤다.
“참 이상하군요.”
명희가 은우의 어깨선을 정리했다.
“내 옷인데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보여서 더 마음이 놓여요.”
은우는 명희의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
“오늘 누가 여사님 이야기를 물어도 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선택까지 갈라의 메시지가 되어서는 안 돼요.”
명희는 고개를 들었다.
“내가 직접 말하고 싶은 날에는 말해도 되겠지요?”
“그날은 여사님이 정하세요.”
명희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러니 네가 자꾸 내 사람 같아지는 거예요.”
그 말이 은우의 가슴을 조용히 건드렸다. 쓸모가 있어야 자리를 얻는다는 생각과는 다른 방식의 인정이었다. 무엇을 해냈기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을 존중받는 느낌.
문밖에서 지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가도 됩니까.”
은우가 대답하자 그가 문을 열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지혁은 평소보다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맨 채였다. 급하게 이동했는지 셔츠 소매 끝도 미세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그의 시선이 은우에게 닿는 순간 발걸음이 멈췄다.
“왜요?”
은우가 물었다.
“생각보다 더.”
지혁은 말을 멈췄다. 완성하지 못한 문장 끝에 묘한 열기가 남았다.
은우는 웃음을 삼키며 그에게 다가갔다.
“더 뭡니까.”
“잘 어울립니다.”
너무 늦게 나온 대답이었다. 그러나 지혁다운 정직함이어서 은우는 더 이상 놀리지 못했다.
그녀는 그의 넥타이 매듭을 천천히 바로잡았다. 손끝이 셔츠 깃을 스치자 지혁의 호흡이 아주 짧게 멎었다.
“오늘은 제 옆에 서도 되겠습니까.”
지혁이 낮게 물었다.
“계약상 그래야죠.”
“그 말 말고요.”
은우의 손이 멈췄다.
지혁은 그녀가 답을 고를 때까지 재촉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가까웠다.
“오늘은 제가 부탁할게요.”
은우가 매듭을 매만지며 말했다.
“너무 앞에 나서진 말고요.”
“어렵습니다.”
“알아요. 그래도 해주세요.”
지혁은 눈을 내리깔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원하면.”
그 대답에 은우는 손을 거두었다. 누군가의 보호가 숨 막히지 않는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부탁할 수 있고 거절할 수도 있는 보호라서였다.
개막 인사가 끝나자 하객들은 입구 전시를 지나 홀 안으로 흘러들었다.
은우는 무대 위에서 짧게 행사의 취지를 설명했다. 후원금이 어떤 팀에 어떻게 쓰이는지 보드로 공개하고 지원받은 창작자는 다음 시즌까지 결과를 공유한다는 약속도 덧붙였다.
박수는 처음보다 느렸지만 길었다.
오혜란은 사람들 사이에서 잔을 기울인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박수 소리가 잦아들 때쯤 자연스럽게 포토콜 앞으로 걸어왔다.
“서 대표님.”
은우가 카메라 앞에서 몸을 돌렸다.
오혜란의 미소는 빈틈없이 아름다웠다.
“이사장님 보관실에서 나온 옷이라더군요. 갈라의 격을 새로 정의하겠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협찬을 구하지 못한 사정을 아름답게 포장한 건가요?”
주변의 대화가 잦아들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빨라졌다.
오혜란은 은우가 대답하기도 전에 옆의 후원자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기울였다.
“후원자분들도 궁금하실 겁니다. 재단의 얼굴이 개인적 사연을 앞세우는 일이 좋은 선례인지.”
은우는 드레스의 소매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 손목에 닿은 새 천의 결이 선명했다.
“개인적 사연을 앞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또렷했다.
“그래서 원본은 보존했고 제작자의 이름과 계약을 먼저 공개했어요. 오늘 이 옷이 보여주는 건 누군가의 안타까운 이야기가 아니라 손으로 만든 기술이 다음 계절에도 값싸게 사라지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은우는 조금 떨어져 있던 해정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 드레스는 해정공방 윤해정 디자이너가 만들었습니다. 갈라가 끝난 뒤에도 디자인과 판매 권리는 윤해정 씨에게 있고 재단이나 W&U 랩은 그 권리를 가져가지 않습니다.”
해정은 잠시 굳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이 적힌 보드를 본 뒤 천천히 은우 곁으로 걸어왔다.
