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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만능 보급상인5화

아포칼립스의 만능 보급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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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철벽의 요새와 야간 작업

새로 합류한 세 명의 생존자들은 물류창고 안쪽, 박스들이 겹겹이 쌓여 외부의 시선을 차단해 주는 구석진 안전지대에 자리를 잡았다.

유통기한이 넉넉한 참치 통조림과 즉석밥, 그리고 미지근하지만 깨끗한 생수를 받아 든 그들의 눈가에는 그제야 팽팽하던 긴장감이 조금씩 씻겨 내려갔다. 멸망한 세상에서 가장 귀한 대접은 화려한 산해진미가 아니라, 당장 내 입속을 채워줄 수 있는 확실한 칼로리와 갈증을 해소해 줄 깨끗한 물이었다.

허겁지겁 숟가락도 없이 통조림 캔을 비워내고 즉석밥을 씹어 삼키는 모습에서, 그들이 밖에서 겪었을 사투의 고단함과 굶주림이 그대로 묻어났다. 여고생 한소희는 목이 메는지 연신 생수를 들이켰고, 양복 차림의 오태식은 손을 덜덜 떨며 밥알을 흘렸다.

강진은 그들이 어느 정도 배를 채울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캔의 바닥까지 닥닥 긁어먹었을 즈음, 천천히 다가가 플라스틱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약속은 약속입니다. 가진 소지품 중에서 시스템이 가치를 인정할 만한 것들을 전부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시죠. 속이거나 약속을 어길 시에는 이 창고에서 즉시 퇴거 조치하겠습니다. 밖의 상황이 어떤지는 본인들이 더 잘 아시겠죠?"

강진의 덤덤하지만 뼈가 있는 목소리에 오태식 과장은 움찔하며 품고 있던 가죽 서류 가방을 열었다. 그의 눈에는 강진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쫓겨나지 않으려는 절박함이 교차했다.

"이, 이건 제 개인용 고가 시계랑... 지갑에 든 현금, 그리고 한도가 넉넉한 법인카드입니다. 세상이 정상화되면 분명 큰 가치가 있을 겁니다. 제가 다니는 회사가 중견 건설사라 보증도 확실하고..."

오태식이 내놓은 스위스제 명품 시계와 신권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5만 원권 다발을 본 강진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종이돈이나 명품 시계는 당장 밥 한 끼의 가치도 없습니다. 시스템은 이런 사치품에는 관심이 없거든요. 시계는 나중에 문명이 어느 정도 재건된 뒤에 물물교환용 장식품 정도로 쓰이겠네요. 패스."

강진의 냉정한 평가에 오태식은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는 전 재산과 같았던 것들이 이 젊은 대리 앞에서는 한낱 고철과 종이 조각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다음은 IT 기업 개발자 정현우의 가방이었다. 그는 상황을 비교적 빠르게 판단한 듯, 실질적인 기계류를 꺼내놓았다. 10,000mAh 용량의 대용량 보조배터리 두 개와 잘 갈린 멀티툴(맥가이버 칼), 그리고 자신이 아끼던 업무용 고급 기계식 키보드를 꺼내놓았다.

여고생 한소희는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액정이 거미줄처럼 망가진 태블릿 PC와 필통 속에 들어 있던 작은 커터칼, 그리고 절반쯤 남은 손소독제를 멋쩍게 올려놓았다.

"저는... 가진 게 이런 것밖에 없어요. 죄송해요."

소희가 고개를 숙이자, 강진은 이 조잡한 물건들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는 시스템의 '판매/헌납' 기능을 활성화한 채 손을 뻗었다.

스윽.

[마력이 깃들지 않은 일반 문명품을 감정합니다.]

'역시 마물이 떨어뜨린 전리품이나 마정석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포인트군. 하지만 쓸모없는 문명의 잡동사니도 미량의 SP로 환전할 수 있다는 건 꽤 중요한 정보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강진은 사람들의 시선을 가린 채, 보조배터리와 멀티툴, 태블릿 PC와 커터칼에 슬쩍 손을 얹었다.

쉭-!

은은한 청색 빛의 입자와 함께 물건들이 강진의 손끝에서 녹아들 듯 사라졌다. 눈앞에서 벌어진 비현실적인 광경에 오태식과 한소희는 숟가락을 멈추고 입을 벌렸다. 정현우 역시 안경을 치켜올리며 눈을 크게 떴다. 현대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야말로 '각성자'의 권능이었다.

"어... 방금 그 물건들은 어디로 간 겁니까? 차원 저장소 같은 공간 마법인가요?"

정현우가 조심스럽게 묻자, 강진은 그저 얇게 미소 지을 뿐 대답을 피했다. 자신의 시스템 구조를 이들에게 설명해 줄 필요는 없었다. 상인은 정보의 비대칭성을 이용해 이득을 보는 직업이니까.

[물품 헌납이 완료되었습니다. 총 6.5 SP가 추가 적립되었습니다.]

강진은 거래의 보답으로 재고 상자에서 새 마스크 몇 장과 물티슈, 그리고 구급함에서 챙긴 간단한 상처 연고를 꺼내 그들에게 건넸다.

