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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 아포칼립스4화

블라인드 아포칼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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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막힌 셔터

박두식이 앞장서자 통로 안의 발소리가 하나씩 움직였다.

“벽을 잡고 따라와. 앞사람 옷자락은 잡아도 된다. 대신 떠들지 마.”

그 말은 명령이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벽을 더듬고 서로의 소매를 움켜쥐었다. 한결은 수아의 손등을 한 번 눌렀다. 지우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라는 뜻이었다.

수아는 곧 그의 손목을 건드렸다. 다른 손으로 지우를 잡고 있다는 신호였다.

문 너머에서는 변이자들이 아직 철판을 긁고 있었다. 그러나 발소리는 조금씩 멀어졌다. 동전이 굴러간 매장 안쪽에 놈들이 매달린 모양이었다.

“방재실까지 얼마나 갑니까?”

한결이 물었다.

“통로 끝까지 열두 걸음쯤 가서 왼쪽이에요.”

수아가 숨으로 답했다.

“방화문 하나 지나면 방재실 전실이에요. 거기서 다시 문 하나를 열면 방재실이고요. 원래 방화문은 화재 나면 저절로 닫히는데 지금은 경보가 죽어서 열려 있을 수도 있어요.”

박두식이 멈췄다.

“쓸데없는 말 줄여.”

수아의 손끝이 한결의 손목에서 잠깐 굳었다. 한결은 그것을 느끼고도 박두식에게 맞서지 않았다. 지금 통로에서는 목소리 하나가 문보다 위험했다.

대열이 움직였다.

바닥은 매장 쪽 타일보다 거칠었다. 고무 바퀴 자국이 오래 눌어붙은 시멘트 위로 작업화와 운동화 밑창이 차례로 지나갔다. 오른쪽 벽에는 소화전함이 일정한 간격으로 있었고 왼쪽에서는 락스와 젖은 걸레 냄새가 났다.

한결은 걸음 수를 셌다.

박두식의 단단한 발. 그 뒤를 따르는 긴 물건의 끝이 바닥을 가볍게 찍는 소리. 중간에서 숨을 몰아쉬는 여자 하나. 수아와 지우. 뒤쪽에서 벽을 긁으며 걷는 두 사람.

누군가 대열에 끼지 못한 채 남아 있지는 않았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한결은 숨을 조금 내보냈다.

하지만 대열의 끝은 자꾸 멈칫거렸다. 뒤쪽에 선 남자가 벽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손가락 끝이 페인트 벽을 더듬을 때마다 마른 가루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앞사람과 떨어지지 마세요.”

한결이 낮게 말했다.

“한 걸음만. 그 이상은 움직이지 마요.”

“문이 닫히면 우리도 갇히는 거 아닙니까?”

남자는 목소리를 죽이려 했지만 끝이 갈라졌다.

박두식이 대답했다.

“그래서 방재실로 가는 거다. 전기와 셔터를 확인해야 다음 판단을 한다.”

한결은 그 말 뒤에 남은 침묵을 들었다. 누구도 다음 판단이 무엇인지 묻지 못했다. 셔터를 더 내릴지 열지, 남은 사람을 찾을지 포기할지. 박두식의 짧은 문장 안에는 아직 말하지 않은 선택들이 겹쳐 있었다.

지우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문 앞에 사람 많았어요.”

수아의 손이 지우의 어깨 위에서 멈췄다.

“그때요. 아줌마가 셔터 밑으로 손 넣고 있었어요. 안에 사람 있는 거 알았다고 계속 불렀어요.”

박두식의 작업화가 바닥을 세게 눌렀다.

“지금 그 얘기 하지 마.”

“저도 안 하려고 했어요.”

지우는 입술을 떨며 말했다.

“그런데 스피커 소리가 똑같아서요.”

한결은 지우의 손을 놓지 않았다. 기억은 공포 속에서 멋대로 섞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 기억을 닫아버리면 이제부터 이 통로에 남는 건 큰 목소리뿐이었다.

“기억나는 건 말해도 됩니다.”

그가 말했다.

“다만 누군가를 밀어붙이려고 말하지는 맙시다. 우리가 들은 것과 모르는 것을 나눠야 해요.”

박두식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앞쪽에서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대열을 다시 움직이라는 신호였다.

천장 스피커가 다시 울었다.

— 치익. 치이익.

모두의 발이 멎었다.

잡음 사이로 낮은 남자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문장이 되기 전에 끊겼고 다시 금속성 잡음이 덮었다. 한결에게는 뜻보다 신호의 간격이 먼저 들렸다. 짧게 세 번. 길게 한 번. 그리고 끊김.

지우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저 소리….”

말끝이 떨렸다.

박두식이 낮게 말했다.

“조용히 해.”

“아까도 저렇게 났어요. 셔터 내려가기 전에요. 무전기에서 세 번 짧게 울리고 사람 목소리가 났어요.”

통로의 공기가 좁아졌다.

박두식의 숨이 아주 짧게 멈췄다. 한결은 그 작은 빈틈을 들었다.

수아가 한참 뒤에 말했다.

“보안팀 호출음이 맞아요. 세 번 짧고 한 번 긴 건 팀장 호출이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무슨 목소리였습니까?”

한결이 물었다.

“잘 기억 안 나요. 사람들이 소리 지르고 있었어요. 그런데… 팀장님 목소리는 들었어요.”

“뭐라고 했는데?”

박두식의 목소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지우가 움찔했다.

