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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만 미술품의 잠재 가치가 보인다4화

내 눈에만 미술품의 잠재 가치가 보인다

내 눈에만 미술품의 잠재 가치가 보인다

4화: 가격이 되는 증거

숙소 유리문 너머의 남자는 명함을 내민 채 서 있었다.

서진우는 문을 열지 않았다.

"곤란해진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찾는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누가 찾습니까?"

검은 모자 아래의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름도 회사도 적히지 않은 명함을 유리문 손잡이 위에 올려두고 골목 끝으로 걸어갔다.

"해동여관에 가지 마십시오."

그 말만 남았다.

진우는 남자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가방끈을 쥔 손에는 힘이 들어갔지만 가방 안에는 원본이 없었다.

부산에 원본을 들고 왔다면 이 남자는 경고를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숙소 문부터 열었을 테니까.

마두식이 옆에서 낮게 혀를 찼다.

"내 말이 맞잖소. 그림부터 옮겨야 해."

"원본은 여기 없습니다."

"그놈이 그걸 믿겠어?"

"믿게 만들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보관처를 향해 움직이면 누가 따라붙는지만 알려 주는 셈입니다."

진우는 유리문을 조금 열고 손수건으로 명함 모서리를 집었다. 종이를 가로등 불빛에 비추자 푸른 잉크 얼룩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루페를 댄 순간 성긴 섬유가 보였다. 코팅된 명함지가 아니었다. 습기에 한 번 불었다 마른 한지 조각을 억지로 재단한 종이였다.

왼쪽 아래에는 둥근 도장의 반쪽이 남아 있었다.

미경세탁.

"명함을 새로 만들 형편이 아닌 사람은 아닙니다. 급히 주변에서 종이를 구했거나 일부러 흔적을 남겼습니다."

마두식이 명함을 들여다봤다.

"세탁소 종이로 협박을 한다고?"

"해동여관 근처에서 구한 거라면 세탁소 주인도 그 사람을 봤을 수 있습니다."

"여관에 가지 말랬더니 세탁소부터 찾겠다는 거요?"

"여관에는 안 갑니다. 남이 남긴 흔적을 확인하러 가는 겁니다."

진우는 자료관의 오현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퇴근 직전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신청서는 접수됐습니다. 사본 허가는 보존실 검토가 필요해서 며칠은 걸릴 거예요."

"오늘 제 열람 신청을 외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 신청서와 열람 기록은 내부 절차 외에는 공개되지 않아요."

"그 답이면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진우는 명함을 봉투에 넣었다.

자료관의 신청이 새지 않았다면 남자는 인사동 궤짝을 본 쪽에서 왔을 가능성이 컸다. 원본의 위치를 모르는 상대가 부산의 기록부터 막으려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장님은 역 근처에 계세요. 제가 세탁소에 들어간 뒤 십 분 안에 나오지 않으면 자료관 쪽으로 전화해 오현정 씨에게 제 동선을 남겨 주십시오."

"내가 왜?"

"제가 혼자 들어간 사실과 나오는 시간을 남기는 겁니다. 누가 따라왔다면 사장님은 얼굴을 봐 두실 수 있고요."

마두식은 잠시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끼는 아니고 목격자다 이거지. 말은 잘해."

"원본 얘기는 하지 마십시오."

"그건 나도 알아. 물건 가진 놈이 먼저 흔들리면 값은 남이 정한다며. 내가 했던 말이잖아."

미경세탁은 해동여관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골목 끝에 있었다. 간판의 ‘미’ 자는 떨어져 나갔고 유리문 안에는 다림질판과 비닐 포장지가 어수선하게 쌓여 있었다.

진우가 문을 열자 오래된 비누와 눅눅한 천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카운터 뒤에 앉아 있던 여자는 명함을 보는 순간 얼굴을 굳혔다.

"그거 어디서 났어요?"

"숙소 앞에 누군가 두고 갔습니다. 도장 흔적이 보여서 왔습니다."

"그 사람은 없었어요?"

"아십니까?"

여자는 답하지 않았다. 명함을 낚아채듯 가져가 서랍 안에 넣었다.

"세탁소는 세탁만 해요. 옛날 물건 찾는 데 아닙니다."

진우는 카운터를 넘겨다보지 않았다. 한쪽에 고무줄로 묶인 배달표와 철제 명찰만 눈에 들어왔다.

그중 녹슨 명찰 하나가 푸르게 빛났다.

