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

14화: 들꽃의 반격
“은우야! 큰일 났어, 진짜 큰일 났어!”
W&U 랩의 아침은 한소라 실장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함께 시작되었다. 평소 씩씩하던 소라의 얼굴은 핏기가 싹 가셔 하얗게 질려 있었고, 손에 든 스마트폰을 쥔 손가락이 미세하게 덜덜 떨리고 있었다.
회의실에 모여 품평회 최종 리허설 자료를 검토하던 배윤주 수석과 임지선 사원의 시선이 일제히 유리문 쪽으로 쏠렸다. 은우는 들고 있던 태블릿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차분하게 소라를 응시했다.
“차분히 말해, 소라야. 무슨 일이야?”
“이것 좀 봐. 어젯밤에 퍼지기 시작한 농약 루머가 지금 주부 맘카페랑 대형 뷰티 커뮤니티 전체로 퍼졌어. 조회수가 벌써 몇십만을 넘었고, 실시간 인기 게시글에 도배가 됐단 말이야!”
소라가 다급하게 은우의 앞에 스마트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화면에는 어젯밤 고발 글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댓글을 증식시키며 불타오르고 있었다.
[대기업 신성리테일 신규 오가닉 브랜드 ‘들꽃’, 실상은 독성 농약 덩어리?]
[재벌 며느리 서은우 대표, 실적 조작 위해 농민 협박 및 가짜 오가닉 강행 의혹]
댓글창은 이미 서은우와 들꽃 브랜드를 향한 대중의 서슬 퍼런 조롱과 분노로 뒤덮여 있었다.
- 진짜 믿고 쓰려던 유기농 화장품이 독극물이었다니 소름 끼친다.
- 낙하산 며느리가 제일기안에서 갑질하다 쫓겨났다더니, 신성 돈으로 또 사기 치고 있었네.
- 품평회 당장 취소해라! 소비자를 마루타로 아나?
“대표님, 신성리테일 본사 홍보팀이랑 브랜드전략실에서 전화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황태수 상무 비서실에서도 당장 대표님 소환하라고 난리입니다.”
임지선 사원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수화기를 가리켰다. 사무실 안의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대며 공간을 짓눌렀다.
그러나 은우의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갑고 고요했다. 그녀는 소라의 폰을 건네받아 고발 글에 첨부된 이미지들을 하나씩 확대해 나갔다.
“보고서 양식이 이상해.”
은우의 단호한 한마디에 회의실의 소란이 일순 멎었다. 배윤주 수석이 안경을 고쳐 쓰며 다가왔다.
“양식이 이상하다니요, 대표님?”
“이 고발 글에 첨부된 ‘신성 내부 성분 분석표’ 이미지 말입니다. 상단의 문서 서식을 보면 ‘신성생활’이라고 적혀 있어요. 우리는 신성리테일 소속인데 말이죠. 그리고 이 문서 하단에 찍힌 검수자 디지털 서명은 지난달 에어핏 가습기 사태 때 책임지고 해고된 김성태 대표의 옛 서명입니다.”
은우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어설픈 위조품이군요. 에어핏 사태 당시 흘러나왔던 신성생활의 내부 문서 서식을 대충 긁어다가, 들꽃 브랜드의 성분 이름만 교묘하게 짜깁기한 겁니다. 게다가 양평에서 원료가 남양주 가공소로 직배송된 건 어제 오후입니다. 정밀 성분 분석은 최소 24시간이 걸리는데, 어젯밤에 분석 완료 보고서가 온라인에 유포되었다는 것 자체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아……!”
윤주가 탄성을 내뱉었다. 지선 역시 눈물이 고인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이거 전부 조작된 가짜 뉴스라는 말씀이시죠?”
“네. 제일기안의 박상철 이사와 강지성 부사장이 마음이 급했던 모양입니다. 감사실 압박이 들어오니 품평회 전에 우리를 완전히 매장하려고 무리수를 둔 거죠. 하지만 무리한 공작은 언제나 틈새를 남기는 법입니다.”
은우는 노트북을 열며 차갑게 지시했다.
