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 전이자는 다시 산다

16화: 목에 걸린 표식
세 번째 종이 울렸다.
한서준은 빈 자루 더미 뒤에서 숨을 멈췄다. 종소리는 위쪽 천장에서 울렸지만 발밑의 돌까지 얇게 떨렸다. 르네는 그의 팔꿈치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나가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루 틈으로 바깥을 보더니 손가락 두 개를 폈다. 이어 검은 점이 찍힌 서준의 손목패를 가리켰다. 그다음 지나가는 수레 바퀴를 가리켰다.
두 번째 수레.
서준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줄 앞에서 인부가 검은 점이 찍힌 사람 셋을 골라 냈다. 그들은 저항하지 않았다. 한 명은 입술을 하얗게 깨물었고 한 명은 손목패를 옷소매 안으로 감추려다 막대에 맞았다.
인부는 패를 뒤집어 본 뒤 검은 자루 수레를 가리켰다.
수레 위에는 피 묻은 천과 깨진 검은 조각이 쌓여 있었다. 자루 아래로는 배수 홈보다 넓은 빈틈이 보였다. 사람이 몸을 말면 하나쯤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이었다.
서준의 목구멍이 마르게 조였다.
저 수레가 나가는 곳을 르네가 안다는 보장은 없었다. 안쪽 문으로 곧장 들어갈 수도 있었다. 검은 점이 찍힌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수레라면 더 나쁜 곳으로 갈 가능성도 컸다.
르네는 다시 손가락 두 개를 폈다.
기다려.
그 뜻이 더 정확해 보였다.
첫 번째 수레가 지나갔다. 바퀴에 묻은 붉은 찌꺼기가 돌바닥에 길게 번졌다. 뒤따르던 막대 든 인부가 자루 더미 쪽을 훑었다. 서준은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빼려 했다.
르네의 손이 그의 무릎을 눌렀다.
움직이지 말라는 손이었다.
그 순간 판 쪽에서 딱 소리가 났다. 이어 누군가 짧게 욕설처럼 내뱉었다. 인부의 시선이 돌아갔다.
카시안이 판 앞에 서 있었다.
그는 검집 끝으로 검은 조각 하나를 천천히 굴렸다. 조각은 원래 홈과 반대쪽으로 굴러갔다. 판자 든 선별자가 즉시 그를 향해 다가갔다. 카시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손목의 표식들을 보여 주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 서준은 몰랐다.
다만 카시안의 눈이 이쪽을 한 번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봤다.
봤다는 사실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가 도와주는지 시험하는지 알 수 없었다. 둘 다일 수도 있었다. 카시안은 서준을 살려 두는 쪽이 더 재미있다고 생각할 사람처럼 보였다.
두 번째 수레가 멈췄다.
르네가 먼저 자루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서준의 손목을 잡아당기는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서준은 마지막으로 판 앞을 보았다. 카시안은 이미 다른 조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부러 시선을 돌린 척하는 얼굴도 아니었다.
그게 더 믿을 수 없었다.
그래도 서준은 자루 아래로 몸을 밀어 넣었다.
젖은 천 냄새가 코를 막았다. 등이 밑판에 눌렸고 깨진 조각 하나가 갈비뼈를 찔렀다. 기침이 올라왔지만 그는 손등을 입에 대고 삼켰다.
수레가 움직였다.
바퀴가 돌 위의 홈을 지날 때마다 몸이 들렸다 떨어졌다. 르네의 발끝이 바로 앞에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 하나를 세운 채 움직이지 않았다.
수레가 첫 번째 모퉁이를 돌았다.
서준의 가슴 안쪽이 짧게 움찔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가 뜨지 않았다. 지난 판 앞에서처럼 느낌 하나만 믿고 움직이면 안 됐다. 대신 수레 바퀴의 울림을 들었다. 바퀴는 아직 빠르게 굴러가고 있었다. 천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도 규칙적이었다.
두 번째 움찔함이 왔다.
이번에는 바퀴 소리가 반 박자 늦게 났다. 누군가 수레 손잡이를 잡아 세우는 소리도 들렸다. 르네의 발끝이 아주 조금 굳었다.
서준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르네가 내려다봤다. 화를 내기 전에 그는 자루 틈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검은 장화가 보였다.
수레 옆에 선 인부는 정비 통로가 아니라 배수 홈 쪽을 보고 있었다. 막대를 홈에 넣었다가 뺐다. 첫 번째 수레가 지나갈 때 보았던 장화와 같은 종류였다.
