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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 아포칼립스1화

블라인드 아포칼립스

블라인드 아포칼립스

시놉시스

어느 날 전 세계를 덮친 정체불명의 붉은 안개. 그 안개를 본 사람들은 즉시 이성을 잃고 괴물로 변해버린다.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눈을 가린 주인공 '강한결'이 대형 마트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오직 소리에만 의존해 벌이는 처절한 생존 사투극. 보이지 않는 공포 속에서 진짜 괴물은 누구인가.

1화: 붉은 장막의 시작

“정말 괜찮겠어? 혼자서도?”

스마트폰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눅진하게 묻어 있었다. 강한결은 카트의 차가운 금속 손잡이를 잡은 채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마트 입구의 자동문이 열리며 쏟아지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얼굴을 간질였다. 평범한 수요일 오후의 평화로운 공기였다.

“어머니, 저 이제 정말 다 나았다니까요. 시력도 예전처럼 돌아왔고요.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 잘 보이는 것 같아요. 의사 선생님도 일상생활에 아무 지장 없다고 몇 번이나 확인해 주셨잖아요.”

“그래도, 오랫동안 병원에만 있다가 갑자기 그렇게 큰 마트까지 가니까 마음이 안 놓여서 그렇지. 사람이 너무 많은 곳은 늘 조심해라. 요즘 세상이 워낙 흉흉하잖니.”

“걱정 마세요. 금방 장 보고 들어갈게요. 오늘 저녁엔 어머니 좋아하시는 굴비 구워드릴게요. 맛있는 거 해드릴 테니까 기다리고 계세요.”

짧은 통화를 끝내고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은 한결은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마트 특유의 인공적인 향기—서늘한 공기와 뒤섞인 갓 구운 빵 냄새, 신선한 과일의 단내,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만들어내는 활기찬 웅성거림이 한꺼번에 파도처럼 밀려왔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그에게 세상은 오직 '소리'와 '촉각'만으로 이루어진 평면적인 공간이었다. 불의의 사고로 망막을 크게 다쳐 암흑 속에서 지내야 했던 반년. 그 지옥 같은 시간을 견뎌내고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한 지금, 눈앞에 펼쳐진 형형색색의 식재료와 눈부시게 밝은 LED 조명은 그 자체로 눈물겨운 감동이었다. 세상이 이렇게나 선명하고 입체적이었던가. 그는 마치 처음 세상을 보는 아이처럼 마트 구석구석을 눈에 담았다.

‘메가마트 은평점.’

한결은 익숙한 보폭으로 신선식품 코너를 향해 걸었다. 시력을 잃었던 시절, 그는 살아남기 위해 다른 감각을 극한으로 끌어올려야만 했다. 발자국 소리의 간격과 무게만으로 상대방의 체격과 기분을 짐작했고, 미세한 공기의 흐름 변화로 장애물의 위치를 파악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대신 귀와 코, 피부가 그의 새로운 눈이 되어주었다.

시력을 되찾은 지금도 그 예민해진 감각은 여전히 그의 몸속에 깊이 박혀 있었다. 오히려 눈으로 보는 시각 정보와 귀로 듣는 청각 정보가 뇌 속에서 하나로 합쳐지니, 세상이 이전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선명하게 느껴졌다. 저 멀리서 카트를 밀고 오는 아주머니의 구두 소리, 냉장 쇼케이스에서 웅웅거리는 모터 진동 소리, 수박을 두드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노인의 중얼거림까지. 한결에게 마트는 수만 개의 정보가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생태계였다. 그는 이 모든 소음이 반가웠다. 그것은 살아있음의 증거였으니까.

카트에 싱싱한 양파 한 망과 우유, 그리고 약속했던 굴비를 정성스레 담았다. 복귀 기념으로 근사한 저녁 식사를 준비할 생각에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때였다.

— 치익, 치이이익.

마트 천장에 매달린 스피커에서 기분 나쁜 노이즈가 흘러나왔다. 즐겁게 쇼핑을 하던 사람들의 고개가 일제히 천장을 향했다.

“응? 무슨 소리야?”
“방송 사고인가? 귀 아프게 왜 이래.”

사람들의 불평 섞인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하지만 한결의 귀에 들린 것은 단순한 기계적 잡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언가 거대한 것이 대기를 찢으며 몰려오는 소리였다. 마치 수억 마리의 곤충이 일제히 날갯짓을 하는 듯한 소름 끼치는 고음과, 거대한 파도가 육지를 집어삼키기 직전에 내뿜는 묵직한 지진동이 기묘하게 뒤섞인 소리. 피부에 닿는 공기의 압력이 순식간에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마트 입구 쪽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악! 저게 뭐야! 불이야?”
“아니, 안개잖아? 무슨 안개가 저렇게 빨개?”

