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 전이자는 다시 산다

15화: 말하지 않는 틈
검은 조각은 돌바닥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한서준의 가슴 안쪽은 계속 얇게 떨렸다.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심장 근처가 먼저 조여 왔다. 조각이 낯설어서 무서운 것인지, 이곳의 공기가 사람을 겁먹게 만드는 것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카시안은 검집 끝으로 조각을 가리켰다.
그 다음 빠르게 닫히는 판을 가리켰다.
하라는 뜻이었다.
서준은 손을 뻗지 않았다.
카시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낮게 뭐라고 말하자 옆줄에서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역장 감독은 판자 위에 숯 조각을 올려놓았다. 기다리는 쪽도 기록하는 쪽도 서준이 먼저 움직이길 바라고 있었다.
틀리면 손이 다친다.
맞혀도 저 검은 판자에 표시가 남는다.
그는 조각보다 판자 든 선별자를 먼저 보았다. 선별자는 서준의 손목패를 보고 있었다. 새 검은 점이 있는 쪽이었다. 숯 조각 끝은 이미 젖어 있었다.
카시안이 검집으로 바닥을 툭 쳤다.
서준은 그제야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판 옆의 물통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누군가 물을 뜬 것도 아닌데 물 표면이 돌벽 쪽으로 기울었다. 이어 천장 어딘가에서 쇠가 한 번 긁혔다. 가슴 안쪽의 떨림은 그 소리보다 먼저 짧아졌다.
왼쪽.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손목이 움직였다.
카시안의 검집이 손등을 쳤다.
서준은 이를 악물고 멈췄다. 손등이 화끈거렸다. 피가 나지는 않았지만 뒤에서 웃음이 더 커졌다.
딱.
왼쪽 홈이 닫히지 않았다.
오른쪽 홈이 먼저 닫혔다. 돌가루가 왼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서준의 손이 방금 전 그 자리에 들어갔더라면 손가락이 끼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신 조각을 놓치고 다음 박자에 더 깊이 밀어 넣었을지도 몰랐다.
카시안은 바닥의 먼지를 검집 끝으로 문질렀다. 그 다음 서준의 가슴을 한 번 가리켰다. 물통을 가리켰다. 천장을 올려다봤다.
느낀 것 하나만 보지 말라는 뜻처럼 보였다.
서준은 카시안을 노려보았다.
그가 말을 알아듣게 해 줄 생각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명할 수 있는데도 안 하는 건지, 말해도 서준이 못 알아들을 걸 알아서 안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기분 나빴다.
카시안은 서준의 눈빛을 보고도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다시 검은 조각 하나를 발끝으로 밀어 보냈다. 이번 조각은 앞의 것보다 작았다. 가장자리에 붉은 찌꺼기가 말라붙어 있었다.
가슴 안쪽이 또 움찔했다.
서준은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물통을 봤다. 물은 흔들리지 않았다.
천장을 봤다. 쇠가 긁히는 소리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떨림은 그냥 겁 때문이었다. 방금 손등을 맞은 뒤라 더 예민해진 것뿐이었다.
손을 내리려는 순간 막대 든 인부의 손이 멈췄다.
인부는 판을 보지 않았다. 줄 맨 앞의 늙은 노동자의 발뒤꿈치를 보고 있었다. 늙은 노동자의 발뒤꿈치가 돌바닥에서 아주 조금 들렸다. 몸을 뒤로 빼려는 사람만 하는 움직임이었다.
서준은 손을 거두었다.
딱.
오른쪽 홈이 닫혔다. 조각 가장자리가 깨지며 검은 가루가 튀었다. 가루 하나가 서준의 손등에 떨어졌다. 닿은 자리가 차갑게 저렸다.
카시안은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그는 검집으로 바닥을 두 번 찍었다. 그 뒤 늙은 노동자의 발을 가리켰다. 막대 든 인부의 손도 가리켰다. 마지막으로 서준의 가슴을 가리켰다.
먼저 느낀다.
그 다음 본다.
서준은 그런 순서로 받아들였다.
느낌을 믿는 게 아니었다. 느낌 때문에 고개를 들고 주변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틀렸다고 생각했을 때도 손을 넣지 않는 것. 맞았다고 생각해도 다른 사람의 발과 손이 같은 쪽을 말하는지 보는 것.