“소라 너는 이 위조 문서의 서식 오류와 시간적 모순점을 정리해서 공식 반박문 초안을 작성해. 윤주 씨는 양평 농가에서 최근 3년간 받은 유기농 친환경 인증서와 토양 검사 성적서 원본을 취합해 주시고, 지선 씨는 양평의 이대원 조합장님께 연락해서 농가들의 동향을 살피세요. 우리는 계획대로 움직입니다.”
“계획대로라니요? 설마 품평회를 예정대로 진행하시겠다는 겁니까?”
소라가 놀라 물었다. 은우는 가방을 챙겨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망치면 가짜 뉴스가 진짜가 됩니다. 저는 본사로 들어가 황 상무와 대치하겠습니다. 전무님께서 판을 깔아두셨을 테니까요.”
신성리테일 본사 12층 대회의실.
회의실의 공기는 양평의 겨울바람보다 더 시베리아처럼 차가웠다. 긴 테이블 주위로 황태수 상무를 비롯한 대기업 임원들이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건 명백한 브랜드 사기극입니다! 아직 런칭도 안 한 브랜드가 독극물 루머에 휩싸여 주가가 요동치고 있어요! W&U 랩 서은우 대표의 자질 부족이 증명된 겁니다!”
황 상무가 테이블을 내리치며 고함을 질렀다.
상석에 앉은 강지혁 전무는 미동도 없이 팔짱을 낀 채, 서늘한 안경 너머로 황 상무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최민규 과장과 윤세라 변호사가 엄숙한 표정으로 대기 중이었다.
“황 상무. 루머의 진위가 밝혀지지도 않은 시점에서 사기극이라 단정하는 건 성급하군요.”
지혁의 단정하고 건조한 음성이 회의실을 파고들었다.
“진위요? 지금 온 인터넷이 뒤집어졌습니다! 대기업 브랜드에 농약이라니, 신성리테일의 신뢰도가 땅에 떨어졌단 말입니다! 당장 오늘 예정된 시제품 품평회를 무기한 연기하고, W&U 랩과의 대행 계약을 해지해야 합니다. 서 대표를 법적으로 처벌하지 않으면 신성의 품격을 지킬 수 없습니다!”
황 상무가 침을 튀기며 기세를 올리자, 주위의 임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지혁을 압박했다.
그때, 지혁이 들고 있던 만년필을 대리석 테이블 위로 탁, 하고 내려놓았다.
작은 파찰음이었지만 회의실 안은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해졌다. 지혁의 무뚝뚝한 얼굴에 번진 서늘한 독기가 임원들의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W&U 랩과 체결한 계약서 제9조에 대해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윤 변호사.”
지혁의 차가운 지시에 윤세라 변호사가 서류철을 펼치며 명확한 논조로 읽어 내려갔다.
“계약서 제9조 평판 및 명예 방어 의무에 따르면, 외부의 악의적인 음해나 근거 없는 비방으로 인해 W&U 랩의 평판이 위협받을 경우, 신성리테일은 공동 대응하며 파트너의 경영권과 명예를 방어할 의무를 집니다. 이를 이행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할 시, 신성리테일은 W&U 랩에 3배의 위약금을 지급해야 합니다.”
“뭐, 뭐요? 위약금이라니!”
황 상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가장 훌륭한 방어는 회피가 아니라 정면 돌파입니다.”
회의실 문이 열리며 서은우 대표가 위풍당당하게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단정한 차림으로 회의실 중앙으로 다가와 자신의 노트북을 빔프로젝터에 연결했다.
“W&U 랩 대표 서은우입니다. 임원 여러분이 염려하시는 온라인 고발 글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화면에 거대한 스크린이 켜지며 고발 글의 캡처본과 함께 붉은색 분석선들이 표시되었다.
