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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골목의 골동품 거래상4화

뒷골목의 골동품 거래상

뒷골목의 골동품 거래상

4화: 백억의 종이

새벽 4시 12분.

섀도 엔틱의 방화문 앞에 검은 하드 케이스가 놓였다.

추 실장은 케이스 손잡이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어젯밤보다 더 말끔한 회색 정장이었지만 소매 끝에는 오래된 기름 냄새가 배어 있었다. 태오는 그 냄새를 맡자마자 케이스부터 보지 않았다.

“감정은 한 시간입니다.”

“백사장님은 아침까지 답을 원하십니다.”

“그럼 물건도 아침까지 여기 둡니다.”

추 실장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럴 수는 없죠.”

태오는 방화문 옆 카메라를 가리켰다.

“들어온 시각과 봉인 상태, 들고 나간 시각. 셋 다 남깁니다. 싫으면 다시 가져가십시오.”

상대가 거액을 먼저 말할 때는 물건보다 반응을 사려는 경우가 많았다. 태오가 채권을 보고 놀라는지 문서의 어디를 먼저 만지는지 누구에게 연락하는지. 백사장 쪽은 그 세 가지 중 하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추 실장은 한참 뒤 손잡이를 놓았다.

태오는 케이스의 모서리와 봉인을 차례로 촬영했다. 왁스는 짙은 남색이었다. 눌린 자리에는 세 가닥 선이 서로 감기다 끊기는 모양이 남아 있었다.

검은 승합차 안에서 본 은색 핀과 닮아 있었다.

“이 봉인은 누가 찍었습니까?”

“감정에 필요한 질문입니까?”

“필요합니다.”

“문서가 진짜인지 보시면 됩니다.”

태오는 대답 대신 케이스 표면을 손전등으로 비췄다. 검은 플라스틱의 흠집 사이에 하얀 가루가 끼어 있었다. 냉동창고 바닥의 시멘트 가루보다 입자가 고왔다. 소금기와 방청유가 섞인 보세창고 먼지였다.

“문서만 보는 감정사는 다른 데 많습니다.”

그는 케이스를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감정실의 문이 닫히자 추 실장은 벽 쪽 의자에 앉았다. 태오는 케이스를 작업대 중앙에 올렸다. 남색 봉인을 칼날로 얇게 갈랐다.

안에는 누렇게 바랜 채권 한 장이 투명 필름에 싸여 있었다.

발행 기관은 사라진 동해물류공사였다. 액면 금액은 백억 원. 발행일은 십오 년 전이었다. 보증인란에는 오래전에 죽은 이사들의 서명이 줄지어 있었다.

종이만 보면 그럴듯했다. 오래된 면지의 거친 결도 있었고 가장자리의 누런 변색도 자연스러웠다. 세 번 접었다 펴서 생긴 선까지 정확했다.

하지만 종이에는 오래된 종이가 내지 않는 냄새가 있었다.

태오는 필름을 벗기지 않고 옆면부터 바라봤다. 재단면의 섬유가 지나치게 고르게 일어섰다. 오래 보관된 문서는 습기와 손기름 때문에 가장자리부터 눌린다. 이 채권은 누렇게 늙었지만 종이의 속은 아직 젊었다.

“액면가가 크면 종이도 비싸집니까?”

추 실장이 물었다.

“비싼 종이는 티를 덜 냅니다.”

태오는 자외선 램프를 켰다. 희미한 청색 무늬가 종이 전체에 번졌다. 옛 동해물류공사의 보안지는 자외선 아래에서 붉은 섬유가 짧게 끊겨 보여야 했다. 채권의 숨은 섬유는 길고 곧았다.

그는 확대경을 들고 압인 자리를 살폈다.

“신형 보안지입니다. 적어도 열두 해 안쪽에 만든 종이죠.”

“그걸로 가짜라고 합니까?”

“아직은 아닙니다.”

문장이 찍힌 둥근 자국은 깊이가 일정했다. 손으로 찍은 압인은 가장자리마다 힘이 다르다. 이 문양은 정밀 프레스에서 한 번에 눌렀다.

태오는 작업대 조명을 낮추고 비스듬히 빛을 비췄다. 문장 가장자리에서 지워진 표식 하나가 떠올랐다.

C-31

추 실장의 무릎 위 손가락이 멈췄다.

“채권 번호가 아닙니다.”

태오는 문서를 건드리지 않은 채 사진을 찍었다.

“압인을 찍기 전에 종이 밑에 있던 보관 태그의 자국이죠. 철제 상자에서 오래 눌린 번호입니다.”

“무슨 상자 말입니까?”

“방청유 냄새가 필름과 케이스 안감에 배었습니다. 바닷바람이 드는 창고의 철제 보관함에서 나오는 냄새예요. 문서는 오래된 금고가 아니라 최근까지 항만 쪽 상자에 있었습니다.”

태오는 손끝으로 필름 가장자리를 가리켰다.

“C구역에서 서른한 번째 상자를 쓰는 창고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추 실장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시선이 벽면의 낡은 환풍구로 옮겨 갔다. 태오는 그 짧은 침묵으로 범위를 좁혔다. 모르는 사람은 부정한다. 아는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 말해야 하는지 계산한다.

“동부 쪽이군요.”

추 실장의 시선이 돌아왔다.

“남항은 상자 앞에 동을 붙입니다. 서쪽 물류장은 숫자를 먼저 쓰죠. 그런데 케이스 먼지에는 염분보다 철가루가 많습니다. 동부 보세 4구역.”

추 실장이 아주 낮게 숨을 들이켰다.

태오는 채권의 하단을 다시 비췄다. 수령 기록 옆에 세 줄의 흐린 숫자가 겹쳐 있었다.

