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의 만능 보급상인

8화: 수색 원정과 무법자들
"한 대리님, 지붕 위 환기창과 채광창은 전부 철판을 덧대고 굵은 볼트로 이중 고정했습니다. 웬만한 괴물들이 기어올라와서 두드려도 뚫고 들어오진 못할 겁니다. 어쩌면 폭격이라도 맞지 않는 한 여기가 마포구에서 가장 튼튼할지도 모르겠네요."
신입 피난민 중 인테리어 업자였던 최덕팔(50세)이 기름때 묻은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보고했다. 강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보강된 천장 H빔 구조물과 틈새를 꼼꼼하게 올려다보았다. 19명으로 늘어난 인력은 쉘터의 보수 및 요세요 작업 속도를 비약적으로 끌어올렸다. 각자 전직 기술자나 손재주 있는 이들이 제 역할을 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을 완전히 놓기엔 일렀다. 어제 창고 앞을 스쳐 지나간 정찰 폭주족의 모터사이클 엔진 소리가 여전히 귓가를 맴돌았다. 차원 균열에서 쏟아져 나온 괴수들의 위협도 무섭지만,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법과 질서가 사라졌을 때 가장 잔인하고 비열해지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강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고작 소방 도끼 한 자루로는 한계가 있어. 쪽수와 화력으로 밀고 들어오는 인간 무법자들을 상대하려면, 더 강력한 원거리 무장이 필요해.'
강진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시스템 상점 창을 힐끗 열었다. 상점 Level 2 품목에는 마법식 리볼버 권총과 전용 탄약이 새롭게 해금되어 있었다. 총기와 탄약을 합친 가격은 총 220 SP. 하지만 강진이 가진 포인트는 현재 81.5 SP에 불과했다. 무려 140 SP가량이 부족했다. 가죽 갑옷을 사는 데 포인트를 소모한 것이 컸다.
강진은 결단을 내렸다. 창고 안의 소극적인 안전에만 매달려서는 급변하는 정세와 다가올 위협에 대응할 수 없었다. 자산은 굴려야 불어나는 법이고, 상인은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노다지를 발굴해야 했다.
"원정 수색대를 조직하겠습니다. 물류창고 주변 반경 100미터 이내의 상가 구역을 소탕하고, 쓸 만한 생필품과 시스템에 헌납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자원들을 회수해 오겠습니다."
강진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강태훈이 가장 먼저 묵직한 야구배트를 쥐며 나섰다.
"내가 동행하겠소. 헬스장 밥 먹으며 키운 이 근력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지. 대장 혼자 내보낼 수는 없지 않소."
"저도 가겠습니다, 대리님. 여기 가만히 앉아서 벌벌 떨고만 있으니 몸에 좀이 쑤셔서요."
박 대리 역시 지게차 쇠 지렛대를 쥐며 눈빛을 빛냈고, IT 개발자 정현우는 창고 구석에서 찾아낸 소형 벌목용 도끼를 고쳐 쥐었다. 이로써 강진을 포함한 4인의 '제1차 수색 원정대'가 결성되었다.
강진은 검은 철제 보조문의 잠금장치를 해제하고 주차장 밖으로 나섰다. 어제 고블린들이 흘린 검푸른 피가 아스팔트 위에 눌어붙어 비릿하고 역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맑았던 여름 하늘은 여전히 핏빛 구름으로 덮여 있었고, 멀리서 까마귀들이 사체를 찾아 불길하게 울어댔다. 4명은 무기를 단단히 쥔 채 서로의 등 뒤를 엄호하며 대로변을 향해 조심스럽게 발을 뗐다.
대로변은 그야말로 지옥의 풍경이었다. 연쇄 추돌로 찌그러진 차량들 사이로 주인을 잃은 신발과 가방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원정대의 1차 목표지는 대로변 모퉁이에 위치한 대형 편의점 '씨유우 마포점'이었다.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 바닥에 깔린 편의점 내부로 진입하자, 유통기한이 지난 삼각김밥과 터진 우유 팩들이 썩은 냄새를 풍기며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안쪽 진열대에는 아직 털리지 않은 통조림, 대용량 스팸 상자, 그리고 가공식품 박스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부스럭-! 콰직!
"키익! 키키익!"
편의점 신선 식품 매대 너머에서 기분 나쁜 마찰음과 함께 녹색 가죽의 고블린 세 마리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녀석들은 진열대 밑에 숨어 과자 봉지를 뜯어먹다 갑작스러운 인간들의 난입에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살의를 뿜어냈다.
"태훈 씨, 오른쪽 놈을 맡아주십시오. 박 대리님과 현우 씨는 왼쪽에 있는 놈들의 시선을 끌어주세요. 가운데 우두머리 같은 녀석은 제가 잡습니다."
강진의 짧고 명료한 지시와 동시에 4명이 일제히 쇄도했다.
"차앗-!"
강태훈이 전직 트레이너다운 폭발적인 힘으로 쇠파이프 야구배트를 휘둘렀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오른쪽 고블린의 옆구리가 종잇장처럼 함몰되며 녀석이 진열대 너머로 날아가 처박혔다. 단 한 격에 흉곽이 바스러지는 치명상이었다.
강진 역시 [+1 야수 사냥꾼의 도끼]를 가볍게 찔러 넣었다. 가운데 고블린이 반사적으로 낡은 몽둥이를 내밀었으나, 시스템 보정으로 관통력이 극대화된 도끼날은 몽둥이를 단숨에 반으로 가르며 녀석의 가슴팍에 깊숙이 박혔다.
서걱-!
[고블린 정찰병(F급)을 처치했습니다.]
[20 SP를 획득했습니다.]
