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 전이자는 다시 산다

14화: 검은 줄의 시선
안쪽 문은 천천히 열렸다.
한서준은 그 문 뒤에 빛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 있는 곳보다 나을 수는 있다고 아주 잠깐 생각했다.
문이 열리자 먼저 냄새가 나왔다.
젖은 쇠 냄새.
피 냄새.
오래 닦지 않은 돌바닥 냄새.
막대가 갈비뼈 옆을 눌렀다. 서준은 앞으로 걸었다. 손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동전도 없고 빵도 없었다. 손목패 뒤의 새 점만 아직 젖어 있는 것 같았다.
문 안쪽에는 더 작은 판들이 있었다.
앞에서 보던 판보다 낮고 좁았다. 대신 빠르게 닫혔다. 딱. 딱. 딱. 소리가 짧았다. 사람들은 판 앞에 오래 서 있지 못했다. 조각 하나를 밀고 바로 몸을 빼야 했다.
검은 조각과 붉은 찌꺼기가 따로 쌓여 있었다.
붉은 것은 진흙처럼 보이지 않았다. 젖은 천에 묻은 피보다 더 어둡고 끈적했다. 검은 조각은 돌 같았지만 빛을 먹는 것처럼 가장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서준은 숨을 얕게 쉬었다.
옆줄의 남자는 손목을 배에 붙이고 있었다. 손가락 두 개가 천으로 묶여 있었고 천 끝은 말라붙은 검은 얼룩으로 딱딱했다. 그 옆의 여자는 판이 닫힐 때마다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늦을 텐데도 감았다.
그들은 모두 판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판만 보고 있지는 않았다.
막대 든 인부가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앞사람의 발꿈치가 돌 위에서 미끄러지는 순간, 천장 어딘가에서 쇠가 긁히는 순간에 몸이 먼저 움찔했다. 서준은 그 움직임들을 뒤늦게 보았다.
여기는 소리를 듣고 움직이면 늦는 곳이었다.
가슴 안쪽에서 아주 작은 떨림이 다시 올라왔다. 바닥이 먼저 흔든 것이 아니었다. 판의 소리도 아니었다. 심장 근처에서 누군가 손톱으로 긁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그것을 믿을 수 없었다.
믿었다가 틀리면 손이 날아간다.
믿지 않아도 손이 날아갈 수 있다.
앞줄의 노동자가 판에 손을 넣었다. 그는 검은 조각을 왼쪽 홈에 밀어 넣으려 했다. 서준은 갑자기 가슴 안쪽이 비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늦었다.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뒤에서 튀어나왔다.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손이 노동자의 손목을 낚아챘다. 동시에 낡은 검집 끝이 조각을 옆으로 밀었다. 판이 닫혔다.
딱.
조각이 반으로 깨졌다.
손은 멀쩡했다.
노동자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구한 사람은 그를 보지도 않았다. 그는 깨진 조각을 발끝으로 밀어 줄 밖에 빼냈다. 마치 사람의 손보다 조각의 위치가 먼저라는 듯했다.
그가 서준 쪽을 돌아보았다.
젊었다.
서준보다 어려 보일지도 몰랐다. 몸은 단단했고 등은 곧았다. 짧게 묶은 머리 아래로 눈이 날카로웠다. 손목에는 서준과 다른 표식이 여러 줄 감겨 있었다. 붉은 선도 있고 검은 선도 있었다.
그가 뭐라고 말했다.
서준은 알아듣지 못했다.
주변 몇 명이 낮게 웃었다. 웃음은 작았지만 뜻은 알 수 있었다. 서준을 보고 웃는 것이었다.
그 남자가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서준의 손목패를 검집 끝으로 톡 쳤다. 새로 생긴 검은 점 근처였다.
서준은 손목을 뒤로 빼려 했다.
막대가 등을 눌렀다.
남자는 웃었다. 입꼬리만 올라갔다. 그는 자기 가슴을 엄지로 가리켰다.