르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검은 장화가 수레 옆을 지나쳤다. 인부는 자루 하나를 발로 찼다. 자루 속 조각이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서준의 어깨 바로 위였다.
인부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르네가 갑자기 물통을 걷어찼다.
통은 수레 바깥으로 굴러 나갔다. 물이 돌바닥에 퍼지며 배수 홈으로 쏟아졌다. 인부가 거친 소리를 질렀다. 르네는 자루 틈으로 손을 빼며 자기 손목패를 흔들었다. 실수했다는 몸짓처럼 보였다.
인부가 그녀의 팔을 잡아 끌어냈다.
서준은 움직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르네의 눈이 자루 틈 너머로 그를 찾았다. 그녀는 고개를 아주 작게 기울였다.
지금.
서준은 수레 밑으로 기어 나왔다.
물에 젖은 돌바닥이 차가웠다. 그는 배수 홈과 수레 사이의 그림자로 몸을 붙였다. 인부는 르네에게 욕을 퍼붓고 있었다. 말뜻은 모르지만 목소리만으로 충분했다.
통로 끝에는 낮은 철문이 있었다. 문 아래로 새벽빛 같은 희미한 회색이 들어왔다.
서준은 문을 향해 기어갔다. 뒤에서 막대가 바닥을 내리치는 소리가 났다. 르네가 맞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확인하려고 고개를 들면 붙잡힌다.
그는 이를 악물고 문 아래의 틈으로 몸을 밀었다.
밖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차가웠다.
하지만 지하의 젖은 쇠 냄새보다 먼저 들어온 것은 빵 굽는 냄새였다. 너무 평범한 냄새라서 서준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골목 끝 어딘가에서 수레바퀴가 지나갔고 누군가 셔터를 올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일어나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낯설었다.
르네가 뒤따라 나왔다. 그녀의 팔목에는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지만 피가 흐르지는 않았다. 서준이 그쪽을 보자 그녀는 손을 빼고 골목 끝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기다란 줄이 있었다.
칼과 방패 모양이 새겨진 나무판 아래로 사람들이 서 있었다. 낡은 가죽옷을 입은 사람도 있었고 짐꾼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줄 앞의 창구에서는 두꺼운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서준은 고개를 저었다.
저곳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 하역장에서 막 빠져나온 몸으로 줄에 섞이면 손목패를 들키기 쉬웠다. 그는 골목 반대쪽의 어두운 길을 가리켰다.
르네가 그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녀는 철문 쪽을 가리켰다. 안쪽에서 종이 한 번 울렸다. 이어 골목 입구로 장화를 신은 두 사람이 들어왔다. 하역장 인부와 같은 옷은 아니었지만 허리의 막대와 손에 든 패가 같았다.
르네는 줄을 가리켰다. 그다음 자기 목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줄 밖에 있으면 잡힌다는 뜻이었다.
서준은 이를 악물었다.
눈앞의 길은 둘뿐이었다. 어두운 골목으로 달아나 다시 사냥감이 되거나 낯선 장부 앞에 서는 것. 어느 쪽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줄에는 다른 사람의 몸이 있었다.
그는 르네 뒤에 섰다.
창구가 가까워질수록 르네는 조용해졌다. 앞사람들은 나무패를 내고 손바닥을 보였다. 접수원은 종이에 뭔가를 적은 뒤 목에 새 패를 걸어 주었다. 어떤 사람은 동전을 냈고 어떤 사람은 팔에 묶인 끈을 풀었다.
서준 차례가 되자 르네가 먼저 말했다.
그녀의 말은 빨랐다. 접수원은 처음에는 귀찮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르네가 서준의 손목패를 보여 주자 표정이 바뀌었다.
접수원의 눈이 검은 점에서 멈췄다.
그는 서준을 위아래로 훑었다. 젖은 옷과 손등의 상처와 목에 남은 먼지를 보더니 옆 창문을 두드렸다.
회색 로브를 입은 남자가 안쪽에서 나왔다.
남자의 손에는 가는 은침과 작은 유리판이 들려 있었다. 그는 서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서준은 손을 내지 않았다.
남자는 손을 내민 채 기다렸다. 접수원은 뒤쪽 줄을 힐끗 봤다. 길게 선 사람들 사이에서 불만 섞인 소리가 났다. 골목 입구의 장화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르네가 자기 손바닥을 먼저 펴 보였다.
회색 로브의 남자는 르네의 손바닥을 유리판 위에 눌렀다. 유리판 안쪽에 희미한 선이 몇 개 떠올랐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뗐다.
그다음 서준을 봤다.
