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카디아의 생계형 해체업자: 백작의 밀실과 피의 동맹

100화: 백작의 밀실과 피의 동맹
황성 루테시아의 서쪽, 짙은 밤안개 속에 묻혀 있는 웰링턴 백작가의 비밀 별장 상공.
알바트로스는 엔진의 은청색 마력 빛을 극한으로 죽인 채 요새의 선체를 별장 뒤편의 가파른 절벽 선착장에 밀착시켰다.
스아아아아-.
고요한 정적을 뚫고 웰링턴 백작의 친위 마법사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으나, 알바트로스의 선체에서 뻗어 나온 그림자 탑승교를 따라 내려서는 지한의 발걸음 소리는 그 누구도 감지하지 못했다.
지한은 검은 코트깃을 세우고, 크리스를 대동한 채 별장의 화려한 대리석 나선 계단을 올라 깊숙한 밀실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웰링턴 백작가가 자랑하는 첩보 보좌관 루카스가 이미 대기하고 있었고, 방 한가운데의 무거운 흑요석 탁자 너머에는 은빛 콧수염을 기른 중후한 노신사가 엄숙한 표정으로 지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태자파의 기둥이자 제국 군수처의 총책임자, 웰링턴 백작이었다.
“어서 오게, 아스트라페의 젊은 지배자여.”
웰링턴 백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한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의 손길은 노련한 정치가의 그것이었으나, 지한의 의수와 맞닿는 순간 백작의 미세한 맥박이 가늘게 떨렸다. 이미 루카스로부터 프로기아 강철 독의 '초토화 보고'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리라.
지한은 백작의 맞은편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다리를 꼬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백작님. 2황자파 플로렌 후작이 황태자파의 보급선을 침몰시키기 위해 프로기아 강철 독에 배치했던 사설 비공정 5척은 이제 존재하지 않습니다.”
백작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루카스의 보고를 들었네. 단 몇 분 만에 요새 알바트로스의 마도 주포 포격으로 대공 방벽을 파괴하고, 그 안에 쌓여 있던 수만 톤의 철강과 비공정의 심장들을 통째로 뜯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더군. 그것이 진정 스캐벤저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인가?”
지한은 가볍게 웃었다.
“단순한 해체가 아닙니다. 저는 만물의 구조적 결함을 짚어내고, 그것을 최상의 부품으로 가공하는 '마도 철혈 해체사'니까요. 그들이 모아둔 고대 발리스타 마도 도식과 화염석 주괴들 역시 제 요새에 아주 훌륭한 양분이 되었습니다.”
웰링턴 백작은 지한의 거침없는 태도에 헛기침을 하며 옷자락을 매만졌다.
“크흠. 어찌 됐든 덕분에 내일 밤 도착할 예정이던 우리 황태자파의 마도 보급선단은 아무런 방해 없이 황성 포트에 안착할 수 있게 되었네. 2황자파의 손발을 완전히 꺾어준 공로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지.”
백작은 탁자 위의 룬 장식 상자를 열어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양피지 서류 세 장을 지한의 앞에 올려놓았다.
[제국 황실 군수처 공식 계약서]
- 권한 1: 아스트라페 콘체른의 '제국 공인 1등급 군수 조달관' 공식 임명.
- 권한 2: 황도 루테시아 내의 웰링턴 백작 세력 하에 있는 모든 고대 전적지 및 침식 던전 유물의 '독점 해체 및 회수권' 보장.
- 권한 3: 태양의 마탑과의 비공개 영웅 등급 마도 부품 납품 시, 황실 중간 수수료 100% 면제.
“이것이 내가 자네에게 약속했던 연합의 징표이자 동맹 서약서네. 황태자 전하께서도 자네의 아스트라페 콘체른이 제국의 군수 주도권을 쥐는 것에 흔쾌히 동의하셨네.”
백작의 목소리에 무게가 실렸다.
지한은 양피지를 들어 올렸다.
[마법 공학 감지 고글]의 스캔 렌즈가 인장 마법에 숨겨진 어떠한 이중 서약 룬이나 덫이 없는지 꼼꼼하게 살폈다.
[황실 양피지 검수 완료]
- 숨겨진 제약 조건 없음. 100% 안전한 계약 서약서입니다.
- 계약 체결 시 아스트라페의 주간 순수익이 추가로 800골드 상승합니다.
- 황도 내 고대 유물 해체 퀘스트 라인이 개방됩니다.
지한은 펜을 들어 자신의 마력 인장을 계약서 하단에 단호하게 새겨 넣었다.
화르륵-!
양피지가 푸른 인장 불꽃을 뿜어내며 동맹의 성립을 대기 중에 공표했다.
“좋습니다. 아스트라페는 약속대로 황태자파의 비공정단 전체의 영웅 등급 장갑판과 추진기 튜닝을 도맡아 진행하겠습니다. 2황자파가 어떤 고성능 비공정단을 끌고 오든, 우리 아스트라페의 해체 영역 앞에서는 고철 덩어리에 불과할 겁니다.”
“든든하군, 강 회주. 아, 그리고 한 가지 귀띔해 줄 정보가 있네.”
웰링턴 백작이 목소리를 낮추며 지한에게 작은 수정 홀로그램 칩을 밀어 보냈다.
“태양의 마탑에서 최근 지하 7층의 금단 구역에서 발굴한 고대 제국의 '공중 부유 대포탑'의 마력 코어를 해체할 기술자를 찾고 있네. 마탑의 장로들조차 해독하지 못해 골머리를 썩고 있지. 만약 자네가 그것을 완벽하게 분해해 준다면, 마탑의 비장고에 숨겨진 고대 마도 도식들을 통째로 엿볼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걸세.”
지한의 두 눈이 번뜩였다.
“공중 부유 대포탑이라… 알바트로스의 전면 화력을 완성할 마지막 퍼즐 조각이 마탑의 지하에 잠들어 있었군요.”
지한은 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즉시 마탑과 조율해 주십시오. 썩어빠진 장로들이 건드리지 못하는 고대의 봉인, 제 뼈칼로 흔적도 없이 갈라내어 해체해 드리겠습니다.”
백작과의 밀실 회동을 마치고 웰링턴 별장의 옥상 선착장으로 나선 지한의 등 뒤로, 황태자파의 정예 기사들이 그에게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변경의 이름 없는 스캐벤저였던 청년 강지한.
이제 그는 제국의 권력 구도를 좌지우지하는 황태자파의 절대적인 독점 조달관이자, 황성 루테시아의 밤하늘을 조용히 지배하는 천공의 동맹자로서 당당히 그 거대한 발걸음을 황도 깊숙이 내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