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카디아의 생계형 해체업자: 귀족의 거래

9화: 귀족의 거래
"젊은 친구,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겠나?"
나직하고 품위 있는 목소리가 지한의 귓가를 두드렸다.
지한은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검은색 고급 비단 코트를 걸치고, 깃에 은색 늑대 문양의 브로치를 단 중년 남성이 서 있었다.
남자의 머리 위에는 노란색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이름이 떠 있었다.
[펠릭스 폰 라인하르트 (Felix von Reinhardt) - Lv.???]
레벨조차 물음표로 표시되는 고레벨의 NPC. 대도시의 고위 귀족이나 중요한 인물임이 틀림없었다. 지한은 경계심을 풀지 않은 채 가방 끈을 고쳐 맸다.
"저에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하하, 경계할 것 없네. 나는 대도시 오르비스에서 상단을 이끌고 있는 펠릭스라고 하네. 방금 자네가 기록관 에드윈에게 제출한 고대 코어를 우연히 보게 되었지."
펠릭스는 지한의 맞은편 의자에 우아하게 앉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코어의 보존 상태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네. 폭주 직전의 코어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적출해 내는 솜씨라니. 내 상단에도 수십 명의 해체 전문가가 있지만, 자네만 한 기량을 가진 자는 단 한 명도 없네."
펠릭스의 눈에 진득한 탐욕과 흥미가 교차했다.
"혹시 자네, 고대의 비전인 '마법 공학 해체사'의 기술을 이어받은 것이 아닌가?"
지한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아르카디아의 뛰어난 인공지능 NPC들은 유저의 클래스 특성을 금세 간파하곤 했다.
"맞습니다. 방금 전직을 마쳤습니다."
"오, 역시!"
펠릭스는 만족스러운 듯 무릎을 탁 쳤다.
"그렇다면 내 은밀하고도 달콤한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 걸세. 최근 우리 라인하르트 백작가에서는 고대 지하 유적을 발굴하는 사업을 진행 중이네. 그곳에서 수많은 '마법 결계 상자'와 '봉인된 고대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
펠릭스가 목소리를 낮추며 지한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하지만 유물에 걸린 고대 봉인이 워낙 까다로워서, 내놓으라 하는 마법사들을 고용해 해제하려 해도 유물이 폭발하거나 내부의 보물이 타버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허다하네. 유적을 발굴해도 건지는 게 반도 안 된단 말이지."
지한은 펠릭스가 원하는 바를 즉각 알아차렸다.
"그 봉인 상자들을 저더러 해체해 달라는 말씀이시군요."
"정확하네! 자네가 가진 그 초정밀 마력 제어력과 해체 기술이라면 유물의 손상을 최소화하며 안전하게 봉인을 풀 수 있을 테니까. 성공할 때마다 유물에서 나온 전리품의 일부를 자네에게 분배함은 물론, 백작가의 기여도와 막대한 골드를 보장하겠네."
펠릭스는 지한의 신뢰를 얻기 위해 품속에서 서류 가방을 열어 두 개의 아이템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우선 자네의 실력을 검증해 보고 싶군. 여기 봉인된 상자와 마법 반지가 있네. 둘 다 고대 유적의 외곽에서 발굴된 마법 등급의 유물들이지. 이걸 억지로 깨뜨리지 않고 해체해 보게."
탁자 위에 놓인 것은 검붉은 사슬이 감긴 [봉인된 낡은 상자]와 미세한 균열 사이로 마력이 불규칙하게 새어 나오는 [금이 간 루비 마력 반지]였다.
지한은 침을 삼키며 마력 반지를 집어 들었다.
그가 반지를 움켜쥐는 순간, 새로 획득한 패시브 스킬 '구조 정밀 투시'가 발동했다.
웅…….
지한의 망막 위에 반지의 입체 구조와 그 내부를 순환하는 푸른색 마력 회로의 흐름이 실시간 도면처럼 뚜렷하게 겹쳐 보였다.
'반지의 표면에 미세한 균열이 가 있어. 그 균열 때문에 마력의 흐름이 한쪽으로 쏠려서 병목 현상이 일어나는군. 이 상태로 힘을 가하면 균열이 터지면서 마력로가 붕괴해 반지는 파괴된다.'
일반 마법사들이 강제로 봉인을 해제하려다 실패하는 원인이 바로 이것이었다.
하지만 지한의 눈에는 마력의 병목을 풀어줄 매듭의 위치가 붉은색 점으로 투시되어 보였다.
"마력 해체."
지한은 해체 키트에서 정밀 핀셋을 꺼내 반지의 균열 틈새로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마치 폭탄을 해체하듯, 호흡을 멈추고 손끝의 미세한 감각에 집중했다. 핀셋 끝으로 엉켜 있는 마력의 흐름선 중 가장 끝부분의 회로 매듭을 톡 건드려 끊어냈다.
파짓-!
반지 주변에 가벼운 마력 스파크가 튀었다. 하지만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병목 현상을 일으키던 마력의 순환 고리가 일순간 느슨해졌다. 지한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뼈칼 끝으로 뒤엉킨 마력로의 접합점을 정확하게 한 획으로 갈라 냈다.
서거걱.
반지 안쪽에서 톱니바퀴가 풀리듯 은은한 백색 광채가 피어오르더니, 반지가 부드럽게 세 개의 빛나는 파편으로 쪼개져 지한의 손바닥 위로 내려앉았다.
띠링!
[스킬 '마력 해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셨습니다.]
[대상의 고유 마력 회로를 손상 없이 완전히 해체했습니다.]
[마력 해체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0% -> 12.5%)]
[획득한 전리품]
- 순수한 마력의 정수 (마법) x 2
- 상급 루비 원석 파편 (상급) x 1
- 고농도 마력 가루 (일반) x 10
"허억……!"
옆에서 숨죽이고 지켜보던 펠릭스가 벌떡 일어섰다.
반지를 깨뜨리지 않고, 그 반지를 구성하고 있던 핵심 부품인 '마력의 정수'와 보석 원석을 최상의 상태로 회수한 것이다. 이것은 유물 복원학이나 연금술의 대가들도 쉽게 흉내 내지 못하는 영역이었다.
"훌륭하군! 정말 대단해! 자네는 진짜 마법 공학 해체사로군!"
펠릭스는 극찬을 아끼지 않으며 지한의 손을 꽉 쥐었다.
"이 계약은 성사되었네. 자네는 라인하르트 백작가의 공식 조력자로 임명될 걸세. 자, 이건 대도시 오르비스로 들어올 수 있는 백작가의 비밀 마차 통행증이네."
[라인하르트 백작가의 조력자 지위를 획득하셨습니다.]
[대도시 오르비스행 '백작가 전용 마차 통행증'을 획득하셨습니다.]
[펠릭스의 우호도가 '신뢰'로 상승했습니다.]
지한은 통행증을 받아 품에 넣었다.
라르크라는 시골 마을을 벗어나, 아르카디아 대륙의 중심부이자 무수한 유적과 고레벨 던전이 있는 대도시 '오르비스'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조만간 대도시에서 유물이 발굴되는 대로 자네에게 연락을 취하겠네. 기대하고 있겠네, 지한 군."
펠릭스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모험가 길드를 떠났다.
지한은 탁자 위의 전리품들을 가방에 담았다.
이제 단순한 시궁쥐 가죽을 벗기던 시절은 끝났다. 그는 세계관을 뒤흔들 수 있는 고대 백작가의 핵심 유물들을 주무르는 특권을 쥐게 되었다.
지한의 눈동자에 새로운 목표가 뚜렷하게 박혔다.
"가자, 오르비스로."
더 넓은 세계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