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 아포칼립스

3화: 눈가리개의 규칙
박두식의 명령이 직원 통로의 낮은 천장에 부딪혀 돌아왔다.
“풀어.”
한결은 천으로 감긴 눈가에 손대지 않았다. 대신 등 뒤의 수아와 지우를 더 안쪽으로 밀었다. 지우의 손끝이 그의 소매를 잡고 있었다. 떨림이 옷감을 타고 전해졌다.
매장 쪽 문은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
카드키가 울렸던 소리. 문손잡이가 밀리던 소리. 세 사람이 통로로 들어오며 어쩔 수 없이 낸 숨소리.
그 모든 것이 문 너머의 것들을 불러오고 있었다.
문틈에서 비린 냄새가 흘러들었다. 피와 과일즙과 냉장고 바람이 한꺼번에 썩은 냄새였다. 그 사이로 젖은 손톱이 타일을 긁는 소리가 아주 낮게 들렸다.
“팀장님.”
수아가 숨을 죽인 채 말했다.
“문부터 닫아야 해요.”
“내가 묻는 말에 먼저 대답해.”
박두식의 발이 한 발 가까워졌다. 밑창이 통로 바닥을 눌렀다. 오래 신은 작업화의 뒤축이 단단했다. 그가 움직이자 뒤쪽 생존자들의 숨이 동시에 멈췄다.
한결은 그 반응을 들었다.
통로 안쪽에는 적어도 여섯 명이 있었다. 벽에 등을 붙인 사람 둘. 청소도구 같은 긴 물건을 쥔 사람 하나. 울음을 막느라 입술을 깨무는 사람 하나. 그리고 박두식이 발을 옮길 때마다 같이 움찔하는 사람들.
박두식은 이미 이 좁은 통로 안에서 명령의 중심이었다.
“눈가리개를 풀면 안 됩니다.”
한결은 낮게 말했다.
“보는 순간 변합니다.”
“증거는.”
“매장에서 봤습니다.”
“네가 지금 뭘 봤다는 거야.”
박두식의 웃음이 짧게 끊겼다.
“눈을 가리고 와서 눈으로 확인했다는 소리냐.”
“보기 전에 가렸습니다. 변한 사람들의 순서와 소리로 알았습니다. 안개를 본 사람들이 먼저 미쳤습니다.”
“그건 네 추측이다.”
“지금 눈을 뜨라는 말도 팀장님 추측입니다.”
통로 안쪽에서 누군가 작게 숨을 삼켰다.
그때 문틈의 소리가 변했다.
긁는 소리가 멈추고 젖은 입술이 벌어지는 소리가 났다. 숨이 들어왔다. 짧고 깊었다. 무언가가 문 바로 너머에서 냄새를 맡고 있었다.
한결은 오른손을 뒤로 뻗어 수아의 손등을 눌렀다.
멈춰.
“다들 소리 내지 마세요.”
박두식이 낮게 말했다.
“지시는 내가 한다.”
“지금 말하면 죽습니다.”
한결은 몸을 낮췄다. 바닥의 진동이 문손잡이를 타고 왔다. 변이자의 손이 문에 닿았다. 쇠 손잡이가 아주 작게 떨렸다.
— 끼익.
문이 손가락 한 마디만큼 더 열렸다.
누군가 뒤에서 울음을 터뜨리려 했다. 박두식이 거칠게 속삭였다.
“입 막아.”
하지만 이미 늦었다.
문 너머의 숨이 그쪽으로 돌아섰다. 변이자는 소리의 방향을 들었다. 한결의 머릿속에서 통로가 그려졌다. 왼쪽 벽에는 청소도구함. 오른쪽은 소화전함. 문 앞에는 고무 매트. 매장 쪽에는 계산대와 쓰러진 카트가 있을 것이다.
문을 그냥 닫으면 손잡이 소리가 난다. 힘으로 밀면 변이자가 문에 매달린다.
먼저 반대편으로 돌려야 했다.
한결은 손을 바닥에 붙인 채 옆으로 움직였다.
