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의 만능 보급상인

82화: 지하철 소탕전의 거래
마포대교 남단의 전투가 대아 자치구의 압승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전선에 감도는 긴장감은 조금도 엷어지지 않았다.
다리 상판에 흩어진 변종 괴수들의 사체에서 여전히 붉은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고, 한강진이 뿌린 정화 성수가 닿지 않은 먼 강물줄기는 여전히 검붉은 핏빛 점액질을 품은 채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효율성이군…….”
강민혁 소령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손에 쥔 B등급 전술 마스크를 매만졌다.
비단 마스크뿐만이 아니었다. 대아 자치구 대원들이 전방에 펼쳤던 육각형의 푸른 보호막과, 한강진이 휘두른 도끼에서 뿜어져 나온 파괴적인 황금빛 번개는 군부의 상식을 아득히 초월한 무력이었다. 국가의 모든 자원을 통제하고 있다는 네오 코리아 본국 방공호조차도 이런 규격 외의 전술 장비들은 보유하지 못했다.
강진은 전투를 마치고 방어 방벽 위에 걸터앉아 도끼 자루를 닦아내고 있었다.
지하철 선로에서 흘러나오는 서늘한 공기를 느끼던 중, 강민혁의 전술 무전기에서 요란한 경보음이 울렸다. 네오 코리아 본국 방공호의 극비 회선이었다.
치이익-!
- “강 소령! 들리는가? 본국 사령부다! 위성 관측 결과 마포대교 남단 방어선에서 오염 기류가 일시적으로 중화된 것을 감지했다. 대체 어떻게 한 건가? 보고하라!”
강민혁은 힐끗 강진의 눈치를 살핀 뒤, 마스크의 전원 단추를 누르고 송신기를 입에 가져다 댔다.
“보고 드립니다. 대아 자치구의 한강진 대장이 소환한 B등급 환경 정화 장비와 마력 배리어 방패, 그리고 미지의 정화 액체를 살포하여 남단 저지선을 사수했습니다. 현재 아군 피해는 전무합니다.”
무전기 너머에서 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본국 사령부의 최고 책임자이자 군부의 실권자인 한종학 대장의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그 정화 액체와 장비들이 실제로 존재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지금 당장 지하철 5호선 환기구와 터널 내부 상황을 해결할 수도 있겠군. 강 소령, 그 한 대장을 본국 다원 회선으로 즉시 연결하라.”
강민혁이 송신기의 단말기를 조작하자, 강진의 눈앞에 푸른색 홀로그램 화면이 펼쳐졌다.
화면 속에는 굳은 표정의 백발 장성, 한종학 대장이 서 있었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강진을 쳐다보며 위압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대아 자치구의 한강진 대장인가. 나는 네오 코리아의 총사령관 한종학이네. 긴말하지 않겠네. 지금 한강 북단에서 시작된 붉은 점액질이 남부 선로 환기구와 5호선 터널 내부로 스며들기 시작했네. 이 터널이 오염되면 우리가 어렵게 구축한 남북 교역로가 완전히 마비되는 것은 물론, 지하를 통해 서울 이남 전체로 역병과 괴수들이 퍼져나갈 걸세. 자네가 가진 그 정화 기술과 장비들을 우리 군에 무상 협조해주길 바라네. 이건 인류의 생존이 걸린 중대한 국책 사업이네.”
국가와 인류라는 대의명분을 앞세운 억압적인 회유. 과거 문명 시대의 관료들이 흔히 쓰던 전형적인 가스라이팅이었다.
강진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그는 도끼를 바닥에 가볍게 쿵 소리가 나게 내려놓으며 한 사령관의 홀로그램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한 사령관님, 번지수를 잘못 찾으셨습니다.”
- “음? 무슨 뜻인가?”
“저는 대한민국 공무원도 아니고, 네오 코리아의 군인도 아닙니다. 저는 그저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물건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보급상인일 뿐입니다. 상인에게 무상 협조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종학 대장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화면 너머 사령부 참모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 “지금 이 위급한 시국에 사리사욕을 채우겠다는 말인가? 자네의 대아 자치구 역시 이 터널이 뚫리면 무사하지 못할 텐데!”
“협박은 사절합니다. 터널이 오염되면 저 역시 손해를 보겠지만, 최소한 저는 제 요새에 배리어를 치고 몇 년이고 버틸 자원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하 방공호에 갇혀 있는 당신들은 어떻습니까? 교역 열차가 끊기고 정밀 자재 유통이 마비되면 몇 달이나 버틸 수 있습니까?”
강진의 차갑고 이성적인 지적에 한종학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강진의 말이 뼈아픈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네오 코리아는 대아 자치구의 압도적인 보급력에 식량과 생필품의 상당 부분을 의존하기 시작한 상태였다.
강진이 주도권을 쥔 채 제안을 건넸다.
“장비와 정화 물자를 소모하는 대가는 철저히 계산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제시하는 거래 조건입니다.”
강진은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첫째, 네오 코리아 방공호가 보유 중인 최고 등급의 고농축 마정석 1,000개. 둘째, 과거 연구소와 군수 기지에서 확보해 둔 전자기기 복구용 B등급 정밀 기계 모듈 50개. 이 두 가지를 교역 열차의 임시 편편을 통해 당장 대아 요새로 송금하십시오. 입금이 확인되는 즉시, 지하 터널 소탕을 위한 정화 장비와 소탕 병력을 지원하겠습니다.”