[대상: 청동 도금 철제 세탁 명찰]

[진위 여부: 진품]

[현재 시세: 3,000원]

[숨겨진 잠재 가치: 1,200,000원]

[핵심 단서: 피란기 공예품전 출품 표식. 김복례 보관표 대조 가능]

진우는 명찰을 가리켰다.

"저건 세탁물 표가 아니군요."

여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고철 조각이죠."

"뒷면에 B-17 같은 번호가 찍혀 있을 겁니다. 방 번호가 아니라 출품 물품 번호에 가까워 보입니다."

그는 뒷면의 문양까지 말하지 않았다. 확인할 수 없는 정보를 먼저 꺼내면 상대는 대화보다 경계를 택한다.

"저는 김복례라는 분의 보관 기록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림을 팔러 온 게 아닙니다. 끊어진 기록이 어디로 갔는지 찾는 중입니다."

"그림?"

여자는 무심코 되물었다가 입술을 다물었다.

진우는 그 짧은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밀어붙이지 않았다.

"오늘 낮에 여관 창고 열쇠를 물은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여자는 창밖으로 시선을 피했다.

"두 명이 왔어요. 열쇠가 어디 있냐고 하더군. 모른다고 했더니 그 명함을 놓고 갔죠."

"김복례 이름은요?"

"안 물었어요. 상자만 찾더군."

여자의 손이 배달표 묶음 위에서 멈췄다. 진우는 손을 뻗지 않았다.

"그 상자가 여기 기록에 있습니까?"

"있어도 못 보여 줘요. 피란민 짐은 주인 못 찾은 게 많아요. 종이 한 장 잘못 나가면 누군가는 자기 물건이라며 들이닥칩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원본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진우는 명함 봉투를 카운터 위에 내려놓았다.

"장부를 맡기거나 사진을 찍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인님이 직접 해당 줄을 펼쳐 주시면 저는 눈으로만 확인하겠습니다. 김복례의 물건이 해동여관에 남았는지 다른 곳으로 갔는지만요. 그 사실은 주인님 허락 없이는 밖에 말하지 않겠습니다."

여자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진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병원 원무과였다.

부친 치료비 납부 기한이 내일까지라는 안내였다. 통화는 짧았지만 화면을 내린 진우의 손가락 끝이 조금 창백해졌다.

당장 돈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누군가의 오래된 장부를 들고 거래할 수는 없었다. 출처를 훔쳐 시작한 값은 언젠가 다시 빼앗긴다.

"급한 돈이 필요한 모양이네."

"그래서 더 기록을 팔 수 없습니다."

"그림이면 큰돈이 될 텐데."

"기록부터 맞지 않으면 그림도 종이일 뿐입니다."

여자는 오래된 다림질판을 바라봤다. 잠시 뒤 서랍 깊숙한 곳에서 얇은 장부 한 권을 꺼냈다.

"할아버지가 남긴 겁니다. 전쟁통에는 여관 방이 비면 짐을 여기로 옮겨 놓기도 했대요. 세탁 맡길 돈도 없는 사람들 짐까지요."

그녀는 장부를 진우에게 건네지 않았다. 직접 페이지를 넘긴 뒤 손가락으로 한 줄을 짚었다.

‘김복례. 종이 꾸러미 둘. 은지 포장 하나. 청우상회 위탁.’

날짜는 1951년 3월 2일이었다.

진우는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자료관 카드보다 보름 뒤의 기록이었다. 은지 포장이라는 표현도 일치했다.

하지만 하단에는 붉은 펜으로 덧쓴 글씨가 있었다.

‘종이 상자 하나만 인계.’

"둘 중 하나만 갔다는 뜻입니까?"

"그때는 짐이 자꾸 바뀌었어요. 묶음 하나를 상자에 옮겼을 수도 있죠."

"청우상회는 어디였습니까?"

"간판은 없어진 지 오래예요. 그 이상의 이야기는 아직 못 해 줍니다."

여자는 단호하게 장부를 덮었다.

진우는 고개를 숙였다.

"이 줄을 보여 주신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제가 확인했다는 사실도 밖에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가 돌아서려 하자 여자가 카운터 위 명찰을 집어 들었다.

"이 고철이 뭔데 그렇게 보던 거예요?"

"제값을 받고 싶으시면 먼저 확인해 보겠습니다. 다만 장부와 세탁소 이름은 거래 자료에 쓰지 않습니다. 주인님이 직접 출처를 설명할 때만 씁니다."

