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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카디아의 생계형 해체업자53화

아르카디아의 생계형 해체업자: 거래의 명세서

아르카디아의 생계형 해체업자

53화: 거래의 명세서

현실의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한 대형 종합 병원의 1인 VIP 병실.

지한은 캡슐에서 나와 땀을 씻어낸 뒤 병실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하얗고 마른 팔에 링거를 꽂은 채 곤히 잠들어 있는 여동생 지수의 얼굴은, 이전의 핏기 없던 잿빛 피부와 달리 은은한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오빠 왔어……?”

지수가 피곤한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지한을 바라보았다. 지한은 여동생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응. 의사 선생님이 다음 달부터는 통원 치료도 가능할 정도로 수치가 좋아졌대. 걱정하지 마. 병원비나 약값은 오빠가 평생 낼 수 있으니까, 너는 건강해질 생각만 해.”

“응…… 고마워, 오빠.”

지수가 다시 눈을 감고 편안한 호흡 속으로 빠져들었다.
병실을 나온 지한은 병원 로비에서 스마트폰을 켜 은행 애플리케이션을 확인했다.

[출금 가능 잔액: 87,450,000원]

매달 지옥처럼 날아오던 연체 독촉장도, 사채업자들의 험악한 전화도 이제는 전설 같은 과거가 되었다. 아르카디아에서 벌어들인 골드를 환전해 현실의 빚 수억 원을 모두 상환하고도 여동생의 VIP 병원비와 여유 자금이 통장에 든든히 박혀 있었다.

‘이제부터 버는 돈은 전부 나의 온전한 미래가 된다.’

지한은 차가운 결의를 다지며 다시 캡슐방으로 향했다. 게임으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벼랑 끝의 밑바닥 유저 강지한은, 이제 가상 세계 아르카디아 대륙에서 제국 전체의 판도를 쥐락펴락할 비즈니스의 제왕으로 거듭날 참이었다.

다시 접속한 아르카디아, 지하 철혈 기지.
발전실과 가마가 완전 복구되자 기지 전체가 웅장한 진동과 함께 거대한 기계음들을 뿜어내고 있었다.

“지한 형님, 황도에서 파견된 대형 상단인 ‘자스민 상회’의 동부 행수 루완이 오르비스 지부에 도착해 접견을 청했습니다. 그들이 우리 길드가 채굴하는 그레이 아이언 관련 부품들의 샘플을 보고 크게 흔들린 모양입니다.”

크리스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보고를 올렸다.

“예상보다 반응이 빠르군. 루완을 지하 철혈 기지가 아닌, 오르비스 시내의 아스트라페 길드 비밀 접견실로 안내해라.”

“네, 형님.”

오르비스 남쪽 상업 지구에 비밀리에 마련된 아스트라페 길드의 귀빈실.
고급스러운 벨벳 소파에 앉아 있던 자스민 상회의 동부 행수 루완(Lv.35)은, 탁자 위에 놓인 작은 목재 상자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자스민 상회 동부 행수 - 루완 (Lv.35) - 책사]

지한이 문을 열고 들어가 마주 앉자, 루완이 굳어 있던 표정을 거두고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강 특무관님. 자스민 상회의 동부 비즈니스를 조율하는 루완입니다. 골드 스파이더 상회가 몰락한 틈을 타 이 척박한 오르비스 상권을 이토록 정갈하게 독점 재편하시다니, 참으로 감탄스럽습니다.”

“인사는 접어두지요, 루완 행수님.”

지한은 곧장 탁자 위의 목재 상자를 툭 밀어 루완 앞으로 보냈다.

“저희 아스트라페 상단이 자스민 상회와 거래하고자 하는 명세서와 샘플입니다. 확인해 보시지요.”

루완이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은백색의 정교한 톱니바퀴 모터와 푸른빛 마력이 실시간으로 흐르는 미세 마도 배선 뭉치가 단정하게 정렬되어 있었다.

[샘플 장비:]

루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제국 3대 상회의 동부 행수로서 수많은 마도 장비와 무기들을 보아왔지만, 이토록 결점이 없고 미세 공정이 정교한 부품들은 황도 마탑의 마스터들이 수작업으로 빚어낸 최고급 예술품에서나 간혹 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 이것은…… 황도 마탑의 상급 공방에서나 소량 생산되는 영웅 등급 장비의 핵심 조립 부품들이 아닙니까? 게다가 이 그레이 아이언 광석의 밀도는 제국 표준 규격을 훨씬 상회하는군요. 대체 이 부품들을 어디서 확보하신 겁니까?”

루완의 이마에 미세한 식은땀이 흘렀다. 오르비스 백작가의 일반 광산에서는 절대로 이런 하이테크급 부품이 생산될 리 없었다.

지한은 느긋하게 홍차를 한 모금 마시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출처를 묻는 것은 자스민 상회의 상도덕에 어긋나는 일일 텐데요, 루완 행수님. 중요한 것은, 저희 아스트라페가 매주 이러한 정밀 마도 부품을 최소 100세트 이상 독점으로 공급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매주 100세트나 말이옵니까?!”

루완이 소파에서 엉덩이를 반쯤 떼며 경악했다.
이 정도 물량이라면 황도의 상급 대장장이들과 마도 학자들에게 부르는 게 값으로 유통될 수 있었다. 자스민 상회가 황도의 경매장을 통해 이 물건들을 우회 공급하기 시작하면, 경쟁 상단들을 짓밟고 제국 제일 상단으로 치고 나갈 막대한 캐시카우(Cash Cow)를 확보하는 셈이었다.

“단, 저희가 제시하는 명세서의 가격은 시장가보다 다소 저렴한 수준입니다. 대신 조건이 있지요.”

지한의 포커페이스 너머로 루완을 압도하는 서늘한 거래의 올가미가 던져졌다.

“자스민 상회는 이 물건들을 황도 유통망에 태울 때, 아스트라페 길드의 출처를 철저하게 세탁하셔야 합니다. 아울러 황도 내부에서 돌아가는 태양의 마탑 사찰 정보와 제국 황태자파 고위 귀족들의 군수 물자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매주 저희 길드에 공유해 주셔야겠습니다.”

루완은 마른침을 삼키며 머릿속으로 빠르게 주판알을 튕겼다.
부품 출처를 세탁하고 황도의 내부 정보망 일부를 흘려주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독점으로 들어오는 영웅 등급 부품의 유통 수익은 가히 천문학적이었다. 거절하기에는 너무나 달콤한 악마의 명세서였다.

“……좋습니다, 강 특무관님. 자스민 상회는 오직 이익의 흐름만을 따를 뿐입니다. 당신의 든든한 황도 유통망이자 귀와 눈이 되어 드리지요.”

루완이 굳은 악수를 청해왔다.

[비즈니스 대형 계약 체결!]

지한은 루완의 손을 잡으며 미소를 감추었다.
이제 황도의 사냥개 엘레나가 눈에 불을 켜고 뒷조사를 감행하더라도, 황도 내부의 권력 지도와 마탑의 정보가 자스민 상단을 통해 지한의 손끝으로 먼저 흘러들어올 터였다. 모든 정보와 물류의 덫을 사전에 통제하며, 지한은 비즈니스의 밑바닥에서부터 제국의 경제 혈맥을 서서히 조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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