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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12화

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

계약 결혼인데 시부모님이 너무 좋아해

12화: 들꽃의 뿌리

“은우야, 큰일 났어! 방금 양평 시제품 공장에서 연락 왔는데, 우리 원료 공급망을 맡기로 했던 소상공인 조합 쪽에 신성건설 자회사 유통망 트럭들이 전부 철수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대! 들꽃 시제품 생산 자체가 불가능해질 위기야!”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온 한소라의 비명이 밀폐된 지혁의 차 안을 날카롭게 갈랐다. 은우의 손끝이 일순 굳어졌다.

지혁은 신속하게 조수석 대시보드 쪽으로 손을 뻗어 스피커폰 볼륨을 키웠다. 그의 단정한 미간이 깊게 좁혀졌다.

“한 실장님, 지혁입니다. 일방적 통보라니요? 계약서에 명시된 운송 일정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대체 무슨 명목으로 철수했다는 겁니까?”

지혁의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리자 소라가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지혁의 개입에 당황한 듯 잠시 멈칫하던 소라가 이내 빠른 어조로 보고를 이어갔다.

“아, 전무님! 그게…… 신성건설 물류 자회사인 ‘신성물류’ 측에서 긴급 안전 점검과 노선 재배치를 이유로 들었어요. 오늘 배정된 모든 운송 트럭을 차고지로 강제 회수 조치했다고 합니다. 위약금은 규정대로 추후 정산하겠다는 배째라 식 태도예요. 양평 현장에서는 지금 수확해 둔 원료들이 창고에 방치되어 상하기 일보 직전이라고 난리가 났습니다.”

위약금을 물고서라도 프로젝트의 목줄을 끊겠다는 노골적인 횡포였다.

은우는 무릎 위에 놓아둔 태블릿 화면을 응시했다. 화면 속에는 들꽃 브랜드의 1차 라인업인 유기농 기초 화장품의 핵심 원료, 양평산 카모마일과 어성초 추출물 공급망이 붉은색 경고등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강지성 부사장 짓이군요.”

은우의 입술 사이로 서늘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건설 부문 감사가 시작되자마자 리테일의 물류망을 건드려 전무님의 발목을 잡겠다는 속셈이겠죠. 들꽃 브랜드의 시제품 품평회가 무산되면, 신규 브랜드 전권을 제게 넘겨준 전략기획실의 판단 역시 큰 타격을 입을 테니까요.”

지혁의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핏줄이 불거진 그의 손등 위로 차가운 분노가 일었다.

“신성물류는 비록 건설 자회사 소속이지만, 그룹의 공용 자산에 가깝습니다. 그걸 사적인 보복과 견제의 수단으로 동원하다니…….”

지혁은 즉시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앞을 주시했다.

“최민규 과장, 지금 바로 신성물류 대표실과 연락 취해. 일방적 계약 파기에 따른 업무방해죄와 배임 혐의를 검토하고, 감사실에 물류 배차권 사적 유용에 대한 예비 감사 청구안 제출 준비하라고 해. 윤세라 변호사한테도 즉시 법적 대응 지시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린 지혁이 시동을 걸었다. 엔진의 묵직한 구동음이 지하 주차장을 울렸다.

“양평 공장으로 갑니다. 차 안에서 대안을 찾죠.”


서울을 빠져나가는 동안 은우는 태블릿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차창 밖으로 빌딩 숲이 사라지고 푸른 교외의 풍경이 펼쳐질 때까지, 은우는 촘촘하게 얽힌 숫자와 텍스트를 머릿속에 지도로 그려 나갔다.

“전무님. 본사로 돌아가 지성 부사장의 물류망을 법적으로 징계하는 건 사후 약방문입니다. 감사와 법적 절차는 최소 며칠이 걸려요. 하지만 양평에서 수확한 생원료들은 가공을 시작하지 않으면 6시간 내에 갈변하고 효능이 급격히 저하됩니다. 즉, 원료가 썩는 순간 들꽃 프로젝트는 끝납니다.”

지혁이 힐끗 은우를 바라보았다. 위기 속에서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가장 먼저 구해야 할 것’을 골라내는 그녀의 눈동자는 차갑도록 이성적이었다.