부산역 근처 다방에서 마두식은 차가운 커피를 두 잔이나 비웠다. 진우가 명찰을 꺼내자마자 얼굴을 찌푸렸다.

"이걸로 병원비를 낸다고?"

"고철로 팔면 못 냅니다."

진우는 루페를 댄 채 녹 사이의 문양을 가리켰다. 손바닥을 편 장인이 망치를 든 작은 표식이었다.

"피란기 공예품전의 출품 표식으로 보입니다. 당시 부산에 모인 공방들이 생활 공예품을 전시하고 팔았다는 신문 기사가 남아 있어요. 이 명찰은 출품작에 붙었던 번호표고 세탁소는 남은 물품을 관리하다가 재활용한 겁니다."

"그게 백만 원이 된다고?"

"표식만으로는 안 됩니다. 명찰의 보존 상태와 장부에서 확인된 물품 번호가 맞고 그 시대 공예품을 수집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있지. 물건보다 서류를 더 좋아하는 양반이야."

"세탁소 주인이 직접 장부를 보일 때만 확인시켜 주세요. 장부 사본은 만들지 않고요. 가격도 먼저 말하지 마십시오."

마두식은 명찰을 손바닥에서 굴렸다.

"넌 참 장사를 어렵게 해."

"쉽게 넘기면 다음 물건도 쉽게 빼앗깁니다."

그날 저녁 마두식이 부른 수집가는 명찰을 보자 지갑부터 꺼내지 않았다. 흰 장갑을 끼고 도금층이 벗겨진 가장자리와 녹의 방향을 오래 살폈다.

"이 문양은 ‘부산 피란 공예품전’ 출품표가 맞습니다. 살아남은 번호표는 거의 없어요. 세탁소 장부의 B-17과 연결되면 당시 공방 물류를 보여 주는 자료가 됩니다."

그는 진우를 바라봤다.

"장부를 직접 볼 수 있습니까?"

"세탁소 주인이 허락한 범위에서만요. 장부는 밖으로 가져가지 않습니다."

수집가는 한 번 더 명찰을 뒤집어 보았다.

"그 조건이면 장부 확인 뒤 백이십만 원. 오늘은 계약금 삼십만 원을 드리죠. 장부 내용과 표식이 맞지 않으면 계약금은 포기하겠습니다."

마두식의 눈썹이 꿈틀했다.

진우는 계약서를 받아 들었다. 세탁소 주인의 확인권과 장부 비반출 조항을 직접 적어 넣었다.

수집가는 그 문장을 읽고 피식 웃었다.

"젊은 분이 거래를 아주 어렵게 만드네요."

"기록이 남아야 물건도 남습니다."

계약금 입금 알림이 울리자 진우는 다방 밖으로 나가 병원 원무과 계좌에 송금했다. 삼십만 원은 거대한 숫자가 아니었다.

그래도 내일을 버틸 수 있는 돈이었다.

마두식이 뒤따라 나왔다.

"네 눈은 물건값만 보는 게 아니구먼. 고철 조각에 증거와 사람을 붙여서 돈을 만드잖아."

진우는 조금 전 보았던 푸른 글자를 떠올렸다.

현재 시세 삼천 원.

숨겨진 잠재 가치 백이십만 원.

그 숫자는 미래에 저절로 생기는 돈이 아니었다. 확인할 수 있는 기록과 물건을 이해하는 구매자가 만났을 때 닿을 수 있는 가격이었다.

"잠재 가치는 약속이 아닙니다. 가능한 가격입니다."

"가능한 가격?"

"증거를 갖추고 제값을 아는 사람을 만나면 도달하는 가격이요."

마두식은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그럼 그 그림도 삼십억까지 갈 수 있겠나?"

진우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갈 수 있는 길을 본 것과 그 길을 끝까지 지키는 일은 달랐다.

그때 미경세탁 주인에게서 문자가 왔다.

청우상회는 사라졌지만 같은 자리에 청우운송이 남아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아래에는 한 줄이 더 있었다.

옛 창고 문서함 열쇠를 관리하던 사람이 아직 살아 있대요.

진우는 화면을 내려다봤다.

그림을 찾는 사람들은 해동여관 열쇠부터 물었다.

그는 기록을 찾을 것이다.

기록은 누군가가 지워도 종이와 사람과 물건에 서로 다른 흔적으로 남는다.

골목 건너 공중전화 부스에서 검은 모자 남자가 수화기를 들었다.

그는 짧게 통화를 끝낸 뒤 청우운송이 있는 방향을 한 번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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