한결은 손을 뻗어 지우의 손등을 감쌌다.

“급하게 말하지 마세요. 들은 순서대로만 말하면 됩니다.”

지우는 몇 번 숨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무전기에서 누가 출입구 쪽이 뚫린다고 했어요. 사람들 들어온다고. 그다음에 팀장님이… 동쪽 출입구 막으라고 했어요. 안쪽 사람부터 빼라고. 밖에는 못 들어오게 하라고요.”

뒤쪽에서 누군가 숨을 들이켰다.

“그래서 셔터가 내려간 거야?”

낯선 여자 목소리였다. 울음이 묻어 있었다.

박두식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손이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만졌다. 무전기인지 열쇠 꾸러미인지 알 수 없었다. 작은 플라스틱 조각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학생 말은 반만 들어.”

그가 말했다.

“그때 밖에 뭐가 있었는지 너희가 봤어? 출입구가 열려 있었으면 변한 놈들이 매장으로 쏟아져 들어왔어. 셔터를 안 내렸으면 여기 있는 사람도 없었을 거다.”

“팀장님이 내리라고 한 건 맞아요?”

수아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또렷했다.

박두식이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기척이 났다.

“맞다.”

통로 끝 어딘가에서 아주 작은 신음이 흘렀다.

“그럼 밖에 있던 사람들은요?”

아까 그 여자였다.

“문 앞에 몰린 사람들까지 들이면 안쪽이 다 죽는다. 내가 그 자리에서 열 명을 들여보내고 백 명을 죽일 수는 없었다.”

박두식의 말은 흔들리지 않았다. 너무 빨리 나온 말이라 한결은 그가 이미 여러 번 스스로에게 같은 답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문을 닫았다. 그게 내 일이다.”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안쪽에 있던 사람을 살리는 게 보안팀 일이지 바깥 전체를 구하겠다고 문을 열어두는 게 아니야.”

누군가 벽을 짚은 손을 떼었다가 다시 붙였다. 손바닥이 마른 페인트 위를 스치는 소리가 길게 났다.

한결은 박두식의 말 속에서 공포를 들었다. 죄책감이 아니라 계산이 먼저였지만 그 계산을 놓치면 자신도 무너질 거라는 공포였다.

“지금 누가 옳았는지 결론 낼 때가 아닙니다.”

한결이 말했다.

박두식이 짧게 웃었다.

“그런데 네가 심판이라도 된 것처럼 묻고 있잖아.”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확인하자는 겁니다. 셔터가 어디까지 닫혔는지. 밖과 연결된 곳이 남았는지. 방재실에서 안전하게 확인해야 합니다.”

“안전하게?”

“모니터는 먼저 가립니다. 수아 씨가 차광할 물건을 찾고 우리는 화면을 보지 않은 채 제어반 위치부터 확인합니다. 눈을 뜰 사람을 정하기 전에 방법부터 만들자는 말입니다.”

수아가 곧바로 말했다.

“방재실 앞 창문은 블라인드가 있어요. 안쪽에 비상용 담요도 있고요. 모니터 위에 덮을 수 있어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아냐.”

박두식의 말에는 짜증보다 경계가 컸다.

“야간 근무 때 들어가 봤으니까요. 비상 담요는 겨울에 정전 훈련할 때 썼어요.”

한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아 씨가 블라인드와 담요를 확인합니다. 저는 문턱과 제어반 쪽을 확인하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방화문 밖에서 대기하세요. 안으로 들어갈 사람도 둘이면 충분합니다.”

“내가 결정한다.”

박두식이 말했다.

“그래도 순서는 바꾸지 않습니다. 화면부터 가립니다.”

한결의 말이 끝났을 때 통로 끝에서 바람이 스쳤다.

닫힌 공간에서 나올 수 없는 공기였다. 먼지와 오래된 전선 냄새가 섞인 바람. 방화문 쪽이 열려 있었다.

수아가 속삭였다.

“여기예요. 앞에 방화문 있어요.”

박두식의 발이 두 걸음 먼저 나갔다. 손잡이를 잡는 금속음이 났다.

한결은 즉시 말했다.

“멈추세요.”

“문 하나 여는 것도 네 허락을 받아야 하나.”

“반대편 소리부터 들어야 합니다.”

박두식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때 방화문 너머에서 누군가가 두 번 두드렸다.

— 톡. 톡.

모두가 얼어붙었다.

“박 팀장님?”

낮은 남자 목소리였다.

“박 팀장님 안에 계세요?”

박두식의 숨이 거칠어졌다. 손잡이를 쥔 손이 미세하게 떨리며 금속을 긁었다.

“누구야.”

그 한마디에는 처음으로 명령이 없었다.

한결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문 너머의 목소리는 살아 있는 사람처럼 떨렸지만 배경이 이상했다. 가까운 곳에서 셔터가 느리게 긁히고 있었다. 그보다 더 멀리에서는 젖은 웃음이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문 너머의 남자가 다급하게 말했다.

“저예요. 정문 쪽에서… 셔터 내리기 전에 남았던….”

말은 울음에 잠겼다.

“제발 열어 주세요. 팀장님이 막으라고 했잖아요. 저 여기 계속 있었어요.”

박두식의 손가락이 방화문 손잡이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지우가 한결의 팔을 붙잡았다.

“저 뒤에 웃는 소리 나요.”

한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목소리 뒤에서 들린 웃음이 한 번 더 길게 늘어났다.

그리고 방화문이 바깥쪽에서 아주 천천히 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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