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골목의 골동품 거래상

5화: 빈 상자의 값
밤 11시 38분.
동부 보세 4구역의 철문은 바다 쪽 바람을 오래 맞아 붉은 녹이 피어 있었다. 철문 위 감시등은 일정한 간격으로 꺼졌다 켜졌다 했다. 불빛이 죽는 짧은 순간마다 컨테이너들이 검은 벽처럼 이어졌다.
강태오는 경비초소 창문을 향해 걸었다. 주머니 안에는 보관 태그의 반쪽이 있었다.
C-31 / 동부 보세 4구역
상자가 비었다는 말은 내용물이 없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누군가가 비웠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태오는 후자의 값이 더 비싸다고 봤다.
초소 안의 남자가 창문을 열었다. 명찰에는 서기철이라고 적혀 있었다. 눈 밑이 푸르게 꺼진 얼굴이었다.
“차량 예약 없이는 못 들어옵니다.”
태오는 대답 대신 태그 조각을 창틀에 올려놓았다.
서기철의 시선이 거기서 멎었다.
“어디서 났습니까?”
“그걸 묻는 사람은 원래 주인이 아닙니다.”
태오는 태그의 절단면을 손톱으로 가리켰다. 금속이 억지로 부러진 자국이 아니라 봉인 고리에 끼웠다가 비틀어 빠진 자국이었다.
“이건 상자를 열기 전에 붙이는 태그가 아닙니다. 연 뒤에 누가 열었는지 남기는 회수 태그죠. C-31은 폐기 서류함으로 등록돼 있는데 굳이 이걸 쓴 이유가 뭡니까?”
서기철은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나가십시오.”
태오는 손목 단말을 켰다. 채권 압인의 확대 사진이 창문 안쪽을 푸른빛으로 물들였다. 지워진 C-31 자국과 세 줄 문양의 일부가 선명했다.
“이건 오늘 새벽에 맡아 본 채권에서 나온 겁니다. 그 문서가 이 구역 상자에 있었다는 뜻이고 이 구역 누군가가 장부 밖 출입을 만들었다는 뜻이기도 하죠.”
“협박합니까?”
“거래합니다. 상자 안을 십 분만 보겠습니다. 사진은 내 감정 기록으로 남기고 당신 이름은 남기지 않겠습니다.”
“그걸로 내가 뭘 얻죠?”
“태그를 잃어버린 쪽이 오면 당신은 오늘 밤 아무것도 못 봤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봤다고 말해도 됩니다. 그쪽은 당신보다 나를 먼저 찾을 테니까.”
서기철은 입술을 깨물었다. 초소 안 대장 화면은 꺼져 있었지만 그의 손은 계속 단말 옆을 맴돌았다. 기록을 지우는 사람은 기록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어느 줄을 지울지 먼저 계산한다.
한참 뒤 그가 초소 뒤편의 좁은 철문을 열었다.
“열두 분입니다. 비상 통로라 정문 기록에는 안 남습니다.”
“본부에는요?”
“문만 열면 남습니다. 그러니 빨리 끝내죠.”
태오는 태그 조각을 주머니에 넣고 안으로 들어갔다.
컨테이너 사이 통로에는 바닷물과 방청유 냄새가 고여 있었다. 적재등이 꺼진 구역의 바닥은 낮에 흘린 물을 아직 말리지 못했다. 서기철은 앞서면서도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C-31은 최근에 몇 번 열렸습니까?”
“세 번입니다. 전부 야간.”
“명부에는?”
“폐기 담당. 이름은 없습니다.”
태오는 걸음을 늦췄다.
“얼굴은 봤습니까?”
서기철이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회색 정장이 하나 있었습니다. 관리복도 안 입고 여기저기 지시만 하던 사람. 오늘 새벽에 밖으로 나간 남자와 비슷했어요.”
추 실장이 직접 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비어 있다고 말한 상자는 아무도 모르는 상자가 아니었다. 태오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C구역 끝의 철제 보관함은 다른 상자보다 낮고 넓었다. 새 번호판을 붙여 놓은 자리는 반짝였지만 잠금장치 주위에는 검은 얼룩이 남아 있었다. 닦아 낸 오일 자국이었다.
“비어 있습니다.”
서기철이 먼저 말했다.
태오는 장갑을 끼고 문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종이 한 장도 없었다. 바닥과 벽면은 천으로 여러 번 닦은 듯 얼룩 없이 말라 있었다. 그러나 금속은 닦는다고 기억까지 지우지 않는다.
태오는 휴대 조명을 바닥 가까이 붙였다. 방청유 막 아래에 둥근 물자국들이 겹쳐 있었다. 종이 상자가 남기는 네모난 눌림이 아니었다. 지름이 좁은 원통 여러 개가 차가운 상태로 놓였다가 사라질 때 생기는 응결 자국이었다.
문턱 틈에는 푸른 유리 섬유 한 가닥이 끼어 있었다. 태오는 핀셋으로 그것을 뽑아 투명 봉투에 넣었다.
“보냉 상자 안감입니다.”
“서류함이라고 했습니다.”
“장부에는 그렇게 적었겠죠.”
태오는 상자 안쪽 벽을 손전등으로 훑었다. 긁힌 선들이 일정한 높이에 나 있었다. 작은 운송 케이스를 넣고 뺄 때마다 모서리가 긁힌 자리였다. 케이스가 상자의 외피가 되고 서류라는 이름이 그 위를 덮었다.
