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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 아포칼립스2화

블라인드 아포칼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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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셔터 너머의 숨소리

한결은 어둠 속으로 뻗은 손을 멈추었다.

손끝에서 냉동 쇼케이스의 차가운 금속 모서리가 닿았다. 그 너머 좁은 틈에서 여자의 숨이 얇게 떨렸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목 안쪽에서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 하나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아직 사람이다.

“움직이지 마세요.”

한결은 입술만 간신히 움직여 속삭였다.

“눈 뜨고 있으면 감으세요. 창밖을 봤습니까?”

“아니요. 못 봤어요. 방송실 쪽에 있다가 소리가 나서 나왔는데 사람들이 갑자기….”

여자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젖은 천이 찢기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누군가의 웃음이 터졌다.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웃음. 목구멍을 칼로 긁어 억지로 뽑아낸 것 같은 소리였다.

한결은 이를 악물었다.

“이름.”

“이수아요. 보안팀 알바예요.”

보안팀.

그 단어가 한결의 계산을 바꾸었다. 직원 통로와 창고. 카드키. 방재실. 그 여자는 이 마트의 길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수아 씨. 여기서 직원 창고까지 갈 수 있습니까?”

“길은 알아요. 그런데 지금은… 사람이 너무 많이 죽었어요.”

“보려고 하지 마세요. 말로만 답하면 됩니다.”

한결은 손바닥을 위로 향해 천천히 내밀었다.

“제 목소리 방향으로 손을 뻗어요.”

쇼케이스 뒤에서 손이 조심스럽게 나왔다. 손끝은 허공을 더듬다가 한결의 손등에 닿았다. 수아가 놀라 손을 거두려 하자 한결은 잡아채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 두 개를 그녀의 손바닥 위에 가볍게 올렸다.

“제가 누르면 멈추고 두 번 두드리면 움직입니다. 목소리는 최대한 줄이세요.”

수아가 고개를 끄덕이는 기척이 났다.

그 순간 그녀의 발끝이 바닥의 플라스틱 바구니를 건드렸다.

— 드르륵.

바구니가 타일 위에서 반 뼘쯤 밀렸다.

작은 소리였다. 평소라면 누구도 돌아보지 않을 잡음이었다. 그러나 지금 마트는 숨소리마저 칼날이 되는 곳이었다.

신선식품 코너 쪽에서 낮은 웃음이 뚝 끊겼다. 대신 젖은 숨이 들렸다. 한결은 수아의 손바닥을 강하게 눌렀다.

멈춰.

변이자의 발소리가 다가왔다.

그 발소리는 인간의 것이면서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두 발로 비틀거리다가 갑자기 양손을 바닥에 찍었다. 손톱이 타일을 긁고 무릎뼈가 선반에 부딪혔다. 균형을 잃은 짐승이 아니라 일부러 관절을 꺾어 낮게 기는 인간 같았다.

수아의 호흡이 빨라졌다.

한결은 쇼케이스 아래를 더듬었다. 손끝에 얼음 조각 하나가 잡혔다. 차가운 통증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그는 변이자의 위치와 반대편 냉장 진열대의 빈틈을 머릿속에 그렸다.

— 웅.

냉장 모터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낮고 일정한 진동이 바닥을 타고 퍼졌다. 한결은 그 소리가 공간을 덮는 순간을 기다렸다.

지금.

그는 얼음 조각을 손목만 써서 던졌다. 얼음은 반대편 진열대 밑으로 미끄러져 플라스틱 받침대에 부딪혔다.

— 탁.

변이자의 숨이 그쪽으로 홱 돌아갔다.

한결의 코앞으로 뜨거운 체취가 스쳤다. 피비린내와 썩은 과일 냄새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수아가 숨을 삼키려 하자 한결은 그녀의 손등을 바닥에 붙이듯 눌렀다.

몇 초 뒤 변이자가 얼음 소리가 난 쪽으로 몸을 던졌다. 진열대가 흔들리고 포장된 생선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변이자는 그 소리에 더 흥분한 듯 짧고 높은 웃음을 냈다.

한결은 수아의 손바닥을 두 번 두드렸다.

가자.

두 사람은 바닥을 기듯 움직였다. 수아는 겁에 질린 와중에도 생각보다 정확했다. 그녀의 손가락은 한결의 손바닥 위에서 방향을 짚었다. 왼쪽에 낮은 진열대. 오른쪽에 쇼케이스 모서리. 세 걸음 뒤 직원 전용 문.

“문은 카드키예요.”

수아가 숨으로 말했다.

“어디 있습니까?”

“조끼 안쪽 주머니요. 제가 찍을게요.”

그때 계산대 쪽에서 아주 작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엄마….”

한결의 몸이 굳었다.

아이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래도 아직 어린 학생의 목소리였다. 공포 때문에 눌린 목소리는 계산대 아래 금속판에 부딪혀 얇게 떨렸다.

수아도 들었는지 손가락이 굳었다.

“가면 안 돼요. 저쪽은 뚫려 있어요.”

“살아 있습니다.”

“우리도 죽어요.”

맞는 말이었다.

한결은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수아만 데리고 직원 통로로 들어가는 일이었다. 카드키를 가진 사람. 마트 지리를 아는 사람. 생존에 직접 도움이 되는 사람.

하지만 울음소리는 계속 귀에 박혔다.

눈을 가린 어둠 속에서 인간의 목소리는 위치만 알려주지 않았다. 그것은 선택을 만들었다.

“수아 씨. 계산대 아래에 앞치마나 천 있습니까?”

“계산 직원 앞치마가 있을 거예요.”

“그걸 찢어서 눈부터 가립시다. 제가 앞을 막겠습니다.”

“그 사람을 데려가겠다는 거예요?”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변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수아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반박은 없었다.

