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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 전이자는 다시 산다9화

밑바닥 전이자는 다시 산다

밑바닥 전이자는 다시 산다

9화: 닿기 전의 흔적

붉은 점이 찍힌 손목패들만 앞으로 밀려났다.

한서준은 자기 손목을 보지 않으려 했다. 보지 않아도 알았다. 나무패 뒤쪽에는 선 하나가 있고, 그 옆에 작은 점 하나가 있었다.

그 점 때문에 물통은 멀어졌다.

그 점 때문에 철문 안쪽의 더 낮은 공기가 가까워졌다.

판자 든 남자가 막대 끝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말은 없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움직였다.

붉은 점이 없는 사람들은 고개를 더 숙였다. 붉은 점이 있는 사람들은 서로의 손목을 보지 않는 척하며 좁은 홈 쪽으로 갔다. 서준이 한 박자 늦자 뒤에서 막대가 허벅지를 밀었다.

그는 넘어질 뻔했다.

넘어지면 끝이었다.

그 생각이 먼저 왔다.

안쪽 홈 옆에는 계단처럼 보이는 턱이 있었다. 그러나 내려가는 계단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 턱 앞에서 자루를 받았다. 자루를 턱 위에 밀고, 아래에서 올라오는 두드림에 맞춰 다음 홈으로 넘겼다.

쿵.

바닥이 아주 조금 떨렸다.

쿵.

검은 물이 홈 안에서 흔들렸다.

서준은 목을 삼켰다. 삼킬 것은 없었다. 혀가 입천장에 붙었다가 떨어지지 않았다.

앞쪽의 마른 남자가 멀리 물통 옆에서 그를 보고 있었다. 남자는 바가지를 들고 있었지만 마시지 않았다. 서준과 눈이 마주치자 아주 작게 고개를 저었다.

오지 말라는 뜻인지.

거기로 가면 안 된다는 뜻인지.

이미 늦었다.

막대가 다시 밀었다.

서준은 붉은 점 표시자들의 뒤에 섰다. 앞의 여자는 검은 끈이었다. 조금 전 미끄러진 여자와 같은 끈이었다. 같은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절뚝이는 다리도, 젖은 머리도, 말라붙은 입술도 전부 비슷했다.

비슷하다는 사실이 더 싫었다.

그는 기억하려 하지 않았다.

기억하면 늦었다.

자루가 내려왔다.

이번 자루는 전보다 작았다. 대신 더 단단했다. 겉감은 젖어 있었지만 안쪽에 든 것은 물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돌도 아니었다. 자루가 턱에 닿을 때마다 속에서 잘게 긁히는 소리가 났다.

앞사람이 두 손으로 자루 끝을 잡았다.

서준도 반대쪽을 잡았다.

손바닥이 바로 미끄러졌다.

쿵.

아래에서 소리가 올라오자 자루 속이 한쪽으로 쏠렸다. 검은 물이 자루 이음새에서 새어 나왔다. 물은 서준 쪽으로 흐르다가, 바닥 떨림에 맞춰 옆으로 틀어졌다.

서준은 발을 뺐다.

늦었다.

물은 이미 발끝에 닿았다. 신발 밑이 미끄러졌다. 그는 자루를 놓칠 뻔했고, 앞사람의 어깨가 돌아갔다.

막대가 벽을 쳤다.

쩍.

서준은 이를 악물었다.

이번에도 바닥만 보면 늦었다.

그는 앞사람의 손을 보았다. 손목이 먼저 비틀렸다. 그러나 어깨가 손목보다 먼저 속일 수 있었다. 손목과 어깨를 같이 보려 하자 발밑을 놓쳤다.

발을 보면 손을 놓쳤다.

손을 보면 소리를 놓쳤다.

소리를 기다리면 이미 흔들렸다.

어떻게 하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줄은 멈추지 않았다.

앞사람이 자루를 밀었다.