“그럼 대형 물류 대행사를 새로 섭외합니까? 지금 바로 배차 가능한 업체를 수소문하라고 비서실에 지시하겠습니다.”

“안 됩니다. 메이저 물류사들은 대부분 대성그룹이나 박상철 이사의 입김이 닿아 있거나, 신성가 내부 싸움에 눈치가 보여서 오늘 내로 10대가 넘는 탑차를 바로 양평으로 보내려 하지 않을 겁니다. 보낸다 해도 중간에 또 어떤 핑계로 멈춰 설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은우는 태블릿 화면에 지도 하나를 띄웠다.

“우리가 가진 가장 큰 무기는 대기업의 거대함이 아니라 대기업이 쳐다보지도 않는 작고 촘촘한 연결망입니다. 정가찬 사장님이 제게 경기도 영농조합 소속의 소형 1톤 탑차 연합회 연락처를 넘겨주신 적이 있습니다. 대기업의 대형 유통망에 소외당해서 지역 반찬 배달이나 소규모 농산물 직거래만 담당하는 동네 탑차들입니다.”

지혁의 눈빛이 미세하게 커졌다. 은우의 말은 이어졌다.

“그들의 이동 경로는 대기업의 물류 감시망에 잡히지 않아요. 강지성 부사장이 아무리 신성의 큰 바퀴를 멈춰 세워도 온 동네를 핏줄처럼 누비는 작은 바퀴들까지 전부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대기업의 거대한 물류망이 끊어졌다면 우리는 가장 작은 모세혈관 같은 물류망을 직조해야 합니다.”

지혁의 입가에 엷은 탄성이 섞인 미소가 번졌다.

“서 대표. 당신의 뇌는 정말 매 순간 마케팅과 위기극복의 기획으로 가득 차 있군요. 정가찬의 유통망이라니…… 상상도 못 했습니다.”

“비즈니스는 결국 사람의 욕망과 필요를 연결하는 일이니까요. 지금 당장 정가찬 대표님께 연락해 경기도 영농조합의 탑차들을 수소문하겠습니다. 전무님은 그 차량들이 움직일 수 있는 합당한 명분과 비용을 준비해 주세요.”

“돈이라면 얼마든지 집행하겠습니다. 전략기획실 예비비는 이런 비상 상황을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양평의 들꽃 시제품 공장은 은우의 예상보다 훨씬 험악한 분위기였다.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공장 앞마당에는 파란색 천막 아래 수백 개의 플라스틱 상자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상자 안에는 아침 일찍 수확한 싱그러운 카모마일 꽃잎과 초록빛 어성초가 가득 담겨 있었지만, 내리쬐는 햇볕 아래에서 서서히 숨이 죽어가고 있었다.

“서 대표!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은우와 지혁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밀짚모자를 쓴 50대 중반의 남성이 성큼성큼 다가와 소리를 질렀다. 양평 소상공인 조합의 이대원 조합장이었다. 그의 뒤로 굳은 표정의 농민 대여섯 명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대기업이 우리 같은 농민들 데리고 장난치는 것도 유분수지! 전속 계약 맺는다고 다른 납품처 다 정리하게 만들어 놓고, 정작 약속한 날에 트럭 한 대 안 보내면 어쩌자는 겁니다? 이 아까운 꽃들이 다 말라 비틀어지게 생겼는데!”

“맞아요! 재벌 며느리 소꿉장난에 우리 등골만 터지는 거 아닙니까!”

농민들의 거친 항의가 사정없이 은우를 향해 쏟아졌다. 은우의 뺨을 스쳐 지나가는 비난은 매서웠다.

지혁은 본능적으로 은우의 앞을 가로막으며 농민들과 눈을 맞추었다. 그의 넓은 어깨가 은우에게 쏟아지는 날 선 시선들을 묵묵히 차단했다.

