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 전이자는 다시 산다

3화: 따뜻한 방
한서준은 마르코의 손을 잡지 않았다.
팔꿈치를 받쳐 주던 손이 떨어지자 몸이 바로 기울었다. 무릎이 진흙에 다시 닿을 뻔했다. 마르코는 한 발 물러서서 기다렸다.
따라오라는 뜻이었다.
서준은 등불 뒤의 남자 둘을 보았다. 둘은 마르코보다 뒤에 있었지만, 칼은 서준보다 가까운 곳에 두고 있었다. 한 명은 서준의 운동화를 보았고, 다른 한 명은 품속 지갑이 있는 쪽을 보았다.
폐기장에 남으면 또 그런 눈들과 밤을 보내야 했다.
서준은 빵이 아직 목에 걸린 것처럼 침을 삼켰다. 그리고 마르코를 따라 걸었다.
성벽 쪽 샛길은 바깥에서 보았을 때보다 좁았다. 부서진 돌과 검은 물이 양쪽으로 흘렀고, 벽에는 오래된 천 조각과 짐승 뼈 같은 것이 걸려 있었다. 등불이 흔들릴 때마다 그림자가 사람처럼 움직였다.
마르코는 자주 뒤돌아보았다.
"한서준."
그 말만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한서준."
마르코는 자기 가슴을 톡톡 쳤다.
"마르코."
"마르코."
두 단어가 이곳에서 서준이 가진 전부 같았다.
자기 이름과 저 남자의 이름.
샛길 끝에는 낮은 문이 있었다. 성문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았고, 구멍이라고 하기엔 지키는 사람이 있었다. 낡은 망토를 걸친 남자가 등불을 들고 나왔다.
마르코가 짧게 말했다.
문지기의 시선이 서준에게 닿았다. 신발, 찢어진 바지, 피가 굳은 손바닥, 얼굴 순서였다. 서준은 어깨를 움츠렸다.
문지기가 뭐라고 묻자 마르코는 얇은 장갑 낀 손으로 동전 두 개를 꺼냈다. 동전은 어둠 속에서도 붉게 빛났다.
문지기는 동전을 받아 들고 문을 열었다.
서준은 그 모습을 보며 알았다.
여긴 그냥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기는 지금 자기 힘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문 안쪽 공기는 바깥보다 따뜻했다. 악취는 여전했지만 종류가 달랐다. 썩은 물 냄새 대신 오래된 기름, 숯불, 땀, 젖은 가죽 냄새가 섞여 있었다.
좁은 골목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바닥에 앉아 졸고 있었고, 누군가는 큰 자루를 등에 메고 지나갔다. 낮은 창마다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서준이 지나갈 때 몇몇이 고개를 돌렸다.
눈들이 오래 머물렀다.
마르코가 손을 들어 보였다. 손가락 두 개를 접고, 자기 가슴을 가리킨 뒤, 서준 쪽으로 손바닥을 펼쳤다.
무슨 뜻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골목 사람들은 하나씩 시선을 거두었다. 서준은 그게 오히려 더 무서웠다. 이 사람은 웃고 있었지만, 여기서는 웃는 것만으로도 길을 비키게 할 수 있었다.
마르코가 데려간 곳은 지붕 낮은 식당이었다.
문을 열자 뜨거운 김이 먼저 나왔다. 서준은 그 냄새를 맡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다. 국물 냄새였다. 짠 냄새와 고기 비슷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안에는 탁자가 다섯 개뿐이었다. 벽은 검게 그을렸고, 바닥에는 톱밥 같은 것이 뿌려져 있었다. 커다란 솥 앞의 여자가 마르코를 보자 표정을 바꿨다.
마르코가 손가락 두 개를 들었다가 하나를 접었다. 그리고 서준을 가리켰다.
여자는 서준을 훑어본 뒤 작은 그릇 하나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국물은 묽었고, 빵은 전보다 더 딱딱했다.
그래도 김이 났다.
서준은 바로 손을 뻗지 못했다.
마르코가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숟가락을 집어 국물을 조금 떠서 자기 입에 넣었다. 빵도 작게 뜯어 먹었다.
