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의 만능 보급상인

7화: 두 번째 거래와 세력의 맹아
피비린내가 눅진하게 흩날리는 물류창고 주차장.
강진은 도끼날을 비스듬히 기울여 고블린의 검붉은 피를 바닥으로 흘려보냈다. 그의 시선은 주차장 건너편, 깨진 쇼윈도와 어지럽게 널린 마네킹 파편들 사이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눈동자가 공포에 질려 거세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강진이 그쪽을 향해 소리 없이 천천히 한 걸음을 내딛자, 쇼윈도 안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침내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저, 저기! 쏘지 마십시오! 아니, 도끼 휘두르지 마세요! 우리는 괴물이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제발요!"
리더 격으로 보이는 사십 대 중반의 남성이 양손을 머리 위로 번쩍 든 채 상가 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전직 헬스트레이너 출신인 강태훈(45세)이었다. 털털한 턱수염에 덩치가 다부졌지만,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는지 뺨이 푹 꺼져 있었고 입술은 하얗게 갈라져 터 있었다. 그의 뒤로는 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주부, 머리를 싸맨 노인, 대학생 등으로 보이는 피난민 12명이 굴비 엮이듯 줄지어 따라 나왔다.
그들은 강진의 발밑에 넝마처럼 뒹구는 12마리의 고블린 사체와, 홀로 그 괴수들을 도륙하고도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강진의 압도적인 아우라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무슨 일입니까? 제 구역에 허락 없이 접근한 이유는."
강진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그 목소리에는 온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섞여 있지 않았다.
강태훈은 머뭇거리다 강진의 뒤편에 굳건하게 버티고 서 있는 물류창고의 검은 철제 격벽을 보았다. 한눈에 봐도 현대식 기술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견고한 요새와 같은 외관, 그리고 틈새로 풍겨 나오는 고소한 스프 냄새는 굶주린 그들에게 있어 천국의 향기와도 같았다.
"저희는 이 근처 오피스텔에 살던 주민들입니다. 대재앙이 터진 이후로 사흘 동안 지하실에 숨어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저 괴물 무리에게 발각되어 포위당해 죽을 뻔했는데... 당신이 혼자서 저것들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염치없지만, 제발 저희를 저 창고 안으로 잠시만이라도 들여보내 주실 수 없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
태훈의 애걸복걸이 끝나기 무섭게, 뒤에 서 있던 일행 중 한 명인 삼십 대 남성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봐요, 보아하니 저 창고에 식량이랑 생수가 엄청나게 많은 것 같은데, 이 난리에 사람 목숨부터 구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국가 재난 상황인데 서로 돕고 살아야죠. 좋은 게 좋은 거 아닙니까?"
강진은 퉁명스럽게 말한 남자를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이 칼날처럼 남자의 목줄기를 훑었다.
"국가 재난 상황이요? 경찰도 군대도 연락이 안 되고 전기도 안 들어오는 이 세상에서 아직도 국가를 찾으십니까? 본인의 목숨을 왜 생판 남인 저에게 의탁하면서 권리를 주장하는지 모르겠군요. 좋은 게 좋은 거라니... 저에게는 하나도 좋을 게 없는데요?"
강진의 가시 돋친 일침에 남자는 얼굴을 붉히며 움찔하고 입을 다물었다. 강진은 다시 강태훈을 바라보았다.
"제 쉘터에 공짜로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저는 자선사업가가 아닙니다. 제 규칙에 무조건 따르고, 저와 합당한 '거래'를 할 수 있는 자들만 선별해서 받아들입니다. 거래할 준비가 안 되셨다면 여기서 이만 작별이죠."
"이봐요! 사람이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저기 우는 아기랑 거동이 불편하신 할머니도 안 보여요? 당신도 한국 사람 아니야?"
일행 중 몇몇이 감정에 호소하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강태훈은 이성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투덜거리는 사람들을 손짓으로 엄하게 제지한 뒤, 자신이 메고 있던 커다란 등산용 배낭을 열어 조심스럽게 강진에게 보여주었다.
"우리가 무임승차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도망치면서 이 근방 대형 약국과 편의점 창고를 털며 모은 물건들입니다. 상비약, 지혈제, 항생제, 소독약... 지금 당장은 금보다 귀한 것들이죠. 그리고 우리 일행 중에는 종합병원 수술실 간호사 출신인 이혜진(32세) 씨도 있습니다.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전문적인 의약품과 의료 지식이 얼마나 귀한 가치를 지니는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이걸 저희의 입장료이자 거래 조건으로 제시하겠습니다."
의약품과 전문 의료진. 강진의 눈이 가볍게 빛났다.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상처 하나가 파상풍이나 감염으로 이어져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상황에서 의약품은 식량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 게다가 시스템 상점에서 구급상자나 고성능 치료제는 제법 비싼 SP로 책정되어 있었다. 간호사 인력 또한 향후 세력을 확장하고 생존율을 극대화하는 데 필수적인 자산이었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군. 단순한 잉여 인력 12명이 아니라, 의료진 한 명과 약품 더미가 포함되어 있다면 수지타산이 맞는다.'
강진은 배낭 속에 가득 찬 의약품 상자들에 손을 가볍게 얹어 시스템으로 감정했다.
[의료용 소모품 무더기를 감정합니다.]
- 항생제 및 광범위 소독약 세트: 헌납 시 45 SP 획득 가능
- 지혈제 및 멸균 붕대 묶음: 헌납 시 35 SP 획득 가능
- 일반 감기약 및 해열 진통제: 헌납 시 10 SP 획득 가능
- 총 헌납 가치: 90 SP
강진은 배낭 속 의약품 중 당장 현장에서 요긴하게 쓰일 수 있는 최소한의 구급약품(지혈제와 소독약 일부)만 물리적으로 남겨두고, 나머지는 그 자리에서 시스템에 헌납했다.