3-1-5

그 배열을 보는 순간 양피지의 숫자가 떠올랐다. 익명 계좌 다섯 개를 나누던 순서. 종이 위 숫자 세 개로 같은 돈줄을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우연이라 하기에는 기록 방식이 지나치게 닮아 있었다.

“그래서 진위는?”

추 실장이 재촉했다.

“양식은 위조입니다. 서명도 복제한 잉크입니다. 다만 이걸 만든 사람은 진짜 장부를 봤습니다. 동해물류공사가 망하기 전 쓰던 인장 배열까지 알고 있어요.”

“확실합니까?”

“확실한 건 두 가지입니다. 이건 백억짜리 채권이 아닙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 종이를 백억짜리처럼 믿게 만들 이유가 있습니다.”

추 실장이 처음으로 미소를 지웠다.

“그 이유까지 알아낼 수 있습니까?”

“그건 감정이 아니라 거래입니다.”

태오는 채권 옆에 감정표를 꺼냈다. 위조라고 적을 수도 있었다. 그러면 추 실장은 문서를 회수하고 백사장은 태오가 어디까지 봤는지 계산할 것이다. 반대로 진품이라고 적으면 누군가의 협박 도구에 이름을 빌려주는 셈이었다.

둘 다 값이 쌌다.

“이 종이를 누가 C-31에 넣었는지 알려주십시오. 그러면 왜 백억짜리 거짓말이 필요했는지까지 적어 드리죠.”

“강 사장.”

“감정료는 돈으로 받지 않겠습니다.”

추 실장은 채권을 바라봤다. 그 시선은 태오보다 종이를 더 경계하고 있었다.

“상자는 비어 있습니다.”

“언제 비었습니까?”

“그걸 말할 수는 없죠.”

“비어 있는데도 이 문서를 꺼내 온 이유는 뭡니까?”

추 실장의 입술이 굳었다.

태오는 수령 기록의 숫자를 가리켰다.

“문서를 넣고 뺀 사람이 순서를 적는 버릇이 있군요. 3, 1, 5.”

“그 숫자를 어디서 봤습니까?”

태오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보관 순서가 아닙니다. 돈을 나눈 순서죠. 이건 돈을 받기 위한 채권이 아니라 입을 막기 위한 담보입니다. 누군가가 장부를 쥐고 있다는 걸 보여 주려고 만든 종이예요.”

추 실장은 손목 단말을 켰다. 화면에 표시되지 않은 번호로 통화를 걸었다.

“사장님. 감정 결과가 나왔습니다.”

잠시 후 수화기 너머에서 백사장의 낮은 숨소리가 들렸다.

“강태오 씨가 뭐라고 합니까?”

태오는 단말을 받지 않았다. 추 실장이 스피커를 켰다.

“종이는 새것이고 서명은 죽은 사람 것입니다. 그런데 장부를 본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백사장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럼 값은?”

“종이값은 없습니다. 대신 누군가의 목값은 있겠죠.”

수화기 너머에서 작은 웃음이 흘렀다.

“강 사장님은 물건보다 사람을 비싸게 보시는군요.”

“사람은 거짓말을 합니다. 종이는 거짓말한 손을 남깁니다.”

“감정표는 쓰지 마십시오. 추 실장이 비용을 드릴 겁니다.”

“비용은 받았습니다.”

태오는 C-31이라고 적은 메모를 카운터에 엎어 놓았다.

통화가 끊겼다.

추 실장은 채권을 다시 필름에 넣었다. 그는 봉인을 새로 찍지 않았다. 처음 찍힌 자국을 그대로 가져가려는 사람은 봉인의 주인이 아니라 흔적의 주인이었다.

“스캔본은 지우십시오.”

“원본을 들고 들어온 순간부터 제 감정 기록입니다.”

“그 기록 때문에 가게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밖에 백업해 뒀습니다.”

추 실장은 더 말하지 않았다. 케이스를 든 그는 방화문 앞에서 한 번 멈췄다.

“동부 보세 4구역은 찾아가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상자가 비었다는 말보다 그 경고가 더 비쌉니다.”

추 실장은 답하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오전 6시 3분.

태오는 지하 주차장 기둥 뒤에 서 있었다. 추 실장이 떠난 뒤 십 분도 지나지 않아 검은 모자를 쓴 남자 둘이 내려왔다. 한 명은 빈 케이스를 들었고 다른 한 명은 태오의 손목 단말을 보았다.

“스캔본.”

“없습니다.”

“강 사장. 우리는 상자만 회수하러 온 게 아닙니다.”

태오는 주차장 천장의 낡은 카메라를 올려다봤다.

“여기 들어오기 전에 당신들 얼굴도 밖으로 보냈습니다. 방화문 기록도 같이요.”

남자가 한 걸음 다가왔다.

“누구한테?”

“값을 낼 사람에게.”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태오는 추 실장이 들어온 시각과 케이스 사진을 외부 보관함에 올려 두었다. 아직 누구에게 팔지는 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위험한 증거였다.

케이스를 든 남자가 낮게 말했다.

“그냥 가자.”

둘은 태오를 밀치지 않았다. 밀치는 순간 그들이 회수조라는 사실이 영상에 남는다. 대신 케이스 손잡이를 세게 쥐고 돌아섰다.

태오는 그들이 지나간 바닥을 내려다봤다.

케이스 밑에서 작은 금속 조각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보관 태그의 모서리였다.

C-31 / 동부 보세 4구역

글자 아래에는 세 가닥 선의 반쪽이 찍혀 있었다.

태오는 태그를 주머니에 넣었다.

채권은 백억짜리 종이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버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붙잡은 주소였다.

그 주소를 먼저 사는 쪽이 다음 값을 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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