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 전이자는 다시 산다

4화: 손바닥의 값
한서준은 문 아래 틈으로 들어오는 빛 때문에 눈을 떴다.
처음 든 생각은 살았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생각은 배고프다는 것이었다.
그게 너무 빨라서 스스로도 멍해졌다. 어젯밤만 해도 손도장과 장부를 떠올리며 몸이 굳었는데, 눈을 뜨자마자 배가 먼저 울었다.
짚 냄새가 코 안쪽에 붙어 있었다. 창고방 한쪽에는 빈 상자가 쌓여 있었고, 벽에 걸린 젖은 망토에서는 물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서준은 몸을 일으키려다 갈비뼈 통증에 숨을 멈췄다.
"아..."
한국어는 낮은 천장에 닿아 금방 죽었다.
문이 열렸다.
서준은 반사적으로 지갑부터 움켜쥐었다. 들어온 사람은 마르코가 아니었다. 어제 장부를 들고 있던 남자였다. 남자는 나무 쟁반을 들고 있었고, 그 위에는 작은 빵 조각과 물이 있었다.
남자는 빵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뭐라고 말했다.
서준은 알아듣지 못했다.
남자는 손가락 하나를 펴고 장부를 두드렸다. 그리고 서준을 가리켰다.
하나.
서준.
장부.
그 세 가지가 한 줄로 이어지는 것 같았다.
"돈 없어요."
말해도 소용없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방 밖으로 나갔다. 문은 열어 둔 채였다.
서준은 빵을 보았다.
먹으면 또 값이 붙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서도 손은 빵을 집었다. 딱딱한 가장자리가 손바닥 상처를 눌렀다. 그는 작게 뜯어 입에 넣었다. 마른 빵은 목에 걸렸지만, 물을 마시자 내려갔다.
안 먹으면 버틸 수 없었다.
먹으면 갚아야 할지도 몰랐다.
둘 중 하나를 고르는 일 같았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굶을 용기가 없었고, 갚을 방법도 없었다.
서준은 문 밖으로 나갔다.
좁은 복도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제 보지 못한 얼굴들이었다. 누군가는 자루를 묶고 있었고, 누군가는 나무상자에 검은 기름을 칠하고 있었다. 그들의 손목에는 낡은 끈이 묶여 있었다.
끈에는 작은 나무패가 달려 있었다.
서준은 자기 손목을 내려다봤다.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그게 안심이 되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더 불안했다.
복도 끝에서 마르코가 나타났다.
마르코는 어제와 같은 얇은 장갑을 끼고 있었다. 옷은 깨끗했고, 웃음도 깨끗했다. 이곳의 냄새와 먼지는 그 사람에게만 묻지 않는 것 같았다.
"한서준."
서준은 대답했다.
"예."
마르코는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마르코."
이미 아는 말을 다시 확인하듯 천천히 말했다. 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코가 손짓했다.
따라오라는 뜻이었다.
서준은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젯밤 문 밖에서 본 붉은 그릇이 뭐냐고. 자기 이름을 왜 종이에 적었냐고. 빵과 물값은 얼마냐고.
하지만 입에서 나온 말은 전부 한국어일 것이다.
그는 결국 따라갔다.
장부방은 식당 뒤편에 있었다.
방 안에는 긴 탁자 하나와 의자 두 개, 그리고 종이가 여러 장 놓여 있었다. 벽에는 손바닥 모양이 찍힌 낡은 종이들이 줄줄이 걸려 있었다. 붉은색은 오래된 피처럼 어둡게 말라 있었다.
서준은 문턱에서 멈췄다.
마르코는 먼저 들어가 의자를 빼 주었다.
앉으라는 뜻.
친절했다.
그래서 더 나빴다.
서준은 앉지 않았다.
마르코는 억지로 밀지 않았다. 대신 탁자 위 종이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 종이 위에는 곡선과 꺾인 선이 촘촘히 적혀 있었다. 서준의 눈에는 모두 같은 벌레 자국처럼 보였다.
마르코가 종이 첫 줄을 가리키고 서준을 보았다.
"한서준."
서준은 자기 이름이라는 것만 알아들었다.
"맞아요. 한서준."
마르코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부 남자가 옆에서 작은 주머니를 열었다. 동전 몇 개가 탁자 위에 떨어졌다.
마르코는 동전 하나를 문 모양으로 세운 손가락 옆에 놓았다. 손으로 낮은 문을 그렸다. 어제 샛길 문지기.
