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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만 미술품의 잠재 가치가 보인다5화

내 눈에만 미술품의 잠재 가치가 보인다

내 눈에만 미술품의 잠재 가치가 보인다

5화: 상자 하나의 행방

미경세탁의 문을 다시 열었을 때 카운터 위에는 녹슨 철제 명찰과 흰 장갑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수집가는 약속 시간보다 먼저 와 있었다. 그는 명찰을 집지 않고 세탁소 주인에게 먼저 고개를 숙였다.

"장부는 주인님 손에서만 보겠습니다. 사진도 사본도 만들지 않겠습니다."

세탁소 주인은 진우를 한번 보고 장부를 꺼냈다. 어제처럼 그녀는 김복례의 줄을 직접 펼친 뒤 그 옆쪽에 붙은 작은 번호를 가리켰다.

‘B-17.’

수집가는 장갑 낀 손으로 명찰 뒷면을 기울였다. 녹 아래 눌린 숫자가 같은 모양으로 떠올랐다.

"출품표가 맞군요. 공예품전에서 회수된 물품을 세탁소가 보관했다는 기록도 이어집니다."

그는 장부를 오래 보지 않았다. 약속대로 눈으로만 대조한 뒤 페이지가 덮이기를 기다렸다.

"잔금 구십만 원을 드리겠습니다. 장부의 내용을 어디에도 쓰지 않는 조건입니다."

진우는 계약서 끝을 다시 확인했다. 세탁소 주인의 사전 동의 없는 장부 인용 금지와 명찰의 출품 이력은 주인이 직접 밝힐 수 있다는 조항이 그대로였다.

"이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입금 알림이 울리자 마두식이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고철 하나가 백이십만 원이 됐네. 이쯤이면 내 방식도 좀 믿겠소?"

"사장님 방식으로는 장부가 거래 전에 밖으로 나갔을 겁니다."

"그랬겠지. 그래서 내가 돈을 빨리 만진다는 소릴 듣는 거고."

마두식은 웃었지만 진우는 따라 웃지 않았다. 잔금 중 일부는 부친 치료비 계좌로 보냈다. 남은 돈은 드로잉의 종이와 안료를 확인할 비용으로 따로 표시했다.

세탁소 주인이 장부를 서랍에 넣다가 조용히 말했다.

"청우운송 사람한테는 미리 전화해 뒀어요. 다만 어젯밤에도 누가 와서 옛 문서함을 물었다더군요."

마두식의 표정이 굳었다.

"검은 모자였소?"

"얼굴은 못 봤어요. 사장이 문서 같은 건 없다고 돌려보냈대요."

진우는 명찰이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상대가 찾는 것은 그림이 아니라 그림이 지나온 길이었다.

그 길을 먼저 지우면 종이는 다시 출처 없는 종이가 된다.

"문서함이 있다면 오늘 보겠습니다."

"아직 그 사람들 얼굴도 모르잖소."

"그래서 더 늦추면 안 됩니다. 다만 원본 얘기는 하지 마십시오."

청우운송은 부산역 뒤편 화물 골목에 있었다. 새 간판은 달려 있었지만 사무실 벽에는 오래전 상호를 지운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카운터 안쪽의 최병철 사장은 진우가 내민 명함도 받지 않았다.

"옛 장부를 왜 찾습니까. 그걸 들춰서 자기 땅이다 자기 짐이다 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에요."

"소유권을 주장하러 온 게 아닙니다. 1951년 3월 운송 전표 한 장의 행선지만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 확인이 나중에 무슨 소송으로 돌아올지 내가 어떻게 압니까."

마두식이 옆에서 손가락으로 카운터를 두드렸다.

"사장님. 종이 한 장 보여 주는 게 무슨 큰일이라고. 커피값이라도—"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진우의 목소리가 먼저 잘랐다. 마두식이 고개를 돌렸지만 진우는 최병철만 보았다.

"제가 열람 범위를 적겠습니다. 김복례 명의와 1951년 3월 2일 전후 전표만 보겠습니다. 촬영하지 않고 반출하지 않겠습니다. 문서에 적힌 이름과 주소는 사장님 허락 없이는 외부에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가방에서 빈 종이를 꺼내 조건을 적기 시작했다. 수집가와의 계약에서 썼던 문장보다 더 짧고 분명했다.

최병철은 그 글을 읽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까지 한다고 내가 믿을 이유가 있습니까?"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기면 열람 기록과 서명으로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래도 왜 하필 김복례요?"