쇼핑을 하던 사람들이 호기심에 이끌려 입구 쪽 유리창으로 몰려갔다. 한결도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트의 거대한 통유리 너머로,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서울의 하늘은 이미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아니, 빛을 잃었다기보다 기괴한 색으로 덧칠해지고 있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핏물처럼 진하고 걸쭉한 붉은 안개가 해일처럼 도심 전체를 덮치고 있었다. 그것은 바람에 날리는 평범한 기상 현상이 아니었다. 마치 자의식을 가진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고층 빌딩 사이사이를 메우고 도로 위의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안개가 닿는 곳마다 생명의 기운이 희게 탈색되듯 사라지고, 그 자리를 불길한 붉은빛이 채웠다.

“세상에… 저게 대체 뭐야….”

누군가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마치 최면에 걸린 듯 유리창에 바짝 달라붙어 그 장엄하고도 기괴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어떤 이는 스마트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고, 어떤 이는 넋을 놓은 채 아름답다며 찬탄했다. 한결 역시 그 기묘한 아름다움과 압도적인 공포에 사로잡혀 발등에 뿌리가 박힌 듯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평화로운 관찰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한결의 귀가 경련하듯 파르르 떨렸다. 시력을 잃었을 때 터득한 위험 감지 본능이 뇌리에 비상경보를 울리고 있었다.

— 콰앙! 콰광!

유리창 너머, 붉은 안개 속으로 자취를 감췄던 자동차들이 중앙선을 넘어 가로등을 들이받고 보도로 돌진했다. 뒤따르던 차들도 연쇄적으로 추돌하며 불길이 솟구쳤다. 아비규환의 소음이 들려와야 할 타이밍이었지만, 안개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전혀 달랐다.

— 으아아아아아!
— 죽여! 죽여버릴 거야! 다 내 거야!

그것은 고통에 찬 비명이 아니었다. 짐승보다 더 짐승 같은, 날것의 광기에 절여진 포효였다. 환희와 살의가 뒤섞인, 인간의 성대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기괴한 주파수의 소리들.

“어? 김 씨? 왜 그래? 김 씨! 정신 좀 차려봐!”

유리창 바로 앞에서 안개를 신기한 듯 구경하던 마트 보안 요원이 갑자기 바닥을 구르며 발작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손톱이 부러질 정도로 눈을 쥐어뜯으며 괴성을 질렀다. 아니, 그것은 괴성이라기보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광인의 울음소리에 가까웠다.

“하하하! 보여! 드디어 보여!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웠다니! 그동안 나는 장님이었어!”

보안 요원이 고개를 든 순간, 마트 안의 공기는 얼어붙은 듯 정적에 휩싸였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검은 눈동자와 흰자위의 경계는 완전히 무너지고, 창밖의 안개와 똑같은 선명한 핏빛 선혈이 안구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는 옆에서 자신을 걱정스레 살피던 동료의 목덜미를 주저 없이 물어뜯었다.

“커헉! 김 씨, 이 미친…! 아악! 내 눈! 내 눈!”

선혈이 공중으로 튀어 오르고 비릿한 철분 냄새가 매장 안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창밖의 붉은 안개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던 사람들, 그 기괴한 빛을 눈에 담았던 이들이 하나둘씩 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짐승처럼 네 발로 기거나, 관절이 기괴한 각도로 꺾이며 주변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 이성이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타인을 파괴하고 찢어발기려는 원초적인 살의만이 남았다.

“도망쳐! 다들 도망쳐요! 안개를 보면 안 돼! 눈을 가려!”

누군가 뒤늦게 절규하며 외쳤지만, 이미 마트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붉은 빛에 오염된 자들은 가장 가까운 사람의 목을 조르고 눈을 찔렀다. 비명과 쾌락 섞인 웃음소리가 마트의 높은 천장을 때리며 메아리쳤다. 평화롭던 마트는 순식간에 피칠갑이 된 거대한 도살장으로 변모했다.

한결은 뒷걸음질 쳤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

‘안개를 본 사람들은 미친다. 그리고 죽인다.’