“수아 씨. 카드키는 아직 들고 있습니까?”
“네.”
“제가 두 번 두드리면 문을 당겨요. 끝까지 닫지 말고 잠금 걸리는 위치까지만 맞춥니다.”
“문 앞에 저게 있는데요.”
“그래서 돌릴 겁니다.”
박두식이 다가왔다.
“누가 네 마음대로 움직이라고 했어.”
한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소화전함 아래를 더듬었다. 손끝에 금속 고리 하나가 걸렸다. 안전핀. 누군가 급하게 소화기를 꺼내다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작고 가벼웠다.
이걸로는 부족하다.
그는 다시 바닥을 훑었다. 손끝에 둥근 플라스틱 통이 닿았다. 안쪽에서 동전 몇 개가 찰랑거렸다. 계산대 근처에서 굴러 들어온 모금함일 수도 있었다.
한결은 숨을 들이마셨다.
변이자는 문 바로 앞에 있었다. 너무 큰 소리를 내면 통로로 뛰어든다. 너무 작은 소리는 무시한다.
“지우 씨.”
그가 거의 입술만 움직였다.
“저쪽 소리가 어느 방향으로 틀어지는지 들리면 제 팔을 한 번 눌러요.”
지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떨리는 손이 한결의 팔꿈치에 닿았다.
“눈 뜨지 말고 귀만 씁니다.”
그 말에 지우의 손가락이 조금 더 단단해졌다.
한결은 안전핀을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그리고 동전 통을 매장 안쪽 바닥으로 낮게 밀었다.
— 드르르.
소리가 길었다.
변이자의 숨이 확 가까워졌다. 문이 더 벌어졌다. 누군가의 살갗이 문틀에 쓸리는 축축한 소리가 났다.
한결은 이를 악물고 안전핀을 반대편으로 튕겼다.
— 팅.
금속음이 동전 통의 움직임과 다른 지점에서 울렸다.
변이자가 멈췄다.
한결은 두 번째 소리를 만들었다. 손바닥으로 바닥을 아주 짧게 쳐서 고무 매트의 둔한 진동을 냈다. 그리고 동전 통을 발끝으로 한 번 더 밀었다.
— 차르륵.
매장 쪽 깊은 곳에서 쓰러진 카트가 반응했다. 통이 카트 바퀴에 부딪히고 동전들이 흩어졌다.
— 차라라락!
변이자의 웃음이 그쪽으로 튀었다.
지우의 손이 한결의 팔을 눌렀다.
한 번.
소리가 돌아섰다는 뜻.
한결은 수아의 손바닥을 두 번 두드렸다.
수아가 움직였다. 카드키 줄이 조끼에 스치는 소리가 났지만 냉장 모터의 낮은 울림이 그 소리를 조금 삼켰다. 그녀가 문 가장자리를 잡았다.
문은 쉽게 닫히지 않았다.
문틈 안쪽에 무언가 끼어 있었다. 손가락인지 옷자락인지 알 수 없었다. 수아가 숨을 삼켰다.
“걸렸어요.”
한결은 문 아래로 손을 뻗었다. 차갑고 끈적한 것이 손등에 닿았다. 인간의 손가락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손가락은 아니었다. 관절이 이상한 각도로 꺾인 채 문틈에 끼어 있었다.
문 너머에서 변이자가 다시 돌아서고 있었다.
“밀지 말고 당겼다가 다시 닫아요.”
“소리 나요.”
“지금 안 하면 들어옵니다.”
박두식이 거칠게 다가와 문을 잡았다.
“비켜.”
그 힘은 컸다. 문이 한 번에 당겨졌다.
— 쿵.
소리가 통로 전체를 때렸다.
변이자가 괴성을 질렀다. 한결의 귀가 찢어질 듯 울렸다. 매장 쪽 다른 발소리까지 방향을 바꾸었다.
세 명.
아니 넷.
가벼운 발소리와 질척한 발소리가 섞여 다가왔다.