진우는 잠시 멈췄다. 드로잉이라는 말을 꺼내면 설명은 쉬워진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이곳에도 그림을 찾는 사람이 생긴다.

"피란 시절 종이 보관 기록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맡긴 물건이 둘로 갈렸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최병철은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때 사무실 안쪽 문이 열리며 작은 체구의 노인이 나왔다.

"병철아. 그 문서함 말이냐?"

최병철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박순덕 어르신이 열쇠를 보관하고 계십니다. 예전 창고 정리하실 때부터요."

박순덕은 진우의 확인서를 받아 한 줄씩 읽었다. 손끝은 느렸지만 글자를 놓치지 않았다.

"어제도 남자 둘이 이걸 찾았어. 문서함째 넘기면 돈 준다더구나."

"보여 드렸습니까?"

"내가 왜 남의 기록을 돈 받고 넘겨. 대신 봉인에 손댄 자국이 있더라."

노인은 주머니에서 작은 열쇠를 꺼냈다. 끝에 매달린 낡은 나무표에는 ‘2창고’라고 적혀 있었다.

"기록을 보려면 내 앞에서 봐. 그리고 틀린 건 틀렸다고 적어. 옛날 종이는 사람 기억보다 오래가지만 거짓말까지 고쳐 주지는 않아."

옛 창고는 사무실 뒤 골목 끝에 붙어 있었다. 녹슨 셔터가 올라가자 먼지와 기름 냄새가 밀려 나왔다.

박순덕은 벽장 맨 아래에서 철제 문서함을 꺼냈다. 자물쇠 주변에는 새 흠집이 있었다. 누군가 얇은 도구를 밀어 넣다가 포기한 흔적이었다.

진우는 문서함을 열기 전에 그 흠집부터 살폈다. 어제 숙소 앞에 있던 남자의 명함은 한지로 잘라 만들었다. 이곳의 긁힌 자국은 얇고 단단한 금속이 남긴 것이었다.

둘은 같은 사람일 수도 있었다. 아직 그럴 근거는 없었다.

"여기서부터는 손대지 마세요."

박순덕이 장갑을 끼고 묶음 하나를 꺼냈다. 1951년 3월이라고 적힌 끈이 삭아 있었다.

진우는 루페를 들었다. 종이의 표면이 시야에 들어오자 푸른 글자가 번졌다.

[대상: 청우상회 운송 인계 전표 묶음]

[진위 여부: 진품]

[현재 시세: 45,000원]

[숨겨진 잠재 가치: 240,000,000원]

[핵심 단서: 동래 송정리 폐가 매각인 임시 위탁. 붉은 인계 메모와 수령 서명 대조]

관자놀이가 찌르듯 아팠다. 오래된 종이와 오래된 이름이 한꺼번에 시야를 밀어 올렸다. 이 전표의 가치는 종이값이 아니라 끊긴 출처를 다시 이어 줄 수 있다는 데 있었다.

진우는 루페를 내리고 눈을 감았다.

"괜찮소?"

"잠깐만요."

그는 전표를 손으로 넘기지 않았다. 박순덕이 번호 순서대로 장을 펼칠 때마다 날짜와 품목만 읽었다.

3월 2일. 청우상회 위탁.

종이 꾸러미 둘. 은지 포장 하나.

그 아래 장에서 붉은 글씨가 나왔다.

‘종이 상자 하나. 동래 송정리 폐가 매각인 임시 위탁. 서화 취급 금지.’

수령란의 이름은 물에 번져 절반만 남아 있었다. ‘백…’으로 시작하는 두 글자와 손가락 도장 하나.

"폐가 매각인이 뭐였습니까?"

박순덕은 전표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

"전쟁 끝나고 빈집 정리하던 사람들 말이야. 주인 못 찾은 짐을 처분하기 전에 며칠씩 맡기도 했지. 송정리 쪽에 백씨가 하나 있었는데."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성만 기억나. 그 양반이 그림은 손대지 말라고 유난을 떨었어. 돈 되는 물건이라서가 아니라 종이는 불 붙으면 끝이라고 했지."

진우는 전표의 붉은 메모를 다시 보았다. 잠재 안목이 알려 준 것은 행선지였다. 백씨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와 상자가 그 뒤 어디로 갔는지는 종이가 말해 주지 않았다.

마두식이 숨을 삼켰다.

