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 전이자는 다시 산다

8화 붉은 점의 줄
철문 위에서 내려온 남자는 검은 판자를 들고 있었다.
서준은 판자에 적힌 것을 읽지 못했다. 글자인지, 숫자인지, 이름인지도 몰랐다. 다만 검은 판자 한쪽에 붉은 점들이 찍혀 있다는 것은 보였다.
점은 마른 피처럼 선명했다.
하역장 감독이 서준의 손목을 잡았다.
서준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손목패가 뒤집혔다. 뒤쪽의 붉은 선이 드러났다.
감독은 그것을 판자 든 남자에게 보였다.
남자는 서준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손목패만 보았다.
그리고 막대 끝으로 옆을 가리켰다.
서준은 밀려났다.
그곳에는 이미 몇 사람이 서 있었다. 회색 끈. 검은 끈. 손목패 뒤에 붉은 선이 그어진 사람들. 모두 물을 못 마신 얼굴이었다.
입술이 갈라져 있었다.
눈만 바닥과 막대 사이를 오갔다.
서준은 뒤를 보았다.
앞줄의 마른 남자가 멀리서 그를 보고 있었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해도 서준은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눈은 보였다.
가지 말라는 눈인지.
가도 멈추지 말라는 눈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철문이 열렸다.
안쪽 공기는 더 낮았다.
숨을 들이마시자 목구멍 안쪽에 쇳가루가 붙는 것 같았다. 젖은 흙 냄새와 썩은 기름 냄새가 섞여 있었다. 바닥 가운데에는 얕은 홈이 길게 파여 있었다.
홈 안으로 검은 물이 천천히 흘렀다.
사람들은 자루를 옮기고 있었다.
자루마다 붉은 점이 하나씩 찍혀 있었다. 어떤 점은 번졌고, 어떤 점은 방금 찍은 것처럼 젖어 있었다. 자루 아래에서는 검은 물이 조금씩 떨어졌다.
서준은 앞사람의 발을 보려 했다.
그러다 바로 멈췄다.
발만 보면 늦었다.
앞사람이 지나간 자리가 조금 전에는 안전해 보였다. 그러나 자루에서 물이 한 방울 떨어지면 돌 틈이 바로 번들거렸다. 검은 물은 낮은 곳을 찾아 흐르다가, 붉은 찌꺼기를 남기고 발밑을 바꾸었다.
안전한 자리는 오래 안전하지 않았다.
서준의 차례가 왔다.
젖은 자루가 그의 어깨 위로 얹혔다.
무게가 눌렀다.
갈비뼈가 안쪽으로 접히는 것 같았다. 손목패가 살을 파고들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소리를 내면 막대가 먼저 올 것 같았다.
앞의 남자가 자루를 내려놓았다.
쿵.
검은 물이 튀었다.
서준은 발을 멈추지 못했다. 물 한 방울이 발끝 앞에 떨어졌다. 그 뒤로 붉은 찌꺼기가 얇게 늘어졌다.
그는 몸을 비틀었다.
자루가 어깨에서 미끄러졌다.
막대가 벽을 쳤다.
쩍.
서준은 다시 자루를 붙잡았다. 손가락이 저렸다. 어깨가 찢어질 것 같았다.
맞지는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그는 바닥을 보았다.
홈을 보았다.
검은 물을 보았다.
하지만 물은 이미 늦었다.
물이 보일 때는 이미 떨어진 뒤였다. 얼룩이 진해질 때는 이미 누군가가 밟은 뒤였다.
서준의 시야가 조금씩 위로 밀려 올라갔다.
발에서 발목으로.
발목에서 무릎으로.
무릎에서 자루를 잡은 손으로.
사람들은 자루를 놓기 전에 손목을 비틀었다. 어떤 사람은 오른손을 먼저 꺾었다. 어떤 사람은 팔꿈치를 내렸다. 어떤 사람은 놓기 전에 어깨가 굳었다.
그러면 자루 입구가 어느 쪽으로 기울지 아주 조금 보였다.
말은 몰라도 손은 보였다.
서준은 다음 사람의 손을 보았다.
검은 끈을 맨 여자가 그의 뒤에 있었다. 그녀의 숨이 짧았다. 서준은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자루가 먼저 흔들렸다.
앞쪽 남자가 왼손을 비틀었다.
자루 끝이 왼쪽으로 처졌다.
검은 물은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
서준은 한 박자 먼저 발을 뺐다.
그 순간 검은 물이 떨어졌다.
그가 있던 자리였다.
뒤에서 누군가 미끄러졌다.
검은 끈 여자가 무릎을 꿇었다. 자루가 그녀의 등 위로 기울었다. 주변 사람들이 움직였지만 아무도 잡지 않았다.
잡으면 자기 줄이 무너졌다.
서준도 잡지 못했다.
손이 나가려다 멈췄다.
그가 피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거기 있었다.
그 생각이 먼저 왔다.
그 다음에야 여자의 숨소리가 들렸다.
짧고, 낮고, 막힌 소리.
막대가 바닥을 쳤다.
사람들이 다시 움직였다. 여자는 옆으로 끌려갔다. 자루는 다른 사람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줄은 멈추지 않았다.
서준도 멈추지 못했다.
하역장 감독이 가까이 왔다.
서준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들면 맞을 것 같았다. 손목이 잡혔다. 손목패가 뒤집혔다.
붉은 선 옆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점 하나.