“신성그룹 전략기획 전무 강지혁입니다. 오늘 물류 배차 과정에서 발생한 불미스러운 사태에 대해 머리 숙여 사과드립니다. 저희는 이 계약을 결코 가볍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무고 회장이고 간에, 당장 물건을 못 실어 가면 무슨 소용이요! 당장 내일부터 시제품 라인 돌아가야 한다면서요!”

이대원 조합장이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때, 지혁의 등 뒤에서 은우가 조용히 걸어 나왔다. 그녀는 농민들을 향해 허리를 직각으로 숙여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제 불찰입니다. 신성이라는 이름의 안정성을 과신하고, 독점 물류망의 위험성을 사전에 대비하지 못했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대표이사 서은우의 갑작스러운 머리 숙인 사과에, 기세등등하게 쏟아지던 비난이 일순간 잦아들었다. 은우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창고 앞에 쌓인 카모마일 상자로 다가갔다. 그녀는 직접 맨손으로 꽃잎을 한 줌 들어 올렸다. 꽃잎의 끝부분이 살짝 누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이 꽃들이 흙을 떠나 이 자리에 오기까지, 조합원 여러분이 흘린 땀방울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여러분이 주신 이 정직한 가치가 썩어 문드러지도록 방치하지 않겠습니다. 늦어도 앞으로 3시간 이내에, 이 모든 원료를 가공 공장으로 이송하겠습니다.”

“3시간이라니요? 대형 트럭 배차가 그렇게 쉽게 됩니까?”

조합장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예, 신성의 대형 트럭은 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신 여러분의 이웃이 올 겁니다.”

은우가 휴대폰을 들어 수락 신호를 보냈다.

그 순간, 멀리 공장 진입로 너머로 흙먼지를 일으키며 하얀색 소형 탑차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대, 두 대, 세 대…… 1톤 남짓한 소형 탑차들이 줄을 지어 공장 앞마당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차량 옆면에는 ‘정가찬 신선 물류’, ‘경기남부 영농조합’ 같은 소박한 글씨들이 붙어 있었다.

순식간에 마당을 가득 메운 소형 탑차는 무려 12대에 달했다.

“이, 이게 다 뭡니까?”

이대원 조합장이 멍한 표정으로 차들을 바라보았다.

지혁이 농민들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그의 목소리에는 재벌가의 오만함 대신, 비즈니스 파트너를 향한 단단한 책임감이 실려 있었다.

“신성건설의 대형 트럭들은 사적인 횡포로 멈춰 섰지만, 우리는 이 브랜드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여기 오신 경기 영농조합의 소형 차량 12대가 오늘 여러분의 원료를 나누어 싣고 남양주 가공소로 직행할 겁니다.”

지혁은 비서실에서 즉각 송금한 내역이 찍힌 패드를 조합장에게 보여주었다.

“더불어, 오늘 배차 지연으로 인해 발생한 농가의 정신적 피해와 대기 시간에 대한 보상으로, 전략기획실 예비비에서 통상 수송 운임의 2배를 조합원 전원에게 현금으로 즉시 지급 완료했습니다. 지금 확인해 보십시오.”

농민들이 주머니 속의 휴대폰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띵동 하는 문자 알림음과 함께 계좌 입금 확인 메시지가 울려 퍼졌다. 2배에 달하는 파격적인 보상금과, 눈앞에 늘어선 12대의 소형 탑차들을 본 농민들의 얼굴에 경탄과 안도의 빛이 동시에 서렸다.

“이 조합장님.”

은우가 이대원의 손을 잡았다.

“대기업의 거창한 트럭보다, 이 흙길을 가장 잘 아는 작은 바퀴들이 우리 들꽃의 진짜 뿌리가 될 겁니다. 저희와 함께 이 가치를 지켜봐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대원 조합장은 거친 손으로 은우의 손을 맞잡았다. 그의 눈에 서려 있던 불신이 눈 녹듯 사라지고, 붉게 상기된 얼굴로 털털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서 대표,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소문은 들었지만 진짜배기였네. 대기업 높은 분들이 다 당신 같으면 세상 살기 참 편할 텐데 말이요. 좋습니다! 우리 농민들도 가만히 서 있을 수 없지. 다들 소매 걷어붙이고 상자 실읍시다!”

“오냐, 가자고!”