통행.
동전 하나.
다음 동전은 입가로 가져갔다. 빵을 씹는 흉내를 냈다.
식사.
다음은 나무잔을 드는 흉내.
물.
다음은 두 손을 모아 뺨에 대었다.
잠자리.
동전이 네 개가 되었다.
서준은 입술이 말라붙는 걸 느꼈다.
"그걸 왜 지금..."
마르코는 못 알아듣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네 개의 동전을 모두 서준 쪽으로 밀어 놓은 뒤, 종이 아래쪽 빈칸을 가리켰다.
장부 남자는 그 옆에 또 하나의 작은 표시를 적었다.
오늘 아침 빵.
서준은 그렇게 짐작했다.
그가 방금 삼킨 빵이 장부 위에서 하나 더 늘어났다.
"잠깐만."
서준은 뒤로 물러섰다.
마르코는 여전히 웃었다. 장부 남자가 붉은 그릇을 꺼냈다.
어젯밤 문틈으로 보였던 것.
서준의 등줄기가 식었다.
"아니요. 안 해요."
마르코는 자기 손바닥을 펼쳤다. 붉은 그릇을 가리켰다. 종이 위 빈칸을 가리켰다. 이어 손목을 두드리고, 밖의 복도를 가리켰다.
일.
갚는다.
아마 그런 뜻일 것이다.
서준은 복도 쪽을 보았다. 손목에 끈을 단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다. 아무도 이 방을 오래 보지 않았다.
여기서 거절하면 어떻게 될까.
폐기장으로 돌아가나.
성벽 밖으로 내쫓기나.
어제 빵을 빼앗으려던 아이와 칼 찬 남자가 떠올랐다. 닫힌 성문과 검은 배수로, 더러운 물도 떠올랐다.
서준은 손을 가슴 쪽으로 가져갔다. 지갑이 있었다. 가족사진이 있었다.
마르코의 시선이 그 움직임을 따라왔다.
그는 다시 부드럽게 말했다.
뜻은 몰랐지만, 목소리는 어제와 같았다.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
그런 것처럼 들리는 목소리.
서준은 그 목소리를 믿는 척했다. 사실은 믿은 것이 아니었다. 버틸 다른 방법이 없어서, 나중에 이해하자고 미룬 것이다.
늘 그랬듯이.
그는 손을 내밀었다가 다시 거두었다.
마르코는 기다렸다.
억지로 잡지 않았다.
그 기다림이 선택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서준은 결국 다시 손을 내밀었다.
장부 남자가 서준의 손목을 잡았다.
상처 난 손바닥이 위로 뒤집혔다. 붉은 인주가 차가웠다. 진흙처럼 끈적했고, 쇠 냄새가 났다.
서준은 손을 빼려 했다.
이미 늦었다.
장부 남자는 그의 손바닥을 종이 위에 눌렀다.
꾹.
아프지는 않았다.
그런데 숨이 막혔다.
손을 떼자 종이 위에 붉은 손바닥이 남았다. 상처 자국까지 삐뚤게 찍혀 있었다.
마르코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장부 남자는 곧장 다른 끈을 꺼냈다. 낡은 회색 끈이었다. 작은 나무패가 달려 있었다. 그는 서준의 왼쪽 손목에 끈을 묶었다.
서준은 그제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깐. 이건 아니지."
의자가 뒤로 밀리며 바닥을 긁었다.
복도에 있던 남자 둘이 방 안을 보았다.
마르코는 손을 들었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그리고 서준의 손목 끈을 가리킨 뒤, 장부를 가리켰다.
서준은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알 것 같았다.
이제 이름만 적힌 게 아니었다.
손이 찍혔다.
표식이 묶였다.
마르코는 문 쪽으로 걸었다. 서준이 따라오지 않자 잠깐 돌아보았다.
"한서준."
이번에는 이름이 부름처럼 들리지 않았다.
호명 같았다.
서준은 움직였다.
안 움직이면 옆의 남자들이 움직일 것 같았다.
밖으로 나오자 아까 복도의 사람들이 잠깐 서준의 손목을 보았다. 그중 한 명은 눈을 피했다. 다른 한 명은 입술 끝을 비틀었지만 웃지는 않았다.
마르코는 식당이 있는 쪽이 아니라 뒷문으로 향했다.
서준은 걸음을 멈췄다.
"밥... 아니, 어디 가요?"