"카시안."
이름처럼 들렸다.
그 다음 그는 서준을 가리켰다. 기다렸다. 서준은 입을 열지 않았다. 자기 이름을 말해도 통할지 몰랐다. 말하는 순간 더 웃을지도 몰랐다.
카시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판 앞을 검집으로 가리켰다.
해 보라는 뜻이었다.
서준은 목이 말랐다. 물은 없었다. 빵도 없었다. 거절할 말도 없었다.
카시안이 한 걸음 비켜섰다.
그 한 걸음 때문에 줄 안쪽이 더 조용해졌다. 노동자들은 서준을 보지 않는 척했다. 하지만 어깨와 발끝은 모두 이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하역장 감독은 판자 든 선별자에게 손짓했다. 선별자는 이미 숯 묻은 조각 끝을 들고 있었다.
틀리면 기록된다.
맞혀도 기록된다.
서준은 그 둘 중 어느 쪽이 더 나쁜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판 앞에 섰다.
검은 조각 하나가 내려왔다. 붉은 찌꺼기 두 개가 그 옆으로 미끄러졌다. 판의 왼쪽 홈은 조금 열려 있었다. 오른쪽 홈은 닫힌 것처럼 보였다.
서준은 가슴 안쪽의 떨림을 기다렸다.
딱.
너무 빨랐다.
손을 넣기도 전에 판이 닫혔다. 카시안이 짧게 웃었다. 주변에서 다시 웃음이 번졌다.
서준은 얼굴이 뜨거워졌다.
웃지 마.
말은 나오지 않았다. 나와도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 조각이 내려왔다. 이번에는 떨림이 먼저 왔다.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이었다. 서준은 오른쪽으로 손을 뻗었다.
카시안의 검집이 그의 손목을 쳤다.
아프지는 않았다.
멈추라는 뜻이었다.
서준은 멈췄다. 다음 순간 오른쪽 홈이 닫혔다. 왼쪽 홈이 열렸다.
방금 들어갔으면 손가락이 끼였을 것이다.
카시안은 검집 끝으로 바닥을 두 번 찍었다. 그 다음 왼쪽 홈을 가리켰다. 순서를 보여 주는 듯했다.
왼쪽.
기다림.
오른쪽이 아니라 다시 왼쪽.
서준은 그 뜻을 완전히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그가 무엇을 보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카시안은 판 하나만 본 게 아니었다. 내려오는 조각의 무게와 판 옆 노동자의 발, 막대를 든 인부가 움직이는 방향까지 같이 보았다.
서준은 소리보다 늦었다.
카시안은 소리보다 빨랐다.
그 차이가 분노보다 먼저 들어왔다.
서준은 그 차이를 본 적이 있었다.
게임 화면 너머에서 남의 손놀림을 보며 저건 장비가 좋아서 그렇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직장에서 누군가 같은 일을 더 빨리 끝내면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집에서는 아무도 자기 설명을 끝까지 듣지 않았으니, 못 한 이유를 끝까지 붙들고 있어도 됐다.
여기서는 이유가 손가락을 붙여 주지 않았다.
늦으면 잘렸다.
그뿐이었다.
다음 판이 열렸다. 카시안은 턱짓했다. 서준은 조각을 밀었다. 손끝이 검은 조각 가장자리에 스쳤다. 살이 아주 얕게 찢겼다.
그는 손을 빼려 했다.
카시안이 팔꿈치를 잡아당겼다.
딱.
판이 닫혔다.
이번에는 손끝만 긁혔다.
카시안은 서준의 손을 들어 보았다. 피 한 방울이 맺혔다. 그는 피를 보고 웃었다. 그러더니 자기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장갑 안쪽에서 오래된 흉터가 삐져나와 있었다.
그는 또 뭐라고 말했다.
뜻은 몰랐다.
하지만 그 정도로 죽지 않는다는 말처럼 들렸다. 아니면 그 정도도 못 버티냐는 말일지도 몰랐다.