“인터넷에 유포된 검수 보고서는 완벽한 위조품입니다. 보시다시피 신성리테일이 아닌 신성생활의 구형 문서 서식을 도용했고, 서명 역시 이미 해고된 김성태 대표의 것입니다. 물리적인 원료 가공 시간과 보고서 유포 시점 역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은우의 막힘없는 설명에 임원진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더불어, 어젯밤 윤세라 변호사님의 준법지원팀과 본사 보안 기술팀의 지원을 받아 이 루머를 조직적으로 퍼뜨린 계정들의 IP 대역과 유포 경로 로그를 긴급 확보했습니다. 추적 결과, 특정 사설 바이럴 대행사인 ‘애드밸류’의 전용 VPN 대역과 98% 일치했습니다. 애드밸류는 제일기안의 박상철 이사가 오랫동안 비자금을 집행하며 관리해 온 하청 업체입니다. 법적 효력을 갖춘 원본 로그 파일은 이미 공증 처리를 마쳤습니다.”
은우가 띄운 IP 추적 지도와 거래 내역서 화면을 본 황 상무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건 신성 내부의 유출 정보와 제일기안 박상철 이사의 배후 공작이 결합된 악의적인 업무방해 행위입니다. 만약 여기서 우리가 품평회를 연기하거나 런칭을 취소한다면, 음모론자들의 프레임에 스스로 갇히는 꼴이 됩니다.”
은우는 지혁을 똑바로 응시하며 단호하게 덧붙였다.
“우리는 예정대로 내일 품평회를 진행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국가공인 기관의 완벽한 성적서와 투명한 데이터를 공개해 대중의 불신을 단숨에 날려 버리겠습니다.”
지혁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은우의 얼굴에 떠오른 확신을 응시했다. 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맴돌았다.
“서 대표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전략기획실은 예정대로 품평회를 강행할 것이며, 홍보팀은 일절 언론 변명을 중단하고 내일 발표회 생중계 준비에 집중하십시오. 황 상무는 이 위조 문건이 어디서 흘러나갔는지 감사실의 추가 조사에 협조하시길 바랍니다.”
지혁의 서슬 퍼런 칼날 같은 선언에 황 상무는 덜덜 떨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 길로 은우와 지혁은 국가공인 화학융합시험연구원(KTR)을 직접 방문했다.
이미 최민규 과장이 긴급 속성 분석 라인을 예약해 둔 상태였다. 두 사람은 남양주 가공소에서 밤새 생산된 들꽃 1차 시제품 샘플을 직접 연구원에게 전달하며 철저한 밀착 검사를 의뢰했다.
“내일 오전 10시 품평회 직전까지 공식 시험 성적서가 발급되어야 합니다. 부탁드립니다, 책임연구원님.”
지혁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협조를 구했다.
같은 시각, 임지선 사원으로부터 소식을 전해 들은 양평 영농조합의 이대원 조합장 역시 발 빠르게 움직였다.
“서 대표! 우리 양평 농민들이 돈 몇 푼 때문에 대기업 장난질에 놀아날 사람들로 보였답니까? 억울해서 잠이 안 옵니다! 우리가 3년 동안 농약 한 방울 안 치고 땅을 일군 기록들, 전부 다 팩스로 쏠 테니까 걱정 마쇼!”
이대원 조합장은 즉시 조합원들을 독려해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에서 발급받은 친환경 농산물 인증서와 토양 및 용수 정밀 검사서 원본 수십 장을 W&U 랩 사무실로 송부했다.
늦은 밤, 어두워진 W&U 랩 사무실.
은우와 지혁은 단둘이 머리를 맞대고 품평회 프레젠테이션 슬라이드를 전면 수정하고 있었다.
회의실 테이블 위에는 양평 농가에서 보내온 수십 장의 유기농 인증 서류들과 KTR에서 실시간으로 보내온 가승인 불검출 검사 데이터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은우의 손끝이 조금씩 무거워지는 것을 지혁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은우의 짙은 눈 밑에는 피로의 그늘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지혁이 말없이 다가가 따뜻한 물을 은우의 손가락 옆에 놓아주었다. 그리고 가만히 은우의 차가운 손등 위로 자신의 넓고 따뜻한 손을 덮었다.
화끈할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은우의 손등을 타고 전신으로 번져 나갔다. 은우가 놀라 고개를 들자 안경을 벗은 지혁의 깊고 짙은 눈동자가 코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평소의 건조하던 전무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은우만을 눈에 담은 사내의 깊은 눈빛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어두운 사무실 안, 두 사람의 숨소리가 어색할 만큼 가깝게 엉켰다. 은우는 침을 삼키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정적 속에서 지혁의 단단한 온기에 온전히 갇혀 버렸다.