마르코는 뒤돌아 동전 네 개를 손가락으로 세었다. 그리고 어깨에 무거운 것을 메는 시늉을 했다.
일.
서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설명을 해 줘야지. 내가 알아듣게, 제발."
말이 길어질수록 더 초라해졌다.
마르코는 다가와 서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얇은 장갑 너머 압력은 가벼웠지만, 서준은 움직이지 못했다.
마르코가 낮게 말했다.
뜻은 몰라도 끝은 부드럽게 올라갔다.
달래는 말이었다.
그리고 등 뒤의 인부가 서준에게 자루 하나를 안겼다.
자루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서준은 받자마자 무릎이 꺾였다. 안에는 곡물인지 돌인지 모를 딱딱한 것이 들어 있었다.
"못 들어요."
인부는 대답 대신 자루 끈을 서준의 어깨에 걸었다.
갈비뼈가 눌렸다. 서준은 비명을 삼켰다.
골목으로 나오자 하층의 낮은 하늘이 보였다. 건물 사이에 걸린 천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사람들은 지나가면서 서준의 손목패와 자루를 보고 길을 비켰다.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그게 제일 무서웠다.
서준은 골목 모퉁이에서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식당 쪽으로 돌아가려는 정도였다. 도망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다. 하지만 등 뒤의 인부가 바로 그의 팔을 잡았다.
손목 끈이 당겨졌다.
나무패가 살갗을 찍었다.
"놔요."
서준은 팔을 빼려 했다.
인부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장부방 쪽을 가리키고, 손바닥을 펴서 종이에 누르는 흉내를 냈다.
네가 찍었다.
서준은 그 뜻을 너무 선명하게 알아들었다.
마르코가 다가왔다.
그는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미안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지갑을 꺼내 보이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서준은 바로 품을 움켜쥐었다.
"안 돼."
마르코는 멈췄다.
그는 손바닥을 펼쳐 보이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빼앗지 않겠다는 뜻처럼 보였다. 그리고 장부 남자를 불렀다.
장부 남자는 서준에게 다가와 지갑을 가리켰다. 이어 장부를 가리키고, 손목 끈을 가리켰다.
담보.
서준은 그 말을 몰랐다.
하지만 지갑을 내놓으라는 뜻은 알았다.
그 안에는 아무 가치 없는 카드와 한국 돈뿐이었다. 여기서는 쓸 수 없는 것들. 어제 마르코도 알았다.
그래도 지갑 안에는 사진이 있었다.
서준은 지갑을 꺼내 가족사진만 빼내려 했다.
장부 남자의 손이 먼저 들어왔다. 사진 모서리가 손가락 사이에서 접힐 뻔했다.
그 순간 서준은 자루를 떨어뜨리고 남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건 안 된다고!"
골목이 조용해졌다.
서준의 목소리만 낯선 언어 사이에서 튀었다.
장부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인부 하나가 서준의 어깨를 눌렀다. 통증 때문에 손에서 힘이 빠졌다.
마르코가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는 사진을 조심스럽게 빼내 서준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지갑만 장부 남자에게 넘겼다.
서준은 사진을 가슴에 붙들었다.
마르코가 자기 가슴을 가리키고, 다시 서준을 가리켰다.
맡아 둔다.
돌려준다.
그런 뜻이라고 믿으라는 얼굴이었다.
서준은 믿지 않았다.
하지만 지갑은 이미 장부 남자의 손에 있었다.
그는 사진을 바지 주머니 깊이 밀어 넣었다. 손이 떨렸다.
운반 창고는 골목 끝에 있었다.
문은 식당의 낮은 문보다 훨씬 두꺼웠다. 철판이 덧대어져 있었고, 손잡이 주변에는 붉은 손자국들이 겹겹이 말라 있었다.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서준 손보다 작았다.
안쪽에서 쇠가 긁히는 소리가 났다.
이어 짧은 비명이 들렸다.
서준은 자루를 메고 선 채 얼어붙었다.
마르코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한서준."
이번에는 부드럽지 않았다.
문지기가 철문을 열었다. 안쪽 공기가 흘러나왔다. 차갑고 습했고, 오래된 피와 재 냄새가 섞여 있었다.
서준은 뒤로 물러나려 했다.
손목 끈이 먼저 당겨졌다.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어젯밤 자신이 미룬 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자기 몸이었다.
그 대가가 이제 손바닥 모양으로 장부에 말라붙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