- “마정석 1,000개에 정밀 모듈 50개라고?! 그건 우리 방공호의 비상 전력망을 유지하는 핵심 자재들이네! 너무 과한 요구 아닌가!”
“지하철 터널이 붉은 핏물로 가득 차서 괴수들의 둥지가 되는 것보다 아까운 자재입니까? 선택은 대장님이 하십시오. 거래를 하든가, 아니면 다 같이 멸망하든가.”
강진의 어조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홀로그램 속 한종학 대장의 얼굴이 분노와 번민으로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세상을 집어삼킬 듯 남하하는 붉은 오염의 위성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네. 자네의 요구를 수용하겠네. 마정석과 모듈을 실은 임시 수송 열차를 지금 즉시 송출하지. 대신, 거래 대금을 받은 만큼 터널 내부는 완벽하게 소탕해 주어야 할 걸세.”
“당연한 소릴. 상인은 신용을 가장 목숨처럼 여깁니다.”
강진은 통신을 끊었다.
약 30분 후, 지하 5호선 선로를 타고 대아 요새 내부 승강장으로 철도 요원들이 급히 호송해 온 임시 수송함이 정차했다. 강진은 승강장으로 내려가 궤짝들을 열어젖혔다. 눈이 시릴 정도로 영롱한 푸른빛을 뿜어내는 고농축 마정석들과 복잡한 마력 회로가 촘촘히 박힌 정밀 기계 모듈들이 가득 차 있었다.
강진은 상자더미 위에 손을 올렸다.
“시스템 헌납.”
[네오 코리아의 마정석 1,000개를 헌납합니다.]
- 획득 SP: +2,000 SP
[B등급 정밀 기계 모듈 50개를 헌납합니다.] - 획득 SP: +1,500 SP
- 현재 보유 SP: 4,603.5 SP (이전 1,103.5 SP에서 충전)
순식간에 4,600포인트가 넘는 막대한 자금이 확보되었다. 이 정도 자금이라면 지하 내부의 오염을 통째로 불태워 버릴 파괴적인 화력을 갖추기에 충분했다.
강진은 상점을 열어 새로운 카테고리를 샅샅이 뒤졌다. 밀폐된 지하 공간에서 붉은 점액질과 마수들을 동시에 박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극고온의 화염이었다.
[구매 아이템: B등급 특수 환경 화염방사기 (B등급 - 레어) - 1개]
- 설명: 극고온의 플라즈마 화염을 방사하는 특수 화기. 밀폐된 공간에서 산소 소모를 최소화하면서도, 마력 장벽과 괴수들의 외피를 녹여버리는 열기를 뿜어냅니다.
- 가격: 1,000 SP
[구매 아이템: B등급 불꽃의 마정석 (B등급) - 1개]
- 설명: 타오르는 불길의 마력이 고도로 정제된 결정. 화염 속성 화기에 합성 시, 방사 거리를 2배로 늘리고 화염에 닿은 오염 물질을 영구 소모시키는 효과를 부여합니다.
- 가격: 500 SP
[1,500 SP가 소모되었습니다.]
- 현재 보유 SP: 3,103.5 SP
강진은 소환된 두 물건을 시스템 합성 창에 띄우고 즉시 실행했다.
웅장한 붉은 광막이 집무실을 가득 채웠고, 이내 묵직하고 흉포한 디자인의 화염방사기가 완성되었다.
[합성 성공!]
- 명칭: 연옥의 화염 방사포 (3성급 - 레어)
- 효과: 초고열의 화염 방사. 방사 거리 최대 40미터. 화염에 노출된 심연의 오염도 B등급 이하 물질을 100% 소각 및 정화합니다. 피격 대상에게 지속적인 마력 연소 피해를 입힙니다.
“준비는 끝났군.”
강진은 완성된 연옥의 화염 방사포를 어깨에 짊어지고 밖으로 나왔다.
지하 5호선 여의나루역 입구. 강민혁이 이끄는 네오 코리아 정예 소탕병 10명과 대아 수호대 10명이 완벽하게 무장을 마친 채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강진에게 지급받은 B등급 전술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철문이 열리고 계단을 내려가자, 터널 내부의 풍경은 그야말로 지옥의 초입이었다.
천장과 벽면은 온통 꿈틀거리는 붉은 이끼와 혈관 같은 점액질 줄기들로 뒤덮여 있었고, 썩은 물비린내와 마력 가스가 가득 차 있었다. 터널 깊은 곳곳에는 붉은색 가죽 고치들이 마치 심장처럼 일정하게 박동하고 있었다.
스스스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긁히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력 고치들이 갈라지며, 그 안에서 기괴한 변종 괴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에 가시가 돋아나고 머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포자 주머니로 이루어진 신형 변종 마수, ‘심연의 포자견’들이었다.
수십 마리의 포자견들이 안광을 빛내며 터널 통로를 가득 메우고 돌격하기 시작했다.
“아군 방패조, 전방 전개! 한 걸음도 물러서지 마라!”
강진의 차가운 명령과 함께 대아 자치구의 배리어 쉴드가 전방을 단단하게 막아섰다.
쿠구구궁!
포자견들이 배리어에 부딪혀 비명을 지르는 순간, 강진이 연옥의 화염 방사포의 총구를 어둠 속으로 겨누고 트리거를 당겼다.
슈우우우우- 콰아아아아!
순간 지하 터널 전체가 눈이 멀 정도로 붉고 뜨거운 연옥의 불꽃으로 뒤덮였다. 오염된 터널 속을 화려하게 수놓는 불꽃의 해일이 괴수들의 비명과 함께 어둠을 하얗게 불태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