“힘으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한결이 낮게 말했다.
“그럼 네가 막아!”
박두식이 문을 밀었다. 이번에는 끼어 있던 것이 빠졌고 문이 닫혔다. 수아가 즉시 카드키를 찍었다.
— 삑.
잠금음이 울렸다.
바로 다음 순간 무언가가 문에 부딪혔다.
— 쾅!
지우가 비명을 삼키며 주저앉았다. 문 너머에서 손톱이 철판을 미친 듯이 긁었다. 웃음소리가 문 아래 틈을 타고 들어왔다.
“보여. 너희도 보여.”
사람의 말 같았지만 말이 아니었다. 혀가 기억하는 문장만 남은 소리였다.
한결은 문에서 세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지금부터 이 통로에서는 아무도 눈가리개를 풀지 않습니다. 확인이 필요하면 차광된 곳을 만든 뒤에 합니다. 혼자 확인하지 않습니다.”
박두식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네가 대장이라도 된 줄 아나.”
“대장이 필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규칙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규칙은 내가 정한다.”
“눈을 뜨면 죽는다는 규칙은 팀장님이 정한 게 아닙니다.”
통로 안이 조용해졌다.
생존자 중 누군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천 좀 주세요.”
그 말이 갈라진 틈을 만들었다. 다른 사람이 주머니를 뒤졌다. 또 다른 사람은 박두식의 눈치를 보았다.
수아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보안 조끼 안쪽 천을 찢었다. 그녀는 지우의 눈가리개 매듭을 다시 묶고 남은 천을 옆 사람에게 건넸다.
“눈 위를 누르지 말고요. 빛만 막으면 돼요.”
수아의 목소리는 아직 떨렸지만 손놀림은 빠르고 정확했다.
박두식은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좋다.”
그는 한 박자 늦게 말했다.
“일단 문은 닫혔다. 하지만 여긴 피난처가 아니야. 통로는 길일 뿐이다. 방재실로 간다. 셔터 상태와 방송 장비를 확인해야 한다. 전기와 문을 잡아야 사람들이 산다.”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것이 더 위험했다.
박두식은 생존을 말하고 있었다. 한결도 생존을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가리키는 방향은 달랐다. 한쪽은 눈으로 확인하고 명령을 따르라고 했고 다른 한쪽은 보지 말고 소리를 믿으라고 했다.
“방재실에 CCTV가 있습니까?”
한결이 물었다.
수아가 대답했다.
“있어요. 매장하고 출입구 화면이 다 떠요.”
“모니터는 덮어야 합니다.”
박두식이 낮게 웃었다.
“또 위험하다?”
“안개를 화면으로 봐도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보지도 못하는 놈이 세상 모든 걸 위험하다고 하는군.”
한결은 문 너머를 들었다. 변이자들은 아직 철판을 긁고 있었지만 조금씩 멀어지는 소리도 섞였다. 동전들이 흩어진 곳에 매달린 놈들이 있었다.
유도는 통했다.
하지만 영원히 통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결은 지우의 손을 찾아 손바닥에 한 번 눌렀다. 멈춤. 지우의 떨림이 아주 조금 줄었다.
“방재실까지 길은 압니까?”
수아가 대답했다.
“알아요. 통로 끝에서 왼쪽. 방화문 하나 지나면 바로예요. 그런데 거긴 모니터가 많아요.”
천장 스피커에서 끊어진 방송 노이즈가 다시 흘렀다.
— 치익. 치이익.
그 잡음 사이로 아주 희미한 사람 목소리 같은 것이 섞였다가 사라졌다.
통로 안의 모두가 그 소리를 들었다.
박두식이 앞장섰다.
“두 줄로 붙어. 벽에서 손 떼지 마라. 대열을 이탈하면 내가 책임 못 진다.”
한결은 그 명령보다 방화문 너머의 노이즈를 들었다.
그 소리는 단순한 방송 사고가 아니었다. 누군가 아직 어디선가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아니면, 무언가가 사람 목소리를 흉내 내기 시작한 것인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