그 정도를 익히는 데 손등 한 대가 들었다.
서준은 그 대가가 싫었다. 그래도 방금 검은 가루가 튄 자리를 문지르며 카시안을 다시 봤다. 카시안은 이미 다른 조각을 보고 있었다. 서준이 알아들었는지 확인하는 얼굴도 아니었다. 그저 반응 하나가 남았는지 보는 얼굴이었다.
마르코와 비슷한 눈이었다.
다만 카시안은 빵과 물로 값을 매기지 않았다. 손을 잃지 않는 박자로 값을 쟀다.
그 차이가 더 불쾌했다.
감독이 다가왔다. 그는 카시안에게 짧게 말한 뒤 서준의 팔을 잡았다. 카시안은 이번에는 검집을 들지 않았다.
서준은 다른 줄로 끌려갔다.
판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빈 자루가 사람 키만큼 쌓여 있었고 그 뒤에는 붉은 찌꺼기 수레가 지나가는 좁은 길이 있었다. 길 옆 돌바닥에는 검은 물이 흐르는 배수 홈이 길게 파여 있었다.
회색 끈을 찬 여자가 그 자루 옆에 서 있었다.
그녀는 서준을 한 번 보더니 곧바로 손등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서준은 반사적으로 몸을 뺐다.
여자의 손은 마르고 거칠었다. 힘이 아주 세지는 않았다. 하지만 손등이 입을 누르는 동안 그녀의 시선은 서준이 아니라 판자 든 선별자에게 가 있었다. 선별자가 이쪽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손을 내렸다.
서준은 숨을 들이켰다.
왜 막아.
그 말은 나오지 않았다. 나와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여자를 밀어내고 싶었다. 아무도 자기에게 이렇게 해도 된다고 허락한 적 없었다.
여자는 손가락 하나를 입술 앞에 세웠다.
그리고 자기 목을 짧게 가로질렀다.
서준은 얼굴을 찌푸렸다.
말하면 죽는다는 뜻이었다.
바로 옆의 남자가 두 손을 펴 보이며 빠르게 뭐라고 말했다. 그는 물을 달라는 듯 입가를 가리켰고 손목패를 내밀었다. 선별자는 남자의 말을 다 듣지도 않았다. 패를 뒤집어 본 뒤 숯 조각으로 선 하나를 더 그었다.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 뒤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회색 끈 여자는 그 광경을 보고서야 서준 쪽을 봤다. 동정하는 눈은 아니었다. 시끄러운 사람이 자기 줄에 섞인 것을 확인하는 눈이었다. 그녀는 빈 자루 뒤쪽의 좁은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서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여자는 손가락으로 자기 손목을 짚었다. 그 다음 서준의 검은 점을 짚었다. 이어 감독이 있는 쪽을 가리키고 고개를 저었다.
네가 떠들면 너만 끌려가는 게 아니라 이 줄도 다시 들여다본다는 뜻 같았다.
그녀가 자신을 구하려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오히려 믿을 만했다.
서준은 빈 자루 뒤의 자리에 섰다. 자루에서는 곰팡이와 젖은 천 냄새가 났다. 몸을 숨기기에는 너무 얕았지만 선별자의 눈이 잠깐 스치고 지나가기에는 충분한 자리였다.
여자는 물통 담당 인부가 오가는 길을 가리켰다. 물통은 종이 울릴 때마다 교대됐다. 인부 하나가 빈 통을 들고 들어오면 다른 하나가 찬 통을 들고 나갔다. 그 사이 붉은 찌꺼기 수레가 길을 막았다.
줄 바깥이 잠깐 비었다.
서준은 그 틈을 보자마자 배수 홈 끝을 봤다. 검은 물은 낮은 곳으로 흘렀다. 홈이 이어지는 쪽은 어두웠다. 어둠 너머에는 문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갈 수 있다.
그 생각은 너무 빨리 들었다.
여자가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서준은 고개를 돌렸다.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손가락으로 천장의 종을 가리켰다. 그리고 손가락 세 개를 폈다.
한 번.
종이 울렸다.