“후원은 예쁜 이야기를 하나 사는 일이 아니라 다음 작업을 계속할 비용을 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은우가 말을 이었다.
“오늘 그 비용이 어디에 쓰이는지 모두 공개할 겁니다. 드레스의 값은 라벨 하나로 정해지지 않으니까요.”
그제야 누군가가 박수를 쳤다. 한 번 시작된 박수는 전시장 쪽에서부터 퍼졌다. 해정의 뺨이 붉어졌지만 그녀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오혜란의 미소가 아주 얇아졌다.
“드레스 한 벌로 거창한 말을 하는군요.”
“드레스 한 벌을 만드는 데도 누군가의 시간이 듭니다.”
은우는 예의 바르게 웃었다.
“그 시간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쪽보다 보여주는 쪽이 오늘 행사에는 더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오혜란은 더 말하지 않았다. 다만 시선 끝으로 어딘가를 향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은우는 그 미세한 움직임을 놓치지 못했다.
취재진 뒤에서 한 남자가 앞으로 나왔다.
그의 출입 배지에는 인터넷 경제지 이름이 적혀 있었다. 민규가 아까 보여 준 사진 속 남자였다.
“서 대표님. 진정성에 관해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정우진 기자가 녹음기를 켰다.
민규가 멀리서 지혁에게 고개를 저었다. 사전 질의 명단에 없던 질문이라는 뜻이었다.
은우는 대답을 미루지 않았다.
“말씀하세요.”
“두 분의 결혼도 오늘 갈라처럼 잘 설계된 캠페인입니까?”
순간 홀의 공기가 식었다.
정우진은 태블릿을 들어 보였다. 화면에는 은우와 지혁이 혼인신고 전 윤세라의 사무실 건물로 들어가는 흐릿한 사진이 떠 있었다. 사진만으로는 아무것도 증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증명보다 의심을 먼저 소비했다.
“혼인신고 직전 두 분이 변호사 사무실에 여러 차례 출입한 기록이 있습니다. 사업 투자와 결혼을 맞바꿨다는 제보도 받았고요. 계약 결혼이라는 소문에 답하실 생각은 없습니까?”
지혁의 표정이 얼음처럼 굳었다.
“근거 없는 질문입니다. 취재 절차를 지키십시오.”
“그럼 간단히 확인하면 되겠네요.”
기자는 카메라를 향해 몸을 돌렸다.
“정말 부부라면 서로를 아는지 몇 가지만 묻겠습니다. 답하지 않으면 의혹은 더 커질 테고요.”
지혁이 경호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턱선이 단단하게 굳었다. 한마디만 하면 이 남자를 행사장 밖으로 끌어낼 수 있었다.
은우는 그의 손목을 잡았다.
“잠깐만요.”
사람들은 기자의 말보다 두 사람의 반응을 보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피하면 오혜란이 흘린 이야기는 곧 사실처럼 자랄 터였다.
그러나 이 질문을 받는 순간 그들이 숨겨 둔 계약서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다. 은우는 지혁을 안다고 믿었다. 그 믿음이 공개된 자리에서 시험받을 줄은 몰랐다.
“좋습니다.”
은우가 기자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대신 기자님도 답을 걸어주세요. 질문이 사생활 검증이 아니라 공익적 취재라는 근거를 지금 밝히지 못하면 이 자리에서 정식 정정 보도와 출입 경위 공개를 요구하겠습니다.”
정우진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뒤쪽에서 오혜란의 잔이 멈췄다.
“알겠습니다.”
기자는 곧 표정을 고쳤다.
“퀴즈로 확인하시죠.”
지혁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겠습니까.”
“지혁 씨가 모르는 저도 있고 제가 모르는 지혁 씨도 있겠죠.”
은우는 그의 손을 더 단단히 잡았다.
“그래도 우리가 대답할 수 있는 건 많아요.”
지혁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들어왔다. 사람들이 보는 연기가 아니었다. 은우가 불안할 때 엄지로 손등을 한 번 쓸어 주는 그의 버릇이 그대로였다.
두 사람은 무대 중앙으로 걸어갔다.
정우진이 마이크를 들었다.
“첫 질문입니다. 강 전무님이 잠들지 못하는 밤, 가장 먼저 찾는 것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