“서 대표. 너무 무리하고 있습니다. 몸을 상해가며 증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의 가치는 내가 가장 잘 압니다.”
지혁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심장박동을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안경을 벗어 더욱 뚜렷해진 그의 얼굴선과 짙은 눈썹, 그리고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단단한 숨결에 은우의 등 뒤로 미세한 전율이 스쳐 지나갔다. 은우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손길을 밀어내지 못했다. 언제나 홀로 서야만 했던 차가운 비즈니스 전장에서, 지혁이 건네는 안도감은 그녀를 밑바닥에서부터 든든하게 떠받쳐 주고 있었다.
“……전무님. 이 싸움은 제 이름이 걸린 일입니다. W&U 랩이 낙하산이라는 조롱을 벗고 독립하려면, 제 스스로 완벽하게 증명해 내야만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 혼자 걷게 두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어머니께서도 오늘 낮에 전화를 주셨더군요. ‘우리 은우 괴롭히는 놈들이 누구냐’며 사교계 인맥을 동원해 조작 대행사의 자금 흐름을 알아봐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 역시 지성 형님의 물류 감사 라인을 더 꼼꼼히 챙기라고 비서실에 직접 지시하셨고요.”
지혁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며 은우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단단하게 깍지 껴 쥐었다. 손끝에서 스며드는 깊은 유대감이 은우의 눈가를 뜨겁게 매만졌다.
“당신 뒤에는 이제 나뿐만 아니라, 당신을 지지하는 든든한 가족이 있습니다. 그러니 조금은 기대도 괜찮습니다. 지혁 씨라고, 불러주는 것처럼요.”
지혁의 입가에 어린 나직하고 따뜻한 속삭임에 은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평생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으면 빚을 지는 것이라 믿었고, 쓸모를 증명해야만 버려지지 않는다고 믿으며 자신을 채찍질해 왔던 은우였다. 하지만 계약 결혼으로 맺어진 이 가짜 시가 식구들과 강지혁이라는 남자는, 어느새 그녀의 얼어붙은 인생 구석구석을 아늑한 온기로 물들이고 있었다.
은우는 지혁의 짙은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목끝까지 차오르는 벅찬 온기를 엷은 미소에 실어 보냈다.
“고맙습니다, 지혁 씨. 내일 멋지게 보여주죠.”
처음으로 전무님이 아닌 그의 이름을 불러낸 순간, 고요한 밤의 공기가 찌릿할 정도로 뜨겁게 타올랐다. 두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던 비즈니스 경계선이 온전하게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다음 날 오전 10시, 신성리테일 본사 그랜드 홀.
쇼케이스장 겸 품평회장은 수많은 뷰티 바이어들과 경제지 기자들, 그리고 신성그룹의 주요 이사진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무대 뒤편에서 황태수 상무는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며 제일기안 박상철 이사에게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박상철이 미리 매수한 경제지 프락치 기자가 객석 앞줄에 앉아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드디어 조명이 꺼지고, 무대 위로 우아하고 차분한 검은색 정장 차림의 서은우 대표가 올라섰다.
화면에 들꽃 브랜드의 투명한 용기 디자인과 ‘작은 바퀴들이 배달한 정직한 가치’라는 슬로건이 떠오르자, 객석에서 얕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은우는 마이크를 잡고 차분하면서도 힘 있는 어조로 발표를 시작했다. 대중의 불신을 읽어내고, 그 불신을 신뢰로 전환하는 천재 마케터의 완벽한 스피치였다.
발표가 끝나고 지의응답 시간이 시작되자마자, 앞줄에 대기하던 프락치 기자가 기다렸다는 듯 마이크를 낚아채 목소리를 높였다.
“서 대표님! 최근 온라인 맘카페를 중심으로 들꽃 화장품의 양평 원료에서 기준치의 5배가 넘는 농약이 검출되었다는 고발 문서가 유포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해명해 주십시오! 친환경 상생이라는 타이틀로 소비자를 기만한 것 아닙니까?”