"키이익! 키엑!"
남은 한 마리가 박 대리의 쇠 지렛대에 가로막혀 우왕좌왕하는 사이, 정현우가 뒤에서 벌목용 도끼로 녀석의 발목을 정확히 찍었다. 녀석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지자 강진이 다가가 즉시 미간에 도끼를 박아 넣었다.
[고블린 정찰병(F급)을 처치했습니다.]
[20 SP를 획득했습니다.]
강태훈이 쇠파이프로 짓이겨놓은 첫 번째 고블린 역시 강진의 도끼날 아래 목숨을 잃었다.
[고블린 정찰병(F급)을 처치했습니다.]
[20 SP를 획득했습니다.]
순식간에 60 SP가 추가로 적립되었다.
강진은 동료들에게 식품 박스를 챙기라고 지시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사이 그는 고블린들의 사체에서 뼈 단검 3개를 빠르게 수집해 시스템에 판매했고, 편의점 금고에 든 쓸모없는 지폐 뭉치와 구리 전선, 그리고 계산대에 버려진 포스(POS) 기기의 정밀 반도체 칩 등 시스템이 가치를 높게 쳐주는 문명 원자재들을 빠르게 터치하여 헌납했다.
[고블린의 거친 뼈 단검 3개가 판매되었습니다. 15 SP가 적립됩니다.]
[편의점 내 정밀 전자제품 및 문명 원자재가 헌납되었습니다. 75 SP가 적립됩니다.]
- 현재 보유 SP: 251.5 SP (잔여 81.5 + 처치 60 + 헌납 110... 계산 착오 수정, 251.5 SP 확인)
보유 SP가 순식간에 250을 돌파했다. 총기와 탄약 구매에 필요한 220 SP를 여유롭게 초과 달성한 순간이었다.
'좋아. 지금 바로 구매한다.'
강진은 새로 얻은 가죽 코트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마음속으로 시스템 명령을 내렸다.
[200 SP가 소모되었습니다. '보급용 리볼버 권총(마법 아티팩트)'이 지급됩니다.]
[20 SP가 소모되었습니다. '마력 탄약 6발들이'가 인벤토리에 지급됩니다.]
- 남은 SP: 31.5 SP
그의 코트 안쪽 권총집에 차갑고 묵직한 검은색 특수 합금 리볼버 권총이 무게감을 실으며 실체화되었다. 뒤이어 푸른 광택이 도는 6발의 마력 탄약이 그의 손바닥에 툭 떨어졌다. 강진은 매대 뒤로 몸을 숨기고 신속하게 실린더를 열었다. 푸른 마력이 깃든 탄환들을 하나씩 밀어 넣고, 찰칵-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약실을 닫았다.
현대식 총기보다 훨씬 높은 신뢰도와 파괴력을 지닌 보급 무기가 준비되자,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이 그의 전신을 채웠다. 이제야 비로소 '포식자'들과 대등하게 마주할 자격이 생긴 기분이었다.
"한 대리님! 스팸이랑 통조림 박스 4개를 확보했습니다. 이 정도면 일주일은 마을 잔치를 벌여도 되겠어요!"
박 대리가 기쁨에 가득 찬 얼굴로 묵직한 상자를 들고 나왔다. 4명이 소중한 물건을 챙겨 편의점을 나서려는 바로 그 찰나였다.
부우웅-! 탈탈탈탈탈!
편의점 앞 주차장 입구로 날카로운 배기음과 함께 폭주족 오토바이 세 대가 굉음을 내며 멈춰 섰다. 오토바이 위에는 쇠파이프, 야구배트, 심지어 날이 시퍼렇게 선 사제 식칼을 든 험악한 인상의 사내 5명이 앉아 있었다.
그들의 가죽 재킷 어깨에는 붉은색으로 '들개(Wild Dogs)'라는 글자가 거칠게 갈겨 써져 있었다. 팔뚝에는 문신이 가득했고, 눈빛에는 문명이 붕괴한 세상을 마음껏 약탈하고 유린하는 자들 특유의 광기 섞인 탐욕이 서려 있었다. 이 근방 마포역 일대를 거점으로 삼은 초기 무법자 조직 '들개파'의 정찰 조원들이었다.
"어라? 웬 샌님 쥐새끼들이 남의 '나와바리'에서 먹이를 훔치고 있네?"
가운데 오토바이에서 내린, 머리를 빡빡 밀고 가슴팍에 커다란 흉터가 있는 사내가 손도끼를 가볍게 손바닥에 툭툭 치며 비열하게 웃었다. 그의 등 뒤에 선 사내들 역시 강진 일행을 포위하듯 부채꼴로 거리를 좁혀왔다.
"이 구역 편의점이랑 약국은 전부 우리 들개파 형님들이 미리 침 발라놓은 곳이다. 좋은 말로 할 때 들고 있는 박스 전부 바닥에 내려놓고 무릎 꿇어라. 그럼 손가락 몇 개 자르는 선에서 목숨은 살려 보내줄 테니까. 안 그래, 얘들아?"
들개파 일원들이 낄낄거리며 무기를 휘둘렀다. 빡빡이의 노골적인 위협에 박 대리와 정현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강태훈은 쇠파이프 야구배트를 으스러지게 꽉 쥐며 강진의 눈치를 살폈다.
긴장감이 극도로 치닫는 텅 빈 대로변의 공기 속에서, 강진은 가죽 코트 안쪽의 묵직한 리볼버 권총 손잡이를 부드럽게 움켜잡았다.
"싫다면 어쩔 겁니까? 주인이 없는 물건에 먼저 손을 댄 건 우리인데."
강진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멸망한 세상의 첫 번째 인간 대 인간의 대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