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의 만능 보급상인

86화: 뱀들의 방문
대아 자유무역 자치구의 선포식이 성황리에 끝난 지 사흘째 되던 날, 남북을 잇는 지하 5호선 교역 열차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대아 요새 승강장으로 정차했다.
평소처럼 마정석과 무기 원자재를 실어 나르는 수송칸 뒤로, 문명 시대의 고위 관료들이 탈 법한 세련되게 리모델링된 전용 여객 차량 한 칸이 연결되어 있었다.
치이이익-.
열차 문이 열리며 제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사내들이 플랫폼으로 내려섰다.
선두에 선 인물은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에 차가운 은테 안경을 쓴 사내였다. 네오 코리아 기획처장, 서준우였다. 그의 뒤로는 정부 행정 감사 요원이라는 명찰을 단 사내 열 명 남짓이 서 있었는데, 묘하게도 그들의 걸음걸이와 단단한 체구는 행정 요원이라기보다는 잘 훈련된 특수 요원의 그것에 가까웠다.
강진은 승강장 2층 난간에 기댄 채,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조용히 관찰했다.
‘감사 요원을 빙자한 특무 요원들이군. 생각보다 뱀들의 움직임이 빠르다.’
강진은 소매를 털며 계단을 내려가 서준우 일행을 맞이했다.
서준우는 요새의 웅장한 방어벽과 번쩍이는 무기들로 무장한 대원들을 거만하게 훑어본 뒤, 강진을 향해 예의 없는 가벼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한강진 대장님. 네오 코리아 기획처장 서준우라고 합니다. 자치구 선포 축하드립니다. 다만, 대아 자치구가 정부의 정식 승인을 받은 이상, 행정적 절차와 국가 자원의 효율적 관리를 위해 국가 재건 비상조치법에 따른 행정 감사를 시작해야 할 것 같군요.”
서준우는 품에서 직인이 찍힌 두꺼운 붉은색 서류 봉투를 꺼내 강진에게 들이밀었다.
강진은 봉투를 열어 서류의 내용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내용의 핵심은 명확했다.
[국가 재건 비상조치법 제14조에 의거, 대아 자치구가 소유한 모든 특수 보급 장비의 도면과 합성 마도 기술 데이터를 국가 과학원에 양도할 것. 또한, 자치구에서 거래되는 모든 보급 물자의 유통권 및 가격 책정권을 국가 행정 감사위원회의 통제하에 둘 것.]
강진의 입가에 얇은 실소가 걸렸다.
“서 처장님, 이 종이 조각이 지금 이 아비규환인 세상에서 무슨 가치가 있다고 보십니까?”
서준우는 안경테를 치켜올리며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국가의 법령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망했어도 정부의 법과 권위는 유효합니다. 자네가 독점하고 있는 장비와 식량 공급력은 국가의 안보에 직결되는 사안이기에, 일개 개인이 멋대로 소유하고 통제할 수 없습니다. 양도 절차에 협조하지 않을 시, 국가 자원 횡령 및 반역 행위로 간주하여 네오 코리아와의 모든 교역이 영구 중단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서준우의 어조에는 오만한 문명 잔존자 특유의 선민의식이 가득 차 있었다. 지하 깊은 곳에 틀어박혀 아직도 자신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지배층이라 착각하는 자들의 흔한 망상이었다.
강진은 대답 대신 서류 봉투를 두 손으로 잡고 사정없이 찢어 발겼다.
직인이 찍힌 붉은색 종이 조각들이 승강장 바닥으로 허망하게 흩어졌다.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서준우의 안색이 순식간에 붉게 가라앉았다. 뒤에 서 있던 감사 요원들의 손이 자연스럽게 품속의 은밀한 무장으로 향했다.
강진은 그들을 차갑게 쳐다보며 경고했다.
“네오 코리아 본국 방공호의 비상 배터리와 정밀 부품이 당장 누구 덕에 수급되고 있는지 잊으신 모양이군요. 당신들이 자랑하는 그 위대한 정부는 지금 굶주린 시민들의 폭동을 두려워해 대아 자치구의 식량을 구걸하고 있는 처지 아닙니까? 어디서 뻔뻔하게 주인 행세를 하려 듭니까?”
강진은 벼락의 도끼를 땅바닥에 쿵 소리가 나게 내리찍었다.
쿠우웅-!
도끼날에서 뿜어져 나온 황금빛 전류 아크가 승강장의 철제 바닥을 따라 치이익 소리를 내며 서준우의 발밑까지 흘러갔다. 감사 요원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서 처장. 그리고 그 뒤의 특무 요원들. 당신들의 머무를 공간은 요새 외곽의 지정된 게스트 하우스로 제한합니다. 그 선을 넘는 순간, 저는 네오 코리아와의 교역을 즉시 중단하고 침입자들을 전원 사살할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강진은 차갑게 등을 돌려 사령실로 향했다.
서준우는 수치심과 분노로 몸을 바르르 떨었지만, 강진을 둘러싼 대아 수호대원들의 3성급 유물 무기들의 기세에 짓눌려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그날 밤 자정 무렵.
대아 자치구의 요새가 푸른 배리어 돔 아래 고요한 적막에 잠겨 있을 때였다.
게스트 하우스의 창문이 은밀하게 열리며, 검은색 전술 슈트를 입은 세 그림자가 소리 없이 튀어나왔다. 그들의 몸 주변에는 빛과 소리를 강제로 굴절시키는 B등급 은신 아티팩트인 ‘차단 망토’의 은은한 그림자 막이 둘러쳐져 있었다.
그들은 오태섭 민정수석비서관의 지령을 받은 네오 코리아 제7 특무대 소속의 엘리트 요원들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 한강진의 개인 집무실과 비밀 보급창고로 침투해 시스템 보급의 실마리나 도면을 훔쳐내는 것이었다.
요원들은 고양이처럼 유연하게 성벽 벽면을 타고 이동하여, 요새 중앙 사령실과 연결된 환기구와 이중 보안 장치 앞에 도달했다.
“경비들의 순찰 주기는 10분. 보안 시스템은 아직 옛 구형 방식이다. 우회하는 건 식은 죽 먹기군.”
특무 요원 한 명이 비열하게 웃으며 초소형 마력 해킹 장치를 보안 패널에 갖다 댔다.
하지만 그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사령실 내부의 최첨단 관제실에서, 한강진이 안락의자에 깊숙이 묻어앉아 그들의 움직임을 커다란 모니터로 실시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강진의 눈앞에 활성화된 윈도우에는 침입자들의 움직임이 삼차원 홀로그램 입체선으로 정밀하게 묘사되고 있었다.
[경고! 비인가 침입자 3명이 사령실 2층 복도 구역에 진입했습니다.]
- 상태: B등급 은신 마법 작동 중.
- 대응 대책: 요새 감시 모듈 B-4 가동 중.
강진은 이전에 요새를 요새화하면서 시스템 상점에서 소환해 둔 B등급 마력식 광학 감시 장치의 감지 화상을 확대했다. 은신 망토를 썼음에도 녀석들의 붉은 마력 실루엣과 열원이 모니터에 적나라하게 표시되고 있었다.
강진은 천천히 머그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쥐새끼들이 너무 일찍 덫에 걸렸군.”
강진의 손가락이 시스템 윈도우의 방어 장비 제어판 위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요새 내부의 자동 번개 터렛과 격리 벽의 잠금장치가 그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침입한 특수 요원들의 실력을 직접 테스트하고, 네오 코리아의 행정 관료 놈들에게 뼈아픈 경고를 날려주기 위한 조용한 덫이 어두운 복도 너머에서 조용히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