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카디아의 생계형 해체업자: 섀도우 마켓

12화: 섀도우 마켓
어둠이 내린 대도시 오르비스의 밤거리는 낮의 활기참과는 또 다른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지한은 펠릭스가 건네준 검은색 초대장을 주머니에 넣은 채,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골목길 깊은 곳으로 향했다. 오르비스의 지하 하수도와 버려진 옛 수로가 연결되는 후미진 입구. 그곳에 섀도우 마켓의 관문이 숨겨져 있었다.
쇠창살이 굳게 닫힌 입구 앞에는 흑색 가죽 갑옷을 입은 거구의 경비병 둘이 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허가되지 않은 자는 돌아가라."
지한은 말없이 주머니에서 검은 카드를 꺼내 보였다.
카드 표면에 새겨진 라인하르트 백작가의 늑대 문양이 보랏빛으로 흐릿하게 빛나자, 경비병들의 안광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들은 황급히 허리를 굽히며 철문을 열었다.
"백작가의 귀빈이시군요.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철문 너머의 어두운 통로를 지나자, 이윽고 믿기 힘든 지하 광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사방을 메운 보라색 마법 가스등 아래로, 온갖 기괴한 가면을 쓴 암상인들과 후드를 깊게 눌러쓴 유저들이 은밀하게 속삭이고 있었다.
지하 섀도우 마켓(Shadow Market).
그곳은 아르카디아 대륙의 공식 법률이 미치지 않는 치외법권 구역이었다. 도난당한 장비, 금지된 연금술 독약, 출처를 알 수 없는 저주받은 고대 유물들이 붉은 조명 아래 널브러져 거래되고 있었다.
지한은 가면 상인에게서 산 가죽 가면을 얼굴에 쓴 채 천천히 매대 사이를 걸었다.
그의 눈앞에서 '구조 정밀 투시' 스킬이 켜져 오물 묻은 아이템들의 본래 수치들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대부분 허접한 잡동사니들이군. 사기꾼들이 판을 치는 곳이야.'
유저들을 등쳐먹기 위해 미감정 유물이라 속여 파는 쓰레기 아이템들이 대부분이었다.
지한이 흥미를 잃고 지나치려 할 때, 광장 한구석에 위치한 늙은 인간 상인의 허름한 매대 앞에서 걸음이 멈추었다.
매대 위에는 녹슨 구리와 검은색 사념이 서려 있는 작은 기계 상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오염된 마법 공학 태엽 상자]
- 등급: 미감정 (저주)
- 설명: 고대 드워프 도시의 잔해에서 발굴된 기계 상자입니다. 원혼들의 강렬한 저주가 깃들어 있어 감정 주문을 걸거나 억지로 열려 할 경우, 지능 및 마력 수치가 영구적으로 3씩 감소합니다.
- 가격: 50 실버
지능과 마력의 영구 감소.
마법사나 사제 계열의 유저들에게는 영구적 불구가 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무시무시한 저주 페널티였다. 이 때문에 수많은 바이어들이 군침만 흘릴 뿐, 상자를 사려 하지 않고 지나치고 있었다. 상인 역시 처치 곤란한 쓰레기라 판단했는지 단돈 50실버라는 떨이 가격에 내놓은 터였다.
지한은 가만히 상자를 향해 '구조 정밀 투시'를 집중했다.
에메랄드 브로치를 장착해 마력 정밀도가 10% 상승한 덕분에, 상자 내부 깊숙한 곳의 투시 해상도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스으으으…….
검은 안개로 가득 찬 상자 내부. 기괴하게 뒤틀린 원혼들의 사념 도선들이 붉은 자폭 스위치와 얽혀 있었다.
하지만 지한의 시선은 그 사념의 틈새 한가운데에서, 숨이 턱 막힐 정도로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눈부신 금빛 기어 뭉치에 고정되었다.
'이건…… 태엽이 아니야.'
그것은 찬란한 금빛 루프를 그리며 살아있는 것처럼 자전하고 있는 고대 드워프의 영혼 장치였다.