슉-!
은은한 빛의 잔상과 함께 배낭 속의 약품 상자 절반이 공중에서 분해되어 사라졌다. 눈앞에서 벌어진 믿을 수 없는 이적에 강태훈과 이혜진은 숨을 들이키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의약품 일부의 헌납이 완료되었습니다. 80 SP가 성공적으로 적립되었습니다.]
- 현재 보유 SP: 331.5 SP (기존 251.5 SP + 헌납 80 SP)
강진은 만족스럽게 손을 떼며 강태훈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거래는 성립되었습니다. 의약품과 간호사 이혜진 씨의 의료 지원을 제공하는 대가로, 당신들 일행 13명의 안전을 보장하고 정기적인 식량 배급을 약속하겠습니다. 단, 명심하십시오. 일할 수 있는 육체 건강한 성인들은 창고 내부 정리 및 요새화 작업에 무조건 투입됩니다. 제 지시에 한 번이라도 토를 달거나 물자를 훔치려 할 시에는, 그 즉시 무장 해제 후 쉘터 밖으로 추방합니다. 그건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는 걸 잊지 마세요. 동의합니까?"
강태훈은 강진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합니다. 이 시국에 이보다 합리적인 조건은 없겠지요. 규칙을 철저히 지키고, 일손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앞장서겠습니다."
이로써 대아로지스 물류창고는 기존 인원 6명에 신규 인원 13명이 더해져, 총 19명이 거주하는 제법 규모 있는 중형 생존자 캠프로 거듭나게 되었다.
강진은 그들을 안쪽으로 안내한 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구석의 조용한 칸막이 뒤로 가 시스템 상점을 열었다. 보유 SP가 330을 돌파한 지금, 그는 더 강력한 개인 무장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상점 시스템, Level 2로 업그레이드 실행."
[100 SP가 소모되었습니다. '만능 보급 상점'이 Level 2 등급으로 성장합니다!]
- 상점 등급 업그레이드 완료. 신규 품목들이 해금되었습니다.
- 해금된 품목 리스트:
- 보급용 가죽 갑옷 (일반 등급, 150 SP)
- 보급용 리볼버 권총 [38구경] (마법 아티팩트, 200 SP)
- 마력 강화 탄약 6발들이 (20 SP)
- 해독 시약 및 면역 강화제 (30 SP)
강진은 망설임 없이 '보급용 가죽 갑옷'을 선택했다. 방어력은 생존의 기본이었다.
"가죽 갑옷 구매."
[150 SP가 소모되었습니다. '보급용 가죽 갑옷'이 인벤토리에 지급되었습니다.]
- 남은 SP: 81.5 SP
그가 장비창에서 갑옷을 선택하자, 인벤토리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그의 허름하고 땀에 찌든 티셔츠 위로 짙은 갈색의 세련된 가죽 코트 형태의 방어구가 순식간에 덧씌워졌다. 언뜻 보기에는 고급 브랜드의 롱 코트처럼 보였지만, 직접 만져본 질감은 강철처럼 질기고 단단하면서도 무게는 깃털처럼 가벼웠다.
[보급용 가죽 갑옷 (일반 등급)]
- 특수 옵션: 물리 충격 흡수 +15%. 날카로운 발톱 및 도검류에 대한 관통 저항력 대폭 증가.
이 정도 방어구라면 고블린의 조잡한 뼈 단검이나 굶주린 들개의 이빨 정도는 가볍게 튕겨낼 수 있을 터였다. 강진은 가죽 갑옷의 옷깃을 여미며 한결 든든해진 마음으로 철제 격벽 쪽으로 나갔다.
창고 내부는 활기로 가득 찼다. 새로 들어온 강태훈 일행은 강진의 엄격하지만 체계적인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정현우가 작성한 '생필품 및 식료품 배급 대장'에 맞춰 따뜻한 야채 스프와 컵라면이 보급되자, 노인과 아이들의 얼굴에는 비로소 안도감과 삶의 의지가 깃들었다.
강진이 주도하는 철저한 '보급과 거래'의 규율이 무법지대였던 이곳에 작은 문명의 불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부우웅-! 탈탈탈탈!
바로 그때였다.
창고 바깥의 멀지 않은 국도 대로변에서 기분 나쁜 기계적 소음이 들려왔다. 머플러를 불법 개조한 듯한 오토바이 여러 대가 굉음을 내며 밤공기를 가르는 소리였다.
강진은 즉시 몸을 낮추고 격벽 틈새에 귀를 기울였다. 오토바이 소리는 물류창고 입구 근처에서 잠시 속도를 줄이는 듯하더니, 주차장에 널려 있는 고블린들의 처참한 사체와 새로 설치된 웅장한 검은 격벽을 유심히 살피는 기색을 보였다. 이윽고 그들은 거칠게 엔진을 분사하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대리님, 방금 그 소리는... 생존자들일까요?"
박 대리가 불안한 표정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강진은 배기음이 사라진 방향을 매섭게 노려보며 도끼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단순히 도망치는 피난민들의 소리가 아닙니다. 일정한 대열을 유지하고 움직이는 정찰대... 혹은 이 근방을 장악하려는 약탈자 세력이군요."
괴수뿐만이 아니었다. 세상이 망하자마자 숨겨둔 이빨을 드러낸 인간 포식자들의 시선이 마침내 강진의 요새를 향해 가 닿고 있었다. 본격적인 생존 전쟁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