서준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붉은 인주의 얼룩은 거의 지워졌지만 손도장을 찍었던 자리는 아직 거칠었다. 마르코가 종이를 내밀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도 모르는 글 앞에서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도 말은 알아듣지 못한다. 무엇을 적는지 볼 수도 없다. 다만 이번에는 손을 내밀면 무엇을 잃을지 안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정확히는 여전히 몰랐다.
모르는 채로 도망치다가 하역장으로 돌아가는 것과 모르는 채로 여기서 표식을 받는 것뿐이었다.
그는 르네를 봤다.
르네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대신 골목 입구를 봤다. 선택은 네가 하라는 얼굴이었다. 끌고 온 것은 그녀지만 손을 내미는 일까지 대신하지는 않겠다는 뜻 같았다.
서준은 손바닥을 유리판 위에 올렸다.
유리판은 차가웠다.
아무 선도 떠오르지 않았다.
회색 로브의 남자가 손을 멈췄다. 그는 유리판을 기울여 빛에 비춰 봤다. 접수원이 종이를 넘기던 손도 멎었다.
남자는 낮게 무언가를 말했다.
서준은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르네의 눈빛이 변하는 것은 알았다. 늘 손해부터 세던 눈이 잠깐 굳었다.
회색 로브의 남자가 서준의 손목패를 뒤집었다. 검은 점을 보고 은침을 집었다. 그는 침 끝을 서준의 손바닥 상처 가까이에 댔다.
서준은 손을 빼려 했다.
르네가 그의 팔을 붙잡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끝까지 빼지 못했다. 뒤쪽에서 하역장 인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단어는 모르지만 그 거친 억양은 기억하고 있었다.
은침이 살을 찔렀다.
피 한 방울이 유리판 위에 떨어졌다.
이번에는 유리판 안에서 가느다란 검은 선이 번졌다. 선은 다른 사람의 것처럼 갈라지지 않았다. 가운데에서 한 번 흔들리더니 그대로 멎었다.
회색 로브의 남자는 접수원에게 짧게 말했다.
접수원은 새 종이를 꺼냈다. 종이 위에는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는 서준의 이름을 묻는 듯 입을 벌렸다.
르네가 서준의 가슴을 손끝으로 짚었다.
이번에는 서준이 바로 말했다.
"한서준."
접수원은 발음을 어색하게 따라 했다. 종이 위에 몇 번 긁적였다. 그 글자가 자기 이름인지 서준은 알 수 없었다.
회색 로브의 남자가 그의 뒤로 돌아갔다.
서준은 목덜미에 차가운 것이 닿는 순간 몸을 굳혔다. 은침보다 넓고 납작한 금속 조각이었다.
찌익.
살이 타는 듯한 통증이 목 뒤에서 번졌다.
그는 신음을 삼켰다. 발을 빼면 넘어질 것 같았다. 접수원이 그의 어깨를 붙들고 있었다.
통증이 지나간 자리에 차가운 감각이 남았다.
회색 로브의 남자가 손을 뗐다. 접수원은 목줄에 매단 얇은 나무패 하나를 서준에게 걸어 주었다. 패 한쪽에는 검은 줄이 그어져 있었고 반대쪽에는 방금 본 것과 닮은 붉은 줄이 있었다.
그것이 일자리인지 감시인지 서준은 몰랐다.
다만 목덜미가 뜨거웠다.
하역장 인부 둘이 창구 앞까지 다가왔을 때 접수원이 나무패를 들어 보였다. 인부들은 서준을 보다가 패를 봤다. 회색 로브의 남자가 짧게 한마디 했다.
인부들의 얼굴이 굳었다.
그들은 더 다가오지 못했다.
서준은 그 장면을 보며 안도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저들이 물러난 이유는 자신이 보호받아서가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의 장부로 넘겨졌기 때문이었다.
르네가 그를 골목 안쪽으로 데리고 갔다.
등 뒤의 창구가 멀어지자 그녀는 처음으로 나무패를 잡아당겨 자세히 봤다. 이어 서준의 목덜미를 가리켰다.
그녀의 손끝은 닿지 않았다.
서준이 고개를 돌리자 르네는 손가락으로 길드 건물의 높은 창을 가리켰다. 창 안에는 종이 더미가 쌓여 있었고 누군가가 그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손목패를 감췄다. 그다음 서준의 나무패를 가리키고 사람 하나가 종이 속으로 사라지는 모양을 만들었다.
서준은 목에 걸린 패를 움켜쥐었다.
하역장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제는 길드가 그의 이름을 갖게 됐다.
그리고 목덜미의 표식은 아직 식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