[고대 드워프의 영혼 태엽 (영웅)]
- 등급: 영웅 (Heroic)
- 설명: 드워프 대장장이들의 영혼 마력이 깃든 최상급 기계 장치 부품입니다. 고대 영웅 등급의 마법 공학 장비를 제작하거나 조율할 때 필수적으로 들어갑니다.
영웅(Heroic) 등급!
아르카디아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랭커급 공성 병기나 신화적 유물을 제작할 때나 들어가는 극희귀 등급의 부품이었다. 경매장 가치로 따지면 최소 수십 골드는 물론, 부르는 게 값인 초고가 보물이었다.
지한은 겉으로 표정을 싹 지운 채 주머니에서 은화 50개를 꺼내 탁자 위에 얹었다.
"이 상자, 제가 사겠습니다."
늙은 암상인이 지한의 가면을 뚫어지게 보더니 비열한 웃음을 흘렸다.
"힉힉! 젊은이, 돈이 남아도는 모양이군. 저주 페널티를 우습게 보다간 뇌가 타버릴 텐데? 환불은 절대 안 되네!"
"상관없습니다."
지한은 상자를 가방에 쓸어 담고 곧장 섀도우 마켓 뒤쪽에 마련된 개인 전용 해체실로 향했다. 1실버를 내면 외부의 방해를 받지 않고 아이템을 분해할 수 있는 밀폐된 방이었다.
철컥.
무거운 철문이 닫히고 지한은 방 한가운데의 해체용 석조 테이블 위에 오염된 태엽 상자를 올려놓았다.
"후우……."
그는 심호흡을 하며 은빛 핀셋과 뼈칼을 꺼내 쥐었다.
이 상자를 해체하려면 단순히 마력 도선을 끊는 것을 넘어, 유저의 뇌파를 직접 자극해 강렬한 정신 충격을 주는 '저주 사념'을 해제해야 했다.
"마력 해체."
스으으으-!
지한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순수한 푸른빛 마력이 상자의 표면을 감싸 쥐었다.
그와 동시에, 상자 틈새로 검은 안개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지한의 손목을 칭칭 감아 올렸다.
크아아아악-!
머릿속을 쇠송곳으로 후벼 파는 듯한 끔찍한 극통이 지한의 뇌를 때렸다.
동조율 99%의 환경이 선사하는 리얼한 저주의 고통이었다. 시야가 붉게 물들고 강렬한 현기증이 일어나 다리가 후들거렸다. 당장이라도 스킬을 취소하고 도망치고 싶은 본능이 그를 채찍질했다.
하지만 지한은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입술이 터져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이 정도 아픔은…… 옥탑방에서 매일 독촉장에 짓눌리며 숨이 막히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현실의 처절한 빚쟁이 삶이 그를 독하게 단련시켜 두었다.
지한은 정신을 집중했다. 에메랄드 브로치가 은은한 진동을 내뿜으며 그의 뇌파를 안정시켰다.
'저주 회로의 핵은 상자 중앙의 우는 해골 문양 기어다. 저 기어의 세 번째 톱니 결합을 풀고, 어둠의 마력 선을 끊는다!'
지한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드워프제 핀셋 끝날이 검은 안개를 뚫고 들어가, 해골 기어의 중심 축에 있는 고대 잠금 핀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뼈칼 날로 저주의 핵인 사념 도선을 단칼에 베어 넘겼다.
서거억-!
"끼에에에에엑-!"
원혼들의 해골 비명 같은 고주파의 소음이 해체실 전체를 뒤흔들었다. 검은 안개가 공중에서 미친 듯이 팽창하다가, 이내 지한의 마력 해체 스킬의 은은한 광채에 녹아내리듯 스러져 갔다.
투둑, 철커덕!
상자의 굳게 잠겨 있던 검은 외벽이 부서지듯 조각나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동시에, 먼지 가득한 고철 껍데기 사이에서 허공을 향해 찬란하고 웅장한 황금빛 오라가 뿜어져 나왔다.
오오오오옹-!
영롱한 기계 태엽의 마찰음과 함께, 스스로 정밀하게 회전하고 있는 눈부신 금빛의 [고대 드워프의 영혼 태엽]이 마침내 지한의 손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지하 암시장의 좁은 해체실 안이, 황금색 찬란한 영웅의 광채로 가득 채워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