작고 짧은 붉은 점이 손목패 뒤쪽에 찍혔다.
서준은 그것을 오래 볼 수 없었다.
감독이 손목을 놓았다. 판자 든 남자가 다시 손짓했다.
더 안쪽.
홈이 좁아지는 곳.
검은 물이 낮은 구멍으로 사라지는 곳.
그곳으로 가는 길은 줄이 아니었다.
줄처럼 보였지만, 사람들은 서로의 어깨에 닿지 않으려 했다. 붉은 점이 찍힌 손목패끼리도 거리를 두었다. 누가 먼저 밀리면 옆사람까지 함께 끌려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움직임이었다.
서준은 그 틈을 보고 걸었다.
누구도 그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그래도 막대는 뒤에서 계속 따라왔다.
철문 안쪽 벽에는 오래된 흠집들이 있었다. 사람 손톱이 긁은 것처럼 얇은 선이 여럿 겹쳐 있었다. 그 아래로 검은 물이 튄 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서준은 벽을 보다가 고개를 내렸다.
벽을 보면 발을 놓쳤다.
발을 보면 손을 놓쳤다.
손을 보면 막대를 놓쳤다.
하나만 보고는 안 됐다.
그 사실이 제일 무서웠다.
안쪽 홈 앞에는 낮은 턱이 있었다. 사람들은 자루를 그 턱 위에 올렸다가, 다음 사람에게 밀어 넘겼다. 턱 아래 구멍에서는 더 차가운 바람이 올라왔다.
서준 앞의 회색 끈 남자가 자루를 올렸다.
남자의 손목이 떨렸다.
자루 끝이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서준은 오른쪽 발을 빼려 했다. 그런데 남자의 어깨가 왼쪽으로 먼저 굳었다.
서준은 멈췄다.
그 짧은 멈춤 때문에 뒤에서 막대가 그의 허벅지를 밀었다.
통증이 올라왔다.
그는 이를 악물고 왼쪽 발을 반 뼘 옮겼다.
자루가 턱에 닿는 순간,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 옆구리가 찢어졌다.
검은 물이 왼쪽으로 쏟아졌다.
서준의 발끝 바로 옆이었다.
틀릴 뻔했다.
맞은 것도 아니고 넘어진 것도 아닌데, 등줄기에 식은땀이 났다. 눈으로 본 손목보다 어깨가 먼저였던 것이다. 손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손만 봐서는 모자랐다.
앞의 남자는 비틀거리며 지나갔다.
서준은 자루를 받았다.
손바닥이 미끄러졌다.
그는 손가락을 더 세게 박았다. 자루 겉감이 젖어 있었고, 안쪽에서는 무언가 잘게 부딪히는 느낌이 났다. 돌인지 뼈인지 알 수 없었다. 알 필요도 없었다.
무게가 어깨에 내려앉았다.
아래에서 다시 소리가 올라왔다.
쿵.
이번에는 발바닥으로도 느껴졌다.
턱 위의 물이 그 소리에 맞춰 아주 조금 흔들렸다. 검은 물 위에 떠 있던 붉은 찌꺼기가 한쪽으로 몰렸다가 풀렸다.
서준은 숨을 멈췄다.
소리가 날 때마다 물이 흔들렸다.
물이 흔들리면 자루에서 떨어진 방향이 조금 바뀌었다.
그는 자루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 뒤의 막대가 가까웠다. 앞의 사람은 이미 옆으로 빠졌다. 늦으면 맞았다. 빨리 놓으면 미끄러졌다.
서준은 자루를 잡은 자기 손을 보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자신의 손도 위험이었다.
그 생각이 들자 숨이 더 막혔다.
그는 턱의 왼쪽 끝을 보았다. 검은 물이 방금 쿵 하는 소리에 맞춰 오른쪽으로 밀렸다가 돌아왔다. 다음 소리가 오기 전에 내려놓아야 했다.
서준은 자루를 밀었다.
쿵.
소리와 거의 동시에 자루가 턱에 닿았다.
물이 튀었다.
발목에 닿지는 않았다.
그는 한 걸음 물러났다.
바로 그때 뒤쪽에서 누군가 낮게 신음했다. 막대가 허공을 갈랐다. 서준은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다음 손을 놓쳤다.
목 안쪽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미안하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말을 해도 닿지 않을 것이다.
닿아도 달라질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목이 막혔다.
마른 남자가 저 멀리에서 고개를 아주 작게 저었다.
서준은 돌아갈 수 없었다.
막대가 뒤를 막고 있었다.
그는 다시 걸었다.
바닥을 봐도 답이 없었다.
바닥은 사고가 난 뒤에야 말해 주었다. 물은 떨어진 뒤에야 보였고, 얼룩은 누군가가 밟은 뒤에야 진해졌다.
먼저 봐야 할 것은 바닥이 아니었다.
아직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도 방금 한 번은 그랬다.
자루를 잡은 손.
놓기 전에 비트는 손목.
밀기 전에 굳는 어깨.
그리고 자기 쪽으로 시선을 피하는 사람들.
서준은 목이 타들어 가는 것을 참으며 안쪽 홈 앞에 섰다.
아래에서 소리가 올라왔다.
쿵.
쿵.
일정했다.
사람이 내는 소리인지, 기계가 내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판자 든 남자가 붉은 점 찍힌 손목패들만 다시 가리켰다.
서준은 자기 손목을 보지 않았다.
볼 필요가 없었다.
이미 끌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