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 전이자는 다시 산다

7화: 표시된 손목
붉은 선은 아직 젖어 있었다.
한서준은 손목패 뒤쪽을 보려 했다. 목을 비틀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회색 끈 아래 나무패가 흔들렸고, 패 뒤에 묻은 젖은 색만 손목 안쪽 살에 차갑게 닿았다.
하역장 감독은 이미 돌아섰다.
막대가 바닥을 쳤다.
쾅.
사람들이 움직였다.
쉬라는 뜻은 아니었다. 회색 끈을 단 사람들은 벽 아래 낮은 물통 쪽으로 갔다. 검은 끈들은 자루 더미 뒤로 밀려났다. 녹슨 쇳조각을 단 사람들은 철문 가까이 붙었다.
서준은 앞줄의 마른 남자를 따라가려 했다.
손목에 묶인 막대가 당겨지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한 몸처럼 끌고 가던 남자가 서준을 보지 않은 채 한 걸음 비켜섰다. 남자의 눈은 바닥에 붙어 있었다. 모르는 척하는 얼굴이었다.
"왜."
한국어는 축축한 공기 속에서 바로 죽었다.
인부 하나가 다가왔다. 그는 서준의 손목을 붙잡아 뒤집었다. 손목패 뒤쪽을 보더니 짧게 혀를 찼다.
그리고 물통이 아니라 안쪽 자루 더미를 막대로 가리켰다.
서준은 물통을 보았다.
나무통 위에는 검은 찌꺼기가 떠 있었다. 그래도 물이었다. 혀가 먼저 입천장에서 떨어지려 했다. 목 안쪽이 바짝 달라붙어 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서준은 한 걸음도 떼지 못했다.
인부의 막대가 이번에는 어깨가 아니라 손목패 옆을 두드렸다.
딱.
붉은 선.
그게 이유인 것 같았다.
서준은 마른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잠깐 눈을 들었다. 아주 짧았다. 미안함도 아니고 경고도 아니었다.
거기 서 있으면 맞는다는 얼굴이었다.
서준은 물통을 한 번 더 보았다.
그 다음 발을 옮겼다.
안쪽은 더 어두웠다.
철문이 반쯤 열린 곳 너머로 자루들이 쌓여 있었다. 천장에서 내려온 쇠고리들은 바깥보다 낮았다. 고개를 조금만 잘못 들면 이마가 찢길 높이였다.
바닥은 붉은색보다 검은색이 많았다.
검은 물.
검은 쇳가루.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아직 굳지 않은 붉은 줄기.
서준은 발을 멈추려 했다. 뒤에서 누군가가 그를 밀었다. 손목이 앞으로 당겨졌고, 새 막대가 손목 고리에 끼워졌다.
앞사람은 마른 남자가 아니었다.
어깨가 넓은 여자였다. 검은 끈을 달고 있었다. 한쪽 다리를 절었고, 숨을 쉴 때마다 등이 작게 접혔다. 여자는 서준을 돌아보지 않았다. 막대를 잡고 자루 쪽으로 걸었다.
서준은 늦게 따라갔다.
손목이 조였다.
"아, 씨..."
막대 든 인부가 고개를 돌렸다.
서준은 입을 닫았다.
새 자루는 전 자루보다 작았다. 처음엔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대 끝을 자루 고리에 걸자마자 생각이 바뀌었다.
자루 밑에서 물이 떨어졌다.
검은 물만이 아니었다. 걸쭉한 붉은 찌꺼기가 함께 떨어졌다. 바닥에 닿은 찌꺼기는 퍼지지 않고 가늘게 남았다. 그 위로 쇳가루가 들러붙었다.
앞의 여자가 먼저 들었다.
서준도 들었다.
갈비뼈가 바로 대답했다. 숨이 목에 걸렸다. 자루는 작았지만 무게가 한쪽으로 쏠렸다. 안에서 무엇인가가 미끄러지는 감각이 막대를 타고 손목까지 왔다.
여자가 왼쪽으로 갔다.
서준도 왼쪽으로 갔다.
발밑의 검은 물이 움직였다.
서준은 멈칫했다.
여자가 지나간 자리에 자루에서 떨어진 붉은 찌꺼기가 한 줄 더 생겼다. 그 위에 뒤쪽 사람이 발을 딛자 발끝이 미끄러졌다.
쾅.
막대가 바닥을 쳤다.
서준은 움찔했고, 그 바람에 자루가 흔들렸다. 앞의 여자가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녀의 목덜미 힘줄이 튀어나왔다.
인부가 소리쳤다.
무슨 뜻인지 몰랐다.
하지만 여자는 더 빨리 걸었다.
서준은 따라갔다.
앞사람 발만 보면 안 됐다. 발이 닿기 전에 떨어지는 물도 봐야 했다. 물이 떨어지기 전에 자루가 기우는 쪽도 봐야 했다.
그걸 어떻게 동시에 보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서준은 바로 놓쳤다.
오른발이 검은 쇳가루 위에 올라갔다. 발바닥이 밀렸고, 손목이 앞으로 튀었다. 자루가 돌아갔다. 앞의 여자가 짧게 숨을 토했다.
서준은 넘어지지 않으려고 막대를 잡아당겼다.
그 순간 여자의 어깨가 뒤로 꺾였다.
그녀가 처음으로 돌아보았다.
눈빛은 욕보다 빨랐다.
서준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미안하다는 말은 여기서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다.
다음 줄이 밀려왔다.
멈출 수 없었다.
서준은 발을 다시 옮겼다. 이번에는 앞사람 발만 보지 않았다. 방금 생긴 붉은 줄기 끝을 봤다. 검은 물은 낮은 곳으로 흘렀다. 붉은 찌꺼기는 조금 높은 곳에 들러붙었다.