채권은 그 외피를 열 수 있는 협박용 열쇠였을 것이다. 누군가 진짜 장부를 본 흔적을 종이에 남겨 놓았다. 물건이 움직이는 동안에는 누구도 그 상자를 건드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안에 뭐가 있었습니까?”
서기철이 낮게 물었다.
“아직은 모릅니다. 다만 종이는 아닙니다.”
태오는 바닥 나사 네 개를 살폈다. 세 개는 녹이 일정했지만 오른쪽 아래 나사 하나만 머리가 지나치게 깨끗했다. 그는 주머니칼로 페인트를 아주 얇게 긁었다.
철판이 두 겹이었다.
서기철의 단말이 짧게 울렸다.
“뭡니까?”
그가 화면을 들여다보는 순간 얼굴이 굳었다.
“C-31 재개봉 알림입니다.”
“당신이 열었는데요.”
“내 단말은 비상 개방으로 처리됩니다. 그런데 이건 본부 경보예요. 누가 이 상자를 계속 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태오는 마지막 나사를 풀었다. 경보가 울린 이상 남은 시간은 열두 분이 아니었다.
이중 철판 아래에는 얇은 알루미늄 봉인 조각과 젖은 전표 모서리가 눌려 있었다. 태오는 먼저 봉인 조각을 살폈다. 가장자리에 푸른 유리 섬유가 묻어 있었다. 냉매가 든 소형 앰풀 케이스를 묶는 봉인 방식이었다.
그 아래 전표에는 세 줄이 찍혀 있었다.
B-17 / 02:10 / 9-B
태오는 전표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9-B는 끝난 신호가 아니었다. 한 번의 단속이 지나간 뒤에도 누군가는 같은 표기로 다른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B-17이 어느 창고인지는 몰랐다. 그러나 시간은 충분히 구체적이었다.
통로 저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시간 다 됐습니다.”
서기철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두 남자가 적재등 아래로 들어왔다. 검은 작업복 위에 회색 조끼를 걸쳤다. 한 명의 소매 안쪽에는 세 가닥 선이 감긴 문양과 B 자가 붙은 적재 패치가 보였다.
회수조였다. 다만 그들이 문양의 주인인지, 그저 옷을 받아 입은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강 사장. 태그를 주십시오.”
태오는 빈 상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걸 찾으러 여기까지 왔습니까?”
“상자에서 본 것도 잊으십시오.”
“그건 값이 너무 싸군요.”
남자가 한 걸음 다가왔다. 서기철은 뒤로 물러났지만 단말은 손에 쥔 채였다.
태오는 그 단말을 낚아채지 않았다. 대신 카메라 버튼을 눌러 달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상자 안쪽을 찍으십시오.”
“뭡니까?”
“찍으면 알 겁니다.”
서기철은 망설이다가 화면을 들어 올렸다. 빈 상자, 뜯긴 이중 철판, 바닥의 응결 자국이 단말에 남았다. 태오는 카메라 아래의 자동 동기화 표시가 켜지는 것을 확인했다. 관리 단말 사진은 삭제해도 본부 저장소에 전송된다.
“이제 제 기록만 있는 게 아닙니다.”
회수조의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지우라고 해.”
“그가 지우면 야간 개봉 기록도 같이 확인받게 됩니다.”
태오는 서기철을 보며 말했다.
“당신은 내가 들어온 걸 보고했다고 말하면 됩니다. 저 사람들이 뭘 비웠는지는 사진이 말해 줄 테니까.”
서기철은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단말을 내리지도 못했다.
태오는 주머니에서 태그 조각을 꺼냈다. 남자들의 눈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는 조각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금속이 콘크리트를 한 번 튕겼다.
남자가 몸을 숙이는 순간 태오는 통로 밖으로 걸었다. 전표는 신발 밑창 안쪽의 얇은 빈 공간에 넣어 두었다. 태그 하나를 되찾았다고 믿게 하는 편이 지금은 더 쌌다.
뒤에서 누군가 그의 어깨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서기철의 단말이 다시 울렸다. 사진 전송 완료 알림이었다.
손이 멈췄다.
태오는 돌아보지 않았다. 여기서 그를 붙잡으면 빈 상자의 사진과 야간 개봉 기록이 함께 움직인다. 회수조에게도 그건 감당하기 어려운 값이었다.
새벽 1시 6분.
섀도 엔틱으로 돌아온 태오의 단말이 울렸다. 추 실장이었다.
“동부 보세구역에 갔습니까?”
“비어 있던 상자가 꽤 시끄럽더군요.”
“거기서 본 걸 넘기면 출입 기록은 지우겠습니다.”
“기록을 지운다는 말은 기록이 있다는 뜻이군요.”
수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
태오는 전표를 작업대 위에 펴고 사진을 한 장 찍었다. B-17 글자만 남기고 시간과 코드가 적힌 아래쪽은 가렸다. 그는 그 사진을 추 실장에게 보냈다.
“이 정도면 서로 출입 기록을 세는 일은 멈출 수 있겠죠.”
“그건 어디서 났습니까?”
“물건이 아니라 주소입니다.”
“강 사장. 그 주소는 혼자 들고 갈 값이 아닙니다.”
“그러니 팔 때를 고르겠습니다.”
태오는 통화를 끊었다.
전표의 글자가 작업등 아래에서 또렷했다.
B-17 / 02:10 / 9-B
C-31은 빈 상자가 아니었다. 다음 화물에 붙여 둔 문이었다.
태오는 시계를 봤다. 문이 열리기까지 한 시간 남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