서준도 밀었다.

자루가 턱 위에 닿는 순간, 아래에서 쿵 하는 소리가 올라왔다. 검은 물이 오른쪽으로 튀었다. 앞사람이 오른발을 뺐고, 서준도 따라 뺐다.

그 자리에 뒤쪽 남자의 발이 들어왔다.

남자가 짧게 신음했다.

서준은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다음 자루를 놓쳤다.

그 생각이 너무 익숙해지고 있었다.

마음 한쪽에서 검은 끈 여자의 무릎이 떠올랐다. 자루 아래로 꺾였던 다리. 숨이 막힌 소리. 누군가가 끌고 가던 손.

서준은 이를 세게 물었다.

미안하다고 생각하지 말자.

지금 생각하면 또 늦는다.

하지만 생각하지 않으려는 것만으로도 늦었다.

다음 자루가 내려왔다.

이번에는 앞의 남자가 손을 놓기 전에 시선을 피했다. 서준 쪽을 보지 않았다. 바닥도 보지 않았다. 턱 아래 구멍 쪽을 본 뒤 바로 고개를 숙였다.

서준은 그 시선을 따라가려 했다.

구멍은 어두웠다.

아래에서 다시 소리가 올라왔다.

쿵.

그보다 아주 조금 먼저, 자루 겉감이 떨렸다.

소리보다 먼저였다.

서준은 숨을 멈췄다.

방금은 들은 것이 아니었다. 손바닥에서 느껴졌다. 자루 안쪽의 마른 것들이 한쪽으로 아주 조금 긁혔다. 그 다음에야 아래가 울렸다.

쿵.

물은 그 뒤에 움직였다.

순서가 있었다.

먼저 손바닥.

그 다음 바닥.

그 다음 물.

그 다음 발.

서준은 다음 자루를 잡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자기 손 떨림과 자루 떨림이 섞였다. 구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손가락에 힘을 너무 많이 주었다가 다시 조금 풀었다.

너무 세게 잡으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놓으면 떨어졌다.

그 중간을 몰랐다.

앞줄이 한 칸 밀렸다.

서준은 같이 밀렸다.

이번 자루는 다른 손에서 넘어왔다. 손등에 오래된 상처가 많은 남자였다. 남자는 자루를 잡자마자 숨을 들이마셨다. 짧고 얕았다. 소리를 참는 숨이었다.

서준은 남자의 입을 보았다.

입을 보면 손을 놓쳤다.

남자의 손목이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 어깨도 굳지 않았다. 그런데 입술이 먼저 말려 들어갔다. 자루 속에서 무언가가 굴렀고, 남자의 손등에 힘줄이 튀어나왔다.

쿵.

서준은 늦게 발을 뺐다.

검은 물은 닿지 않았다. 대신 자루 속 무게가 손목으로 확 밀려왔다. 그는 버티려고 팔꿈치를 굽혔다. 그러자 반대쪽 남자의 팔꿈치가 꺾였다.

남자의 눈이 서준을 향했다.

욕인지, 애원인지 알 수 없었다.

알아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막대가 가까이 있었다.

서준은 팔꿈치를 다시 폈다. 손목이 찢어질 것 같았다. 자루가 반 박자 늦게 턱 위로 올라갔다. 검은 물이 이번에는 아무 데도 튀지 않았다.

그런데 남자가 비틀거렸다.

물 때문이 아니었다.

무게 때문이었다.

서준은 그제야 알았다. 위험은 젖은 바닥만이 아니었다. 자루 안의 무게가 어느 쪽으로 굴러가는지도 사람을 밀었다. 물은 그 뒤에 따라오는 표시일 뿐이었다.

표시.

그 단어가 머리에 걸렸다.

손목패의 붉은 선도, 점도, 바닥의 얼룩도 전부 뒤늦은 표시였다. 이미 누군가가 넘어지고, 이미 누군가가 끌려가고, 이미 무언가가 정해진 뒤에 남은 것들이었다.