농민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심해서 들어요! 카모마일은 짓눌리면 향이 변합니다!”

은우의 지휘 아래, 공장 마당은 활기찬 작업장으로 변모했다.

놀라운 것은 지혁의 행동이었다. 평생을 먼지 하나 없는 대기업 전무실에서 결재서류만 만지던 재벌 3세 강지혁이, 스스로 정장 재킷을 벗어던지고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 수송 상자를 나르기 시작한 것이다.

“전무님! 이건 현장 인부들이…….”

최민규 과장이 경악하며 말리려 했으나, 지혁은 묵묵히 20킬로그램이 넘는 카모마일 상자를 들어 탑차 적재함으로 옮겼다. 그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턱선으로 흘러내렸고, 하얗고 깨끗했던 셔츠는 금세 흙먼지와 나뭇잎으로 얼룩졌다.

은우는 물을 건네며 지혁의 곁으로 다가갔다.

“전무님, 굳이 이런 일까지 직접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옷이 다 망가졌잖아요.”

지혁은 은우가 건넨 생수병을 받아 단숨에 들이켠 뒤, 소매로 입가를 닦으며 낮게 웃었다.

“신성의 전무로서는 할 필요가 없는 일일지 몰라도, W&U 랩 서은우 대표의 동업자이자 남편으로서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동업자가 흙탕물에 발을 담갔는데, 나 혼자 대리석 바닥 위에 서 있을 수는 없죠.”

그의 젖은 머리칼 사이로 쏟아지는 시선이 뜨거웠다. 은우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수많은 작은 탑차들이 엉키고 설키며 원료를 싣는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두 사람 사이에는 오직 두 사람만이 공유하는 기묘하고도 끈끈한 텐션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비즈니스 파트너십을 넘어, 서로의 상처와 진심을 온전히 이해하는 이들만이 나눌 수 있는 호흡이었다.

마지막 12번째 탑차의 문이 철컥 닫히고, 시동 소리와 함께 차량들이 줄지어 공장을 빠져나갔다.

붉게 물든 석양이 양평의 산자락 너머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사방이 고요해진 마당에서, 은우와 지혁은 나란히 서서 흙먼지를 뿜으며 멀어지는 탑차들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바람이 불어와 은우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흔들었다. 지혁은 가만히 은우의 곁으로 다가서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은우의 머리칼에 붙어 있던 작은 카모마일 꽃잎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은우가 흠칫 놀라며 지혁을 바라보았다. 지혁의 손가락 끝이 은우의 귀밑 머리칼에 아주 미세하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손끝에서 스며드는 온기에 은우의 심장이 세차게 요동쳤다.

“오늘 아주 멋졌습니다, 서 대표.”

지혁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층 더 부드럽고 가라앉아 있었다.

“거대 물류망의 차단이라는 함정을, 지역 상생이라는 브랜딩의 가치로 되받아치는 모습…… 역시 내가 선택한 최고의 파트너답군요.”

은우는 붉어진 뺨을 감추려 짐짓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전무님의 신속한 예비비 집행과 단호한 대처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우리는 꽤 괜찮은 한 팀이네요.”

“한 팀 정도가 아니라, 완벽한 부부죠.”

지혁이 툭 던진 그 한마디에 은우는 말문이 막혔다. 장난스러운 듯하면서도 눈빛 깊은 곳에 서려 있는 진심의 무게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혁은 이내 표정을 굳히며 차가운 비즈니스맨의 눈빛으로 돌아왔다.

“서울로 올라가는 대로, 강지성 부사장이 저지른 짓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만들겠습니다. 신성물류의 일방적 배차 취소와 독점 지위 남용 혐의에 대한 내부 감사 문서를 내일 오전 회장님 보고 라인에 정식 상정하겠습니다.”

“이번엔 우리가 그들의 유통망을 끊을 차례군요.”

은우가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

두 사람은 석양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단단하게 무언의 약속을 나누었다. 대기업의 거대한 그늘 아래서, 가장 낮은 곳에서 피어난 들꽃의 뿌리가 서서히 신성의 심장부를 향해 뻗어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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