물통 담당 인부가 빈 통을 들고 나타났다. 여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두 번.
붉은 찌꺼기 수레가 길을 막았다. 서준은 다시 배수 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여자의 손이 그의 팔꿈치를 붙잡았다.
세 번.
물통을 든 인부 둘이 서로 반대쪽으로 지나갔다. 줄 바깥에는 사람 한 명이 들어갈 틈이 생겼다.
서준은 앞으로 나갔다.
여자가 그를 빈 자루 더미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등이 젖은 자루에 부딪혔다. 먼지가 목으로 들어갔다. 그는 소리를 낼 뻔했다. 여자의 손이 다시 입가로 올라왔지만 이번에는 막지 않았다. 대신 자루 사이의 좁은 틈을 손가락으로 벌려 보였다.
배수 홈 끝에 검은 장화를 신은 인부 둘이 서 있었다.
그들은 줄을 보지 않았다.
수레도 물통도 보지 않았다.
배수 홈만 보고 있었다.
한 명은 막대를 홈 안에 넣었다가 빼냈다. 다른 한 명은 그 끝에 묻은 검은 물을 천에 닦았다. 둘은 누가 홈으로 들어가는지 놓치지 않으려고 그 자리에 선 사람들처럼 보였다.
출구가 아니었다.
줄이 비는 순간은 길을 열어 주는 시간이 아니었다. 누가 그 틈을 향하는지 드러내는 시간이었다.
서준은 자루 더미 안에서 몸을 굳혔다. 조금 전까지는 여자가 자신을 막아서 화가 났다. 지금은 그때 한 걸음 나갔더라면 저 장화 앞에 섰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물통 담당 인부에게 손가락 두 개를 보였다. 이어 빈 손바닥을 폈다. 인부는 물을 주지 않았다. 대신 그들 앞에 있던 자루 하나를 발로 차서 옆으로 밀었다.
여자는 고개를 숙였다.
서준은 그 몸짓을 보고 멈칫했다.
물 두 모금이나 자루 하나를 놓을 자리. 이곳에서는 그 정도가 거래였다. 부탁도 항의도 길게 하지 않는다. 손가락과 빈 손을 보이고 상대가 주는 만큼만 받는다. 말을 많이 하면 패를 들여다볼 이유를 준다.
여자가 서준을 보며 낮게 말했다.
"르네."
그녀는 자기 가슴을 손끝으로 짚었다.
이름이었다.
서준은 잠깐 망설였다. 카시안 앞에서는 자기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이름을 주는 것조차 저들이 기록할 재료가 될 것 같았다.
르네는 기다리지 않았다. 서준의 대답에도 관심이 없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배수 홈을 가리키고 고개를 저었다. 천장의 종을 가리킨 뒤 손가락 세 개를 다시 폈다. 마지막에는 서준의 손목패 검은 점을 가리켰다.
검은 점이 있는 사람은 세 번 종이 울릴 때 더 조심해야 한다는 뜻일까.
아니면 그때만 볼 수 있는 것이 있다는 뜻일까.
서준은 확신하지 못했다.
확신하지 못하면 멋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그게 방금 카시안에게 배운 것과 닮아 있었다.
그 생각이 들자 기분이 더 나빠졌다. 카시안이 시킨 대로 살고 싶지 않았다. 르네가 막는 대로 숨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혼자 생각한 왼쪽 홈은 틀렸고 혼자 본 배수 홈은 감시선이었다.
싫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었다.
멀리서 카시안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는 개입하지 않았다. 감독도 불러오지 않았다. 다만 검집 끝을 바닥에 세 번 두드렸다.
딱.
딱.
딱.
종과는 다른 소리였다.
서준은 그 소리를 들었다.
이번에는 소리만 따라가지 않았다.
물통이 지나가는 길을 봤다. 수레가 멈추는 자리를 봤다. 배수 홈 끝의 장화를 봤다. 르네가 입을 다물던 순간과 인부가 자루를 밀어 준 순간도 같이 봤다.
도망은 아직 아니었다.
그래도 틈은 처음으로 모양을 가졌다.
그 틈의 끝에는 문이 아니라 감시가 있었다.
서준은 다음 세 번의 종이 울릴 때까지 자루 뒤에서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