명확한 규칙이 뇌리를 스쳤다. 저 붉은 장막이 이 마트 안으로 완전히 스며드는 순간, 이곳에 있는 모두가 저 괴물들처럼 변할 것이다. 살아남으려면, 적어도 나 자신을 유지하려면 선택해야 했다. 시력을 되찾은 기쁨? 그런 건 사치였다. 지금 당장 눈을 버리지 않으면, 영혼을 잃게 될 판이었다.

‘눈을 가려야 해. 보지 않으면 미치지 않아.’

한결은 주저 없이 입고 있던 체크무늬 셔츠의 단추를 뜯어내고 소매를 길게 찢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신의 눈을 몇 겹이나 칭칭 감아 올렸다. 다시 세상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방금 전까지 보았던 그 찬란하고 비극적인 세상이 사라지고, 익숙하지만 훨씬 지독해진 '소리의 세계'가 열렸다. 시력을 포기하자, 감각의 촉수는 더욱 예민하게 뻗어 나갔다.

— 퍽! 으득, 아악!

오른쪽 3미터 지점. 신선식품 코너의 진열대가 무너지는 소리. 누군가 쓰러지는 소리와 바닥을 긁는 날카로운 손톱 소리. 고기가 찢어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왼쪽 10미터 지점. 여러 명의 거친 발소리가 뒤엉키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자의 무거운 발소리와, 그를 즐기듯 뒤쫓는 가벼운 발소리.

한결은 벽면에 몸을 붙이고 숨을 죽였다. 보이지 않으니 오히려 상황이 명확하게 그려졌다. 안개를 본 자들은 시각에 극도로 의존하고 있었다. 그들은 눈앞의 움직임이나 붉은 빛에 반응해 공격 대상을 정했다. 반대로 말하면, 시각적 정보를 차단하고 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그들의 감지 범위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카트를 버렸다. 금속 바퀴가 구르는 소리는 이 정적 속에서 너무나 큰 표적이 될 터였다. 그는 몸을 낮춰 네 발로 기듯 천천히 이동했다. 차가운 마트 타일 바닥의 감촉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한 번이라도 시력을 잃어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침착함이 그의 신경을 타고 흘렀다.

그의 목표는 마트 안쪽, 지하 주차장과 연결된 직원 전용 대형 창고였다. 그곳은 창문이 하나도 없고, 두꺼운 방화셔터로 외부와 완벽히 격리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무엇보다 그곳에는 비축된 식량과 물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가장 안전한 요새.

— 크르르….

바로 옆 진열대 너머에서 거친 들숨과 날숨이 들려왔다. 피비린내가 코끝을 찔렀다. 한결은 그 자리에 박제처럼 굳었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근육 하나하나를 통제했다. 심장 박동 소리가 귓가를 너무 크게 울려, 혹시나 괴물에게 들릴까 봐 두려울 정도였다. 1초가 1년처럼 느껴지는 영겁의 시간.

‘제발… 제발 그냥 지나가라.’

괴물로 변한 누군가가 질척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그의 코앞을 지나갔다. 그가 내뱉는 뜨거운 입김이 한결의 뺨에 닿았다가 사라졌다.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한결은 손톱이 손바닥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마침내 괴물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그는 참았던 숨을 아주 가늘게 내뱉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수라장이 된 매장을 지나 간신히 창고 입구 근처에 다다랐을 때, 한결의 예민한 귀에 아주 미세한 떨림이 걸려들었다.

“살려주세요… 제발… 누가 좀….”

가녀린 여자의 목소리. 식품 창고 안쪽, 냉동 쇼케이스 뒤편 좁은 틈새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한결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지금 누구를 도울 여유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너무나 절박했고, 무엇보다 아직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인간'의 것이었다. 혼자 살아남는 것보다, 동료가 있는 것이 생존 확률을 높여줄지도 모른다는 계산이 찰나의 순간 뇌리를 스쳤다.

— 콰앙!

그때, 매장 입구 쪽에서 거대한 강철 셔터가 내려가는 굉음이 들렸다. 누군가 마트를 외부로부터 완전히 폐쇄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밖의 안개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보호막일지, 아니면 이 핏빛 지옥 속에 우리를 가두는 단두대일지는 알 수 없었다. 외부와의 연결은 완전히 차단되었다. 이제 이 마트라는 공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독자적인 생태계로 변모했다.

한결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소리가 나는 어둠을 향해 손을 뻗었다.

“쉿, 제발 조용히 하세요. 목소리를 내면… 그들이 옵니다.”

보이지 않는 공포가 지배하는 세상. 스스로 눈을 감은 영웅의 처절한 사투가 이제 막 막을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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