괜찮다는 뜻이었다.
서준은 그제야 그릇을 잡았다.
뜨거웠다.
손바닥의 상처가 따끔거렸다. 그는 손을 떼려다 다시 잡았다. 놓치면 누가 가져갈 것 같았다.
첫 숟가락은 혀를 데웠다. 그래도 삼켰다. 두 번째부터는 맛을 느낄 틈도 없었다. 위장이 놀라 움찔거렸지만, 몸은 더 달라고 했다.
마르코가 손바닥을 아래로 눌렀다.
천천히.
서준은 숟가락을 멈췄다.
자신이 얼마나 굶주려 보였을지 생각났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부끄러움보다 배고픔이 컸다.
그는 다시 먹었다.
나무잔에 담긴 물이 나왔다. 여자가 잔을 놓자마자 마르코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마르코는 동전을 하나 더 건넸다.
물에도 값이 있었다.
자리에도 값이 있을 것이다. 빵에도, 국물에도, 문을 통과한 일에도.
"돈 없는데."
한국어는 식당 소음에 묻혔다.
마르코는 못 알아들었다. 아니, 못 알아듣는 척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서준의 표정을 보더니 자기 가슴을 가리키고, 이어 손바닥을 펴 보였다.
괜찮다.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서준은 믿고 싶었다.
그는 남은 국물을 마셨다. 그릇 바닥에 검은 찌꺼기가 남았지만 상관없었다. 배 안에 뜨거운 것이 들어오자 눈앞이 조금 또렷해졌다.
식사가 끝나자 마르코는 얇은 종이와 짧은 심지를 꺼냈다. 심지 끝은 검은 숯처럼 되어 있었다.
그는 종이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서준은 글자를 읽을 수 없었다.
곡선과 꺾인 선이 섞인 문자였다. 마르코는 몇 글자를 적은 뒤 서준을 보았다.
"한서준."
서준은 자기 이름이 적혔다는 걸 느꼈다.
이상했다.
그 글자를 읽을 수 없는데도, 누군가 자기 이름을 남긴다는 사실이 안도처럼 다가왔다. 조금 전까지 그는 쓰레기장에 떨어진 물건이었다. 이제 적어도 이름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마르코 뒤에 서 있던 남자가 그 종이를 보며 웃었다.
그 웃음 때문에 안도가 금방 식었다.
마르코가 손을 내밀었다.
서준은 지갑을 움켜쥐었다.
마르코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빈손을 보이며 서준의 주머니를 가리켰다. 확인만 한다는 몸짓 같았다.
"안 돼요."
서준은 한국어로 말했다.
마르코는 대답 대신 아주 조심스럽게 손을 내렸다. 억지로 빼앗지는 않았다.
그게 서준을 더 헷갈리게 했다.
칼 찬 남자였다면 이미 밀쳤을 것이다. 폐기장 아이였다면 도망치듯 빼앗았을 것이다. 마르코는 기다렸다.
서준은 결국 지갑을 꺼냈다.
놓지는 않았다.
마르코는 지갑 안을 빠르게 보았다. 카드와 지폐를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가족사진을 꺼냈을 때만 눈이 조금 멈췄다.
서준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건 안 돼."
마르코는 사진을 오래 보지 않았다. 네 사람이 웃고 있는 장면을 확인하더니 바로 돌려주었다. 그리고 자기 손을 가슴에 얹었다.
낮은 목소리.
뜻은 몰랐다.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위로처럼 들렸다.
서준은 사진을 다시 지갑 안쪽에 넣었다. 엄마의 손이 자기 팔을 붙잡고 있는 부분이 손끝에 닿았다.
목 안쪽에서 말이 올라왔다.
삼켰다.
여기서 그 말을 해 봐야 아무도 몰랐다. 모르는 게 차라리 나았다.
마르코는 장부 같은 낡은 책을 들고 온 남자를 불렀다. 남자는 식당 구석에서 나와 마르코의 종이를 받았다.
둘이 대화를 나눴다.
서준은 단어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숫자처럼 반복되는 소리와, 손가락 셋, 손가락 다섯, 손바닥을 누르는 몸짓만 보였다.