쇳가루는 그 위에서 더 어둡게 뭉쳤다.
그 자리는 발을 잡았다.
알아낸 것인지, 겁이 먼저 움직인 것인지 몰랐다.
왼발을 놓으려던 곳에서 반 뼘 비켜섰다.
자루가 흔들렸다.
뒤쪽에서 누군가 욕 같은 소리를 냈다. 이어서 발이 밀리는 소리가 났다.
서준은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늦는다.
앞의 여자가 경사로 아래에 닿았다. 이번 경사로는 전보다 낮았지만 더 미끄러웠다. 옆 벽에는 누런 손자국들이 겹겹이 찍혀 있었다. 어떤 손자국은 손가락이 세 개뿐이었다.
서준은 벽을 보았다.
사람들이 잡았던 곳.
잡으면 버틸 수 있는 곳.
잡아도 소용없었던 곳.
구분이 되는 것 같았다가 바로 흐려졌다. 땀이 눈으로 들어갔다. 배가 비어 속이 뒤틀렸다. 목이 말라 혀가 다시 입천장에 붙었다.
앞의 여자가 먼저 벽을 짚었다.
서준도 같은 곳을 짚으려 했다.
그때 여자가 짚은 자리 아래에서 붉은 물이 흘러내렸다.
손바닥이 미끄러질 것 같았다.
서준은 반사적으로 손을 올렸다.
여자보다 한 뼘 위.
거기는 건조했다.
손이 버텼다.
자루가 기울었지만 떨어지지는 않았다. 서준은 숨을 삼키며 한 걸음을 더 올랐다.
뒤에서 비명 비슷한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돌아봤다.
방금 서준이 피한 자리로 뒤쪽 남자가 밀려나 있었다. 남자는 발을 빼려 했지만 검은 찌꺼기가 신발 밑을 붙잡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뒤의 자루가 그의 허벅지를 쳤고, 남자는 무릎을 꿇었다.
인부가 달려왔다.
사람을 일으키는 손이 아니었다.
막대가 먼저 내려갔다.
쾅.
서준의 손목이 차가워졌다.
내가 피해서.
그 말이 머릿속에 뜨자마자 앞의 여자가 막대를 당겼다. 서준은 다시 앞으로 끌려갔다.
내가 안 피했으면 내가 넘어졌을 것이다.
그 생각도 바로 뒤따라왔다.
어느 쪽이 맞는지 따질 시간은 없었다. 몸은 이미 답을 골랐다. 서준은 마른 입술을 깨물고 경사로를 올랐다.
자루를 판자 위에 놓자 팔이 떨렸다.
앞의 여자는 막대를 놓지 않았다. 서준도 놓지 못했다. 놓아도 되는지 몰랐다. 손목 끈이 달린 이상, 아무것도 자기 마음대로 놓을 수 없는 것 같았다.
하역장 감독이 가까이 와 있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검은 가죽 앞치마 아래로 물이 떨어졌다. 그는 서준의 손목패를 다시 들었다.
서준은 몸을 굳혔다.
감독의 손가락이 붉은 선을 문질렀다. 선은 번지지 않았다. 이미 나무에 먹어든 것처럼 보였다.
감독은 짧은 막대 끝에 묻은 붉은 것을 들었다.
서준은 숨을 멈췄다.
또 긋는 건가.
감독은 선 옆에 점을 찍으려는 것처럼 막대를 가져갔다.
그러다 멈췄다.
그의 시선이 서준의 발끝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바닥으로 갔다. 방금 서준이 피한 자리. 뒤쪽 남자가 무릎을 꿇은 자리. 검은 쇳가루가 뭉친 자리.
감독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웃음인지, 계산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점을 찍지 않았다.
대신 서준의 손목패를 놓고, 인부들에게 뭐라고 말했다.
서준은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주변이 조용해지는 건 알았다.
몇몇 노동자가 서준의 손목을 보았다. 마른 남자도 멀리 물통 옆에서 서준을 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말라 갈라져 있었다.
서준은 그쪽으로 가고 싶었다.
물 때문인지, 아는 얼굴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마른 남자의 손에는 나무 바가지가 들려 있었다.
그는 마시지 않았다. 바가지를 입 앞까지 올렸다가, 서준의 손목을 보고 멈췄다. 그리고 물통 옆 인부의 눈치를 보았다.
서준은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움직였다.
막대가 바로 당겨졌다.
가까워질 수 없었다.
마른 남자는 바가지를 천천히 내렸다. 물 한 방울이 바가지 끝에서 떨어져 바닥의 검은 물과 섞였다. 서준은 그 작은 물방울을 끝까지 보았다.
목이 움직였다.
삼킬 것도 없는데 삼켰다.
마른 남자가 입술을 아주 조금 벌렸다. 무슨 말인지 들리지 않았다. 말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서준은 그 얼굴을 봤다.
오지 말라는 얼굴.
아니면, 나도 못 준다는 얼굴.
둘 다 같았다.
인부가 서준의 막대를 다시 당겼다.
이번에는 안쪽 철문 쪽이었다.
철문 위 계단에서 다른 남자가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하역장 인부들보다 옷이 깨끗했다. 손에는 작은 판자가 들려 있었다. 판자에는 검은 줄들이 그어져 있었고, 그 옆에 붉은 점들이 찍혀 있었다.
남자는 노동자들의 손목패를 하나씩 보았다.
붉은 선이 있는 패에서 멈췄다.
서준은 자기 손목을 감추려 했다.
감출 손이 없었다.
막대가 당겨졌다.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이번에는 바닥을 봐도 답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