서준은 그 손을 뿌리치고 싶었다.
뿌리치지 못했다.
힘이 없었다. 그리고 방금 전 카시안이 잡아당기지 않았다면 손끝이 아니라 손가락이 잘렸을지도 몰랐다.
그 사실이 더 싫었다.
하역장 감독이 다가왔다. 그는 카시안에게 낮게 말했다. 카시안은 대답하면서 서준의 손목패를 잡아 돌렸다. 새 검은 점을 보았다. 그 옆을 검집 끝으로 톡 쳤다.
감독이 서준의 어깨를 잡았다.
더 안쪽.
서준은 그 뜻을 몸으로 알았다. 아직 끝이 아니었다. 더 깊은 줄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판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대신 사람들의 숨소리만 빠르게 끊겼다.
서준은 발을 버텼다.
버틴다고 멈출 힘은 없었다.
그때 카시안이 검집을 감독과 서준 사이에 넣었다.
감독의 얼굴이 굳었다.
카시안은 웃지 않았다. 그는 자기 손목을 들어 보였다. 거기에는 여러 표식이 있었다. 서준의 검은 점과 비슷한 점도 있었고 길게 그어진 선도 있었다. 카시안은 그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누른 뒤 서준의 새 점을 눌렀다.
그 다음 바닥을 가리켰다.
여기.
아직.
그런 뜻처럼 보였다.
감독은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로 막대를 든 인부에게 손짓했다. 인부가 물러났다. 서준은 더 안쪽으로 끌려가지 않았다.
도움인가.
아니었다.
카시안의 눈에는 걱정이 없었다.
그는 서준이 살았는지보다 서준이 어느 순간 움찔했는지를 보는 얼굴이었다. 물건을 떨어뜨리기 전에 손이 먼저 나가는지, 소리 전에 눈이 먼저 움직이는지, 겁이 들면 굳는지 아니면 밀어 넣는지 보는 얼굴이었다.
서준은 그런 시선을 알았다.
마르코가 처음 빵을 내밀 때도 사람을 본 게 아니었다. 값이 붙을 물건을 보았다. 하역장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판자 든 선별자도 마찬가지였다.
카시안은 달랐다.
더 나은 쪽으로 다른 것이 아니었다.
더 정확했다.
카시안은 곧바로 서준 앞에 검은 조각 하나를 던졌다. 조각은 돌바닥에 떨어지며 묵직한 소리를 냈다. 그는 서준의 눈을 가리켰다. 그 다음 조각을 가리켰다. 그리고 자기 귀를 두드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소리를 듣지 말라는 뜻인가.
보라는 뜻인가.
아니면 네 귀는 쓸모없다는 뜻인가.
서준은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가장자리 안쪽에서 아주 약한 떨림이 느껴졌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가슴 안쪽이 먼저 반응했다.
하지만 카시안은 이미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서준이 늦게 느낀 것을 그는 몸으로 먼저 읽었다.
화가 났다.
조롱당해서 화가 났다. 도움인지 시험인지 모를 행동에 끌려 다니는 것도 화가 났다. 그래도 더 큰 것이 있었다.
차이.
너무 큰 차이.
분노를 앞세우면 바로 죽는다.
서준은 그 사실을 인정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몸이 먼저 인정했다. 갈비뼈가 아프고 목은 마르고 손끝은 쓰렸다. 그런 몸으로는 카시안을 미워하는 것조차 오래 할 수 없었다.
카시안이 검집으로 바닥을 다시 찍었다.
딱.
판의 소리와 조금 달랐다.
서준은 검은 조각을 보았다.
가슴 안쪽의 떨림이 다시 올라왔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아직 믿지는 않았다.
다만 보았다.
카시안은 그 모습을 보고 다시 웃었다.
이번 웃음도 친절하지 않았다.
그래도 서준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살아남으려면 먼저 저 차이를 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