순식간에 품평회장이 얼음물을 끼얹은 듯 찬물로 뒤덮였다. 바이어들과 임원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카메라 플래시가 은우를 향해 거칠게 터져 왔다. 황 상무는 뒤에서 비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은우는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기자를 향해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질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그 부분에 대해 가장 먼저 설명해 드리고자 준비했습니다.”
은우가 리모컨을 누르자, 무대 뒤의 거대한 LED 화면에 문서 한 장이 띄워졌다.
오늘 아침 9시 정각에 공식 날인된 국가공인 화학융합시험연구원(KTR)의 선명한 정밀 시험 성적서였다.
[들꽃 1차 생산 전 제품 성분 정밀 검사 결과: 유기인계 및 잔류 농약 320종 일체 불검출(0.00%)]
“오늘 아침 9시에 공식 발급된 KTR의 정밀 시험 성적서입니다. 들꽃의 원료와 완제품에는 단 0.01%의 농약이나 유해 성분도 검출되지 않았음을 국가 공인 기관이 보증합니다.”
화면이 바뀌며 양평 이대원 조합장과 농민들의 인터뷰 영상이 흘러나왔다. 그들이 자랑스럽게 친환경 농산물 인증서를 치켜들며 정직하게 일구어낸 흙과 땀방울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더불어, 온라인에 살포된 위조 보고서의 디지털 서식 분석 결과를 공개합니다.”
은우의 목소리는 갈수록 정갈하고 날카로워졌다.
화면에는 조작된 고발 문서의 메타데이터와 IP 추적 결과가 나열되었다. 최초 업로드 및 추천수 조작을 감행한 매크로 IP 대역이 제일기안의 대행 업체인 애드밸류의 전용 회선이라는 사실이 선명한 도표로 시각화되었다.
“대기업의 경쟁사 공작과 개인의 비열한 열등감이 빚어낸 명백한 위조 사기극입니다. 우리는 이 문서를 유포한 최초 유포자 및 배후 세력에 대해 즉각적인 업무방해 및 명예훼손 혐의로 오늘 오전 서울중앙지검에 형사 고소를 접수 완료했습니다.”
은우는 단호하게 마이크를 고쳐 쥐며 좌중을 압도했다.
“들꽃은 속이지 않습니다. 가장 투명하게 다 보여 드리는 것이 우리의 원칙입니다. 어떤 음해로도 들꽃이 가진 정직함의 가치를 꺾을 수는 없습니다.”
그 순간, 질문을 던졌던 프락치 기자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사색이 된 얼굴로 슬그머니 뒷문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대기하고 있던 신성그룹 준법보안팀 직원들이 조용히 그의 앞을 막아서며 신분증과 기자증 확인을 요구했다.
무대 아래에서 황 상무는 얼굴 근육을 바르르 떨며 의자 깊숙이 주저앉았다. 완전한 은우와 지혁의 대승이었다.
일순간 고요하던 장내에, 누군가 먼저 시작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짝, 짝, 짝!
상석에 서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던 강지혁 전무의 손에서 시작된 박수였다. 이내 대형 유통망의 바이어들과 취재진이 열광적인 환호와 함께 일제히 기립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거대한 박수 소리가 그랜드 홀 천장을 뒤흔들었다.
“정말 대단합니다! 이렇게 신속하고 투명한 위기 대응은 본 적이 없습니다! 브랜드의 진정성에 감동했습니다!”
“W&U 랩과 즉시 들꽃 1차 물량 전량 납품 계약을 체결하고 싶습니다!”
바이어들이 계약서를 들고 은우의 앞으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은우는 무대 아래에서 자신을 향해 든든하게 미소 짓는 지혁을 바라보았다. 지혁의 눈동자는 마치 찬란하게 만개한 들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때, 은우의 재킷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부르르 울렸다. 발신자는 이명희 여사였다.
- 은우야, 고생 많았다. 오늘 저녁에 한남동 본가로 지혁이랑 같이 들어오너라. 이 애미가 우리 장한 며느리를 위해 최고의 만찬을 준비해 두었단다.
은우는 지혁을 보며 싱긋 웃었다.
지성의 음모와 박상철의 방해를 딛고, 들꽃의 단단한 뿌리가 신성의 중심부에서 찬란하게 피어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