손바닥.
서준은 자기 상처 난 손을 내려다봤다.
마르코가 그 시선을 알아차리고 웃었다. 그는 작은 천 조각을 건넸다. 상처를 감으라는 뜻이었다.
서준은 천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마르코는 뜻을 모를 텐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서준에게 주어진 방은 방이라기보다 창고였다.
낮은 천장, 한쪽에 쌓인 빈 상자, 벽에 걸린 젖은 망토들. 바닥에는 짚이 깔려 있었고, 짚 위에는 얇은 천 하나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바람이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서준은 문턱에서 멈췄다. 안으로 들어가면 문이 닫힐 것이다. 닫히면 자신이 나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마르코는 문 옆에 서서 기다렸다. 강제로 밀지 않았다.
서준은 뒤를 돌아보았다.
식당 쪽에서 웃음소리와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골목에는 아직 사람들이 오갔다. 폐기장보다 안전해 보였다.
안전해 보였다.
그 말이 마음에 걸렸지만, 몸은 이미 결정을 내렸다.
서준은 안으로 들어갔다.
마르코가 짧게 말했다. 그리고 자기 두 손을 모아 뺨에 대었다.
자라는 뜻이었다.
서준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닫혔다.
완전히 잠기지는 않았다. 밖의 불빛이 아래 틈으로 가늘게 들어왔다. 서준은 한참 그 틈만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바닥에 앉았다.
몸이 풀리자 통증이 다시 돌아왔다. 갈비뼈, 무릎, 어깨, 손바닥. 배는 아직 더 먹으라고 아우성쳤지만, 방금 먹은 국물이 위에 남아 있었다.
그는 지갑을 꺼냈다.
가족사진을 펼쳤다.
어둠 속이라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네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버지의 굳은 어깨, 형의 비뚤어진 웃음, 엄마의 손.
"나 여기 있어."
말하고 나서 자신도 웃기다고 생각했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그는 휴대폰도 꺼냈다. 전원 버튼을 눌렀다. 아무 반응도 없었다. 검은 액정에는 창고 천장의 그림자만 비쳤다.
서준은 휴대폰을 다시 품에 넣었다.
문 밖에서 발소리가 멈췄다.
마르코의 목소리였다.
다른 남자가 대답했다. 아까 장부를 들고 있던 남자 같았다. 종이가 접히는 소리, 무언가를 찍어 누르는 둔한 소리, 그리고 웃음이 이어졌다.
서준은 숨을 죽였다.
문 아래 틈으로 붉은 것이 잠깐 보였다.
작은 그릇이었다. 안에는 진한 붉은 진흙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장부 남자가 자기 엄지를 그 위에 눌렀다가 종이에 찍는 시늉을 했다.
마르코가 낮게 말했다.
"한서준."
그 이름만은 들렸다.
이어 장부 남자가 창고 문 쪽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그리고 종이 위를 꾹 눌렀다. 다음에는 잠든 사람을 가리키듯 고개를 기울이고, 다시 손바닥을 눌렀다.
아침.
서준은 정확한 말은 몰라도 순서를 알 것 같았다.
자고, 일어나고, 손바닥을 찍는다.
도움에는 대가가 있었다.
그 정도는 한국에서도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었는데도 늘 모른 척했다. 누가 대신 내 주면 나중에 생각하자고 미뤘다.
여기서는 나중이 없을지도 몰랐다.
문 밖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서준은 일어나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문을 열고, 종이가 뭐냐고 물어보고, 왜 자기 이름을 부르냐고 따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릎이 움직이지 않았다.
말도 통하지 않았다.
따뜻한 방은 사람을 눕게 만들었다. 뜨거운 국물은 의심을 느리게 만들었다. 죽지 않았다는 안도는 판단을 뒤로 미뤘다.
서준은 짚 위에 몸을 눕혔다.
눈을 감기 직전, 그는 자기 손바닥을 보았다.
상처 위로 감은 천에 국물 냄새와 진흙 냄새가 섞여 있었다.
아침이 오면 이 손이 무엇을 찍게 될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