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카디아의 생계형 해체업자: 영주관의 밀회

58화: 영주관의 밀회
황도로 철수한 줄 알았던 특무 사찰관 엘레나가 오르비스 영주관의 비밀 지하 접견실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블랙 골드 상단이 전멸한 지 정확히 사흘째 되던 날 밤이었다.
“강 특무관, 이 밤중에 급하게 부른 것은 제국 황태자 전하의 직속 비공식 칙령이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엘레나는 로브의 깊은 후드를 벗으며 다소 수척해진, 그러나 여전히 날카롭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로 지한을 응시했다. 그녀의 곁에는 여전히 든든한 황실 근위 기사 두 명이 굳건히 버티고 서 있었다. 접견실 안쪽에서 펠릭스 백작은 잔뜩 긴장한 채 마른침을 삼키며 자리를 지켰다.
“황태자 전하의 칙령이라 하심은, 변경의 일개 특무관인 제가 감당하기에는 다소 무거운 안건이겠군요.”
지한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소파 깊숙이 몸을 묻고 차분히 대꾸했다. 그의 어깨 위 소형 드론 아이리스는 여전히 은밀하게 구동되어 엘레나와 근위 기사들의 호흡 주기와 미세한 마력 파동을 고글 인터페이스로 수신하고 있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말하겠습니다.”
엘레나가 탁자 위에 톱니바퀴 세 가닥이 엇갈린 황금빛 인장이 찍힌 칙령 양피지를 펼쳤다.
“국경선 너머 미개척 지대인 ‘야수들의 계곡’ 깊은 곳에 고대 마도 제국의 비공정(Airship) 격납고가 묻혀 있다는 사실이 황실 정보망에 포착되었습니다. 문제는 2황자 세력이 이미 그 격납고의 진입 루트를 파악하고, 그들이 후원하는 하이랭커 길드 ‘붉은 불꽃’의 정예 사냥대를 파견했다는 점입니다.”
“붉은 불꽃 길드라면…… 제국 상위 20위 내에 드는 거대 레어 사냥 전담 길드군요.”
지한의 옆에서 크리스가 미세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45레벨 이상의 하이랭커 딜러들이 득실거리는, 블랙 골드와는 궤를 달리하는 진짜 전투 집단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비공정의 심장, 즉 영웅 등급 이상의 에너지 조율 장치인 ‘하늘의 동력 엔진 코어’입니다. 만약 2황자파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기동 병기의 핵심 동력원을 손에 넣는다면, 제국의 군수 주도권은 완전히 그들에게 넘어갈 것입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그 격납고에 당신의 아스트라페 길드가 먼저 진입하여 엔진 코어를 회수해 올 것을 밀명하셨습니다.”
엘레나의 설명이 끝나자 지한은 말없이 탁자 위에 놓인 칙령서를 검지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붉은 불꽃 길드를 상대로 변경의 신흥 길드가 목숨을 걸고 유적을 가로채라라…… 이건 단순한 밀명이 아니라 사지로 들어가라는 자살 강요에 가깝군요, 사찰관님.”
“황태자 전하의 명입니다! 성공한다면 황도 내에서의 신분과 막대한 보상이 따를 것임이 보장됩니다.”
엘레나가 언성을 높였지만 지한은 서늘하게 웃어 보였다.
“제게는 황태자파의 모호한 장밋빛 미래보다, 당장 내 손에 쥐어지는 확실한 명세서가 더 중요합니다. 자스민 상단을 통해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선 내 조건들이 완벽히 성사되어야 칙령을 수락하겠습니다.”
“……말해 보십시오.”
엘레나가 이를 지그시 깨물며 물었다.
지한은 손가락 세 개를 차례로 꼽아 보였다.
“첫째, 이번 탐사 과정에서 획득하는 모든 고대 제국의 철강 주괴 및 부서진 기계 부품의 소유권은 100% 아스트라페 길드에 무상으로 귀속됩니다. 둘째, 나와 아스트라페 길드 전원의 제국 동부 국경 장벽 출입 제한령을 영구 해제해 주십시오. 셋째, 황도 마탑에 보관 중인 고대 철공 설계 및 해체 마도서 사본 3권을 아스트라페 길드에 대여해 주셔야겠습니다.”
“미쳤군요! 마탑의 도서 대여는 제국의 국가 기밀법 위반입니다!”
엘레나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지한은 전혀 요동치지 않은 채, 탁자 위에 놓인 전설 등급 뼈칼 [아스트라페 - 리레코드]를 가볍게 툭 만졌다. 푸른 한기가 흘러나오며 탁자의 모서리를 차갑게 동결시키는 시각적인 시위가 이어졌다.
“그럼 붉은 불꽃 길드가 비공정 코어를 들고 황도로 금의환향하여 황태자 전하의 목줄을 죄는 광경을 구경하시면 됩니다. 선택은 사찰관님의 몫이지요.”
엘레나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지한은 이미 단순한 변경의 해체사가 아니었다. 그는 동부 국경 상권을 독점하고 있으며, 블랙 골드 상단을 흔적도 없이 증발시킨 대담함과 황태자파조차 탐내는 압도적인 마도 해체력을 보유한 대체 불가능한 말(馬)이었다. 게다가 2황자파가 격납고를 장악하기 직전인 지금, 그에게는 망설일 시간이 전혀 없었다.
“……좋습니다.”
엘레나가 억눌린 신음 같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품에서 붉은색 서약 양피지를 꺼냈다.
“칙령의 특수 위임 권한으로 당신의 요구를 수락합니다. 서약 마법을 가동하지요. 단, 코어를 제2황자파보다 먼저 선점하지 못한다면, 이 서약은 한순간에 당신들의 목을 죄는 반역죄 서약으로 돌변할 것입니다.”
지한은 엘레나가 건넨 서약서에 자신의 인장을 찍고 손목의 뼈칼을 가볍게 칼집에 넣었다.
[제국 황실 특무 계약 타결!]
- 칙령 퀘스트: ‘야수들의 계곡 - 비공정 격납고 선점’이 가동되었습니다.
- 계약 보상: 국경 영구 프리패스 획득, 황도 마탑 고대 설계도서 3권 대여권 획득, 격납고 내 모든 기계 잔해 소유권 획득.
“거래는 성사되었군요.”
지한은 소파에서 일어나 엘레나를 쳐다보며 담담하게 읊조렸다.
“크리스, 길드원들을 소집해라. 붉은 불꽃 녀석들이 계곡의 돌벽을 허물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하늘의 유산을 해체하러 간다.”
제국 최고의 사냥꾼들이 모인 ‘붉은 불꽃’과의 피할 수 없는 조우.
하지만 지한의 눈가 너머, 고글 인터페이스에는 이미 야수들의 계곡으로 향하는 지형 경로와 최적의 해체 동선들이 드론 아이리스에 의해 한발 빠르게 연동되어 펼쳐지고 있었다. 제2막 하늘을 향한 진격의 종소리가, 오르비스 영주관의 차가운 지하실에서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