살려면 그 전을 봐야 했다.

정해지기 전.

닿기 전.

떨어지기 전.

그 생각은 깨달음이라기보다 겁에 가까웠다. 더 많이 봐야 한다는 뜻이었고, 더 빨리 틀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서준은 목 안쪽의 피 맛 같은 갈증을 삼켰다.

다음 두드림이 오기 전, 자루 안쪽이 먼저 오른쪽으로 긁혔다.

서준은 오른발을 빼려 했다.

앞사람의 어깨가 왼쪽으로 굳었다.

그는 멈췄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오른쪽인가.

왼쪽인가.

바닥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검은 물도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 막대가 뒤에서 가까워지고 있었다. 서준은 숨을 참은 채 앞사람의 손을 보았다.

손목은 오른쪽.

어깨는 왼쪽.

시선은 아래.

그리고 손바닥 안쪽에서 자루가 다시 아주 작게 긁혔다.

이번에는 왼쪽이었다.

서준은 왼발을 반 뼘 뺐다.

쿵.

검은 물이 왼쪽으로 쏟아졌다.

발끝 바로 앞이었다.

맞았다.

그 말이 머리에 뜨자마자 뒤쪽에서 누군가 밀렸다. 서준은 자루를 놓치지 않으려고 온몸을 굳혔다. 뒤의 사람 손이 그의 옷자락을 스쳤다.

잡을 수 있었다.

아마도.

서준은 잡지 않았다.

자루가 그의 손목을 끌고 있었다. 잡았다가 같이 무너지면 둘 다 맞는다. 둘 다 깔린다. 둘 다 끌려간다.

그 말들이 변명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너무 빨라서 더 역겨웠다.

뒤쪽 사람이 무릎을 찍는 소리가 났다.

막대가 내려갔다.

서준은 눈을 감지 않았다.

감으면 다음 흔들림을 놓쳤다.

하역장 감독이 가까이 있었다.

서준은 그제야 알았다. 감독은 처음부터 홈 옆에서 보고 있었다. 그의 검은 가죽 앞치마는 젖어 있었고, 한 손에는 붉은 조각이 들려 있었다.

감독은 먼저 바닥을 보았다.

서준이 피한 반 뼘.

뒤의 사람이 무릎을 찍은 자리.

검은 물이 쏟아진 방향.

그 다음에야 서준의 손목을 잡았다.

이번에도 또 점을 찍는 건가.

서준은 몸을 굳혔다.

감독은 손목패 뒤쪽의 붉은 점을 보았다. 그리고 점 옆을 붉은 조각 끝으로 긁었다. 찍는 것이 아니라 긁는 느낌이었다. 나무가 조금 패였다.

서준은 뜻을 몰랐다.

좋은 뜻일 리는 없었다.

판자 든 남자가 다가왔다. 그는 감독에게 판자를 보였다. 감독은 서준의 패를 다시 확인하고, 손가락으로 판자의 한 줄을 눌렀다.

판자 든 남자가 붉은 점 하나 옆에 짧은 선을 더했다.

서준은 그것이 자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알아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막대가 그를 다시 밀었다.

이번에는 작업 줄이 아니었다. 홈 옆 벽 아래로 난 좁은 문이었다. 문은 허리를 숙여야 들어갈 만큼 낮았다. 안쪽은 검었다.

아까까지 들리던 두드림은 멈춰 있었다.

멈추자 더 조용해진 것이 아니었다.

벽이 아주 얇게 떨리고 있었다.

소리보다 먼저.

손바닥보다 먼저.

서준은 자신도 모르게 문 앞에서 발을 멈췄다.

막대가 등을 눌렀다.

그는 한 걸음 안으로 들어갔다.

벽의 떨림이 발바닥까지 올라왔다.

이번에는 바닥을 봐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무언가가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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