두 사람은 계산대 쪽으로 돌아갔다. 매장 입구 쪽에서는 변이자들의 웃음과 비명이 서로 뒤섞여 출렁였다. 셔터 너머로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고 천장 스피커에서는 끊어진 방송 신호가 치익거리며 흘렀다.

한결은 바닥의 진동을 따라 움직였다. 열린 공간은 위험했다. 소리가 사방으로 튀어 위치를 속였다. 그는 계산대 금속판에 손을 대고 울림을 읽었다. 안쪽에 웅크린 사람 하나. 작은 몸. 빠른 호흡.

“이름.”

“최… 최지우요.”

“몇 살입니까?”

“열일곱이요. 저 집에 가야 해요. 엄마가 기다리는데….”

“지우 씨. 지금 눈 뜨고 있습니까?”

“아니요. 무서워서 감았어요.”

“잘했습니다. 계속 감고 있어요.”

수아가 계산대 옆에 걸린 앞치마를 떼어냈다. 천이 찢기는 소리에 멀리 있던 변이자 하나가 반응했다. 긁는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한결은 계산대 위를 더듬어 작은 동전 통을 찾았다. 무게를 확인하고 매장 안쪽으로 굴렸다.

— 차르르르.

동전들이 바닥을 흩어졌다. 변이자의 발소리가 그쪽으로 꺾였다.

“지금.”

수아가 앞치마 끈을 지우의 눈에 감았다. 지우는 처음엔 몸부림쳤지만 한결이 손목을 잡아 낮게 말했다.

“풀면 안 됩니다. 안개 빛을 보면 돌아오지 못합니다.”

“전화해야 하는데요.”

“전화를 켜면 빛이 납니다. 소리도 납니다.”

지우가 흐느꼈다.

한결은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살아서 전화해야죠.”

그 말에 지우의 울음이 조금 잦아들었다.

세 사람은 직원 전용 문까지 기어갔다. 수아가 카드키를 꺼내는 동안 한결은 문 아래 틈으로 흐르는 공기를 느꼈다. 매장 쪽보다 탁하고 먼지가 많았다. 대신 바깥빛이 섞이지 않았다.

수아가 카드키를 찍었다.

— 삑.

소리가 너무 크게 울렸다. 세 사람 모두 얼어붙었다.

멀리서 변이자의 웃음이 멈췄다. 한결은 문손잡이를 밀었다. 다행히 잠금장치가 풀린 문은 무거운 신음만 내며 안쪽으로 열렸다.

직원 통로는 매장보다 좁았다. 양쪽 벽이 소리를 눌러 되돌려 보냈다. 바닥은 거칠고 어딘가에서 락스 냄새가 났다. 한결은 유리창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처음으로 폐가 넓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안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통로 깊은 곳에서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누구야. 손 들고 앞으로 와.”

한결은 먼저 발소리를 세었다.

최소 네 명. 그중 한 명은 군화처럼 단단한 밑창을 신고 있었다. 서 있는 자세가 흔들리지 않았다. 나머지 둘은 겁에 질려 발을 비비고 있었고 하나는 긴 물건을 바닥에 세워 쥐고 있었다. 소화기일 수도 있고 청소도구일 수도 있었다.

수아가 작게 말했다.

“박 팀장님….”

박두식.

보안팀장.

“수아냐? 살아 있었군.”

남자의 목소리는 반가움보다 확인에 가까웠다.

“옆에는 누구야.”

“생존자예요. 이분이 저랑 학생을….”

“눈가리개부터 풀어.”

통로가 조용해졌다.

박두식의 말은 명령이었다. 질문도 부탁도 아니었다.

“감염된 놈인지 아닌지 확인해야 하니까.”

한결은 천 너머의 어둠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눈을 뜨면 위험합니다. 안개를 본 사람들이 변했습니다.”

박두식이 짧게 웃었다. 차갑고 납작한 웃음이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앞도 못 보면서.”

한결은 대답 대신 바닥에 무릎을 더 단단히 붙였다. 박두식이 한 발 앞으로 나오자 밑창의 압력이 통로 바닥을 타고 왔다. 크고 무거운 몸. 망설임 없는 보폭. 뒤에 선 사람들은 그가 움직이자 동시에 숨을 죽였다.

지우가 한결의 소매를 잡았다.

“저 아저씨가 셔터 내렸어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그래도 좁은 통로에서는 모두에게 닿았다.

“아까 무전기로 말했어요. 밖이랑 연결됐을 때요. 못 들어오게 막으라고… 안쪽 사람만 살리라고….”

박두식의 숨이 낮게 가라앉았다.

“학생.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지우의 손이 더 세게 떨렸다.

한결은 이제 알았다. 셔터는 우연히 내려간 것이 아닐 수 있다. 누군가 마트 안에서 선택했다. 누가 들어오고 누가 바깥에 남을지 결정한 사람이 있었다.

박두식이 다시 말했다.

“질서가 필요하다. 여기서는 내 지시를 따른다. 눈가리개를 한 놈을 그냥 안쪽으로 들일 수는 없어.”

“눈을 가린 사람보다 눈을 뜨라는 사람이 더 위험합니다.”

한결의 말에 통로 안쪽에서 누군가 숨을 삼켰다.

박두식의 발이 한 번 더 가까워졌다.

“마지막으로 말한다. 풀어.”

매장 쪽에서는 변이자들의 웃음이 다시 가까워지고 있었다. 직원 전용 문은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 문틈으로 비린내와 피 냄새가 흘러들었다.

한결은 수아와 지우를 등 뒤로 밀었다.

“그 명령은 못 따릅니다.”

어둠 속에서 박두식의 숨소리가 굵어졌다.

한결은 자신이 두 종류의 괴물 사이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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