"동래 송정리면 지금도 동네가 남아 있소. 폐가 매각 기록까지 뒤지면 사람 하나는 나오겠는데."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주소가 나왔는데 왜 멈춰?"

"수령 이름이 불완전합니다. 사진도 없이 기억만 들고 찾아가면 먼저 다녀간 사람에게 정보를 주는 셈입니다."

진우는 확인서 아래에 ‘동래 송정리 폐가 매각인 임시 위탁’과 ‘서화 취급 금지’만 적었다. 정확한 번지와 수령란의 남은 글자는 적지 않았다.

박순덕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종이 지키는 법은 아는 젊은이구나."

창고 밖으로 나오자 검은 승합차 한 대가 골목 입구에 서 있었다.

운전석 옆에서 검은 모자 남자가 내렸다. 그는 진우의 손에 든 확인서를 한번 보고 웃지도 않은 채 말했다.

"찾는 걸 찾으셨습니까?"

마두식이 앞으로 나섰지만 진우가 팔로 막았다.

"누구십니까."

"그 상자에 관심 있는 사람입니다. 종이가 아니라 상자요. 어디로 갔는지만 말해 주시면 서로 피곤할 일이 없습니다."

"상자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계십니까?"

남자의 눈빛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알 필요 없죠. 당신이 알려 주면 되니까."

진우는 확인서를 접어 주머니 안쪽에 넣었다. 남자는 전표를 보지 못했다. 그가 가진 것은 추측과 압박뿐이었다.

"모르시는군요."

"서진우 씨. 병원비는 내일이 기한이라면서요. 상자 하나에 매달릴 형편은 아닌 것 같은데."

마두식의 얼굴이 굳었다.

진우는 숨을 한번 고르고 최병철에게 돌아섰다.

"사장님. 방금 이분이 문서함을 찾았다고 하셨죠. 봉인 훼손 시도와 함께 기록으로 남겨 주십시오. 가능하면 오늘 안에 보존 신고를 하겠습니다."

"지금 나를 신고하겠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문서를 지키자는 겁니다. 이 문서가 없어지면 누가 잃는지 아시는 분이 먼저 움직이고 계시니까요."

최병철은 검은 모자 남자와 진우를 번갈아 보았다. 박순덕은 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단단히 쥐었다.

"창고 자물쇠부터 바꿀 거다. 그리고 열람한 사실도 적어 두지."

남자는 더 말하지 않았다. 승합차 쪽으로 물러나기 전 진우에게 낮게 던졌다.

"종이는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거짓말로 받은 돈도 사람을 살리진 못합니다."

남자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 그러나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승합차가 골목을 빠져나간 뒤에도 마두식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네 병원비를 어떻게 안 거지?"

"제가 알던 사람 중 누군가가 흘렸거나 병원 쪽 기록을 봤을 겁니다. 지금은 어느 쪽도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겁 안 나나?"

진우는 주머니 속 확인서를 만졌다. 얇은 종이 한 장이었지만 그 안에는 누군가가 지우려 한 이름과 장소가 남아 있었다.

"겁납니다. 그래서 원본을 찾기 전에 기록부터 남기는 겁니다."

부산역으로 돌아가는 길에 진우는 오현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청우운송 문서함에서 확인한 범위와 봉인 훼손 흔적만 알렸다. 전표의 정확한 행선지는 말하지 않았다.

"동래 송정리 쪽 폐가 매각 기록은 자료관에 없을 가능성이 큽니다. 구청의 옛 재산대장이나 동네 등기 쪽을 봐야 할 거예요."

"알겠습니다.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록부터 찾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진우는 플랫폼 전광판을 올려다봤다.

종이 상자는 아직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그 상자가 지나간 곳 하나를 찾았다.

누군가는 그 길을 돈으로 지우려 하고 있었다.

진우는 서울로 올라가는 열차표를 예매하지 않았다. 먼저 동래 송정리의 오래된 집기 매각 기록을 확인할 생각이었다.

원본을 숨기는 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사라지기 전에 출처를 남기는 쪽이 다음 단서를 먼저 잡는다.

그때 박순덕에게서 문자 한 통이 왔다.

문서함 바닥에서 떨어진 봉인 종이 조각을 찾았어요. ‘백송…’까지 읽혀요.

진우는 문자 끝을 오래 바라봤다.

백씨의 이름은 아직 반쪽이었다.

하지만 반쪽의 이름도 누군가에게는 지워야 할 증거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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