"거래는 성립되었습니다. 오늘 밤은 여기서 푹 쉬십시오. 저기 빈 파레트 위에 돗자리를 깔아뒀으니 거기서 자면 됩니다. 다만, 밤중에 멋대로 돌아다니거나 창고 뒤편의 제 사적 구역으로 접근하면 적으로 간주하고 즉시 조치하겠습니다. 주의하십시오."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오태식과 정현우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진의 손에 들린, 여전히 고블린의 피가 옅게 묻어 있는 도끼의 서늘한 마력광을 본 이상, 감히 딴청을 피울 생각은 꿈에도 할 수 없었다.

밤이 깊어지자 광활한 물류창고는 기괴한 침묵에 잠겼다.

도시의 전력망이 완전히 마비되어 창고 내부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암흑으로 덮였다. 오직 천장의 깨진 유리창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핏빛 달빛만이 유령처럼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간간이 창고 바깥 먼 곳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폭발음과, 공기를 찢는 듯한 마수들의 포효, 그리고 누군가의 마지막 비명소리만이 이곳이 멸망한 세상의 한가운데라는 사실을 잔인하게 상기시켜 주었다.

김 부장과 박 대리, 그리고 새로 온 생존자들까지 짚더미와 돗자리 위에 누워 고단한 잠에 빠져든 시간.

강진은 홀로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조용히 발소리를 죽여 찢겨 나간 철제 방화 셔터 앞으로 걸어갔다. 낮에 박 대리와 김 부장이 억지로 막아둔 목재 파레트와 드럼통 틈새로 서늘한 밤바람이 거칠게 들이치고 있었다. 틈새로 손을 뻗으면 밖을 만질 수 있을 정도로 방어망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이 정도의 장애물로는 고블린이나 그림자 늑대 같은 녀석들을 막을 수 없어. 놈들이 작정하고 틈새를 벌리면 단 몇 분 만에 창고 안은 도살장으로 변할 거다.'

강진은 상점 창을 열었다. 80 SP나 하는 방어막 주문서는 일회성인 데다 지속 시간도 짧아 가성비가 떨어졌다. 그는 좀 더 근본적이고 영구적인 해결책을 원했다. 그는 상점 탭을 아래로 내리며 '건설 및 방어 설비' 카테고리를 검색했다.

그리고 그의 눈을 사로잡은 최적의 아이템.

[보급용 철제 강화 격벽 (Level 1)]

영구 설치형 방어 설비였다. 100 SP라는 거금이 들지만, 이 물류창고를 거점으로 삼아 세력을 키워갈 생각이라면 이보다 확실한 투자는 없었다. 상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자산을 지킬 수 있는 든든한 금고인 법이다.

'구매한다.'

[100 SP가 소모되었습니다. '보급용 철제 강화 격벽'이 인벤토리에 지급됩니다.]

강진은 셔터를 가로막고 있는 지저분한 파레트 더미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인벤토리를 활성화하고 설치 지점을 셔터 프레임에 정확히 고정했다.

'설치.'

스스스스...

강진의 눈앞에 반투명한 푸른색 마력 그리드가 나타나더니, 찢어진 셔터의 틈새와 벌어진 공간을 격자무늬로 덮기 시작했다. 이윽고 거대한 빛의 일렁임과 함께 둔탁하고 묵직한 금속 마찰음이 나며, 무광 검정색의 철제 격벽이 공간 속에 그대로 구현되었다.

철벽은 기존의 낡은 철제 셔터 기둥에 자석처럼 단단히 달라붙으며 아예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일체화되었다. 두께가 족히 10센티미터는 되어 보이는, 든든한 중합금 벽이었다. 바깥의 소음조차 거의 차단될 정도로 방음 효과도 뛰어났으며, 강진이 손을 대자 기분 좋은 서늘함과 견고함이 전해졌다.

강진은 만족스럽게 격벽 표면을 쓸어내렸다.

"이걸로 입구 방어는 일단 안심이군. 웬만한 녀석들은 머리를 들이받아도 이 벽은 뚫지 못할 거다."

그는 남은 31.5 SP를 확인하고 다시 구석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눈을 붙였다. 도끼의 자루를 팔에 감은 채, 그는 짧지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창고 내부의 먼지 섞인 공기 사이로 흐릿한 햇빛이 비쳐 들기 시작할 무렵.

가장 먼저 깨어나 셔터 쪽 경계를 서러 갔던 박 대리가 억눌린 비명을 질렀다.

"억! 이게... 이게 뭡니까? 부장님! 한 대리님! 여기 좀 보세요!"

그 다급한 목소리에 김 부장과 정현우, 심지어 구석에서 자고 있던 민지 씨까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그들이 셔터 쪽으로 다가갔을 때 목격한 것은, 어제까지 처참하게 찢어져 있던 방화 셔터 대신 그 자리를 압도적인 위용으로 메우고 있는 기괴한 검은색 철제 벽이었다.

"아니, 이게 대체 언제 여기 설치된 거야? 어제 우리가 땀 흘리며 막아놓은 파레트들은 어디로 사라진 거고?"

김 부장이 눈을 의심하며 격벽을 두드렸다. 깡통 소리가 나는 얇은 함석판이 아니었다. 둔탁한 진동조차 느껴지지 않는, 마치 거대한 암석과도 같은 묵직한 강철벽이었다.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 사이로 강진이 여유롭게 기지개를 켜며 걸어 나왔다.

"제가 어젯밤에 도저히 잠이 안 와서, 창고 뒤편 보수 자재실에 있던 예비 격벽을 가져와 수동으로 설치했습니다. 다들 너무 곤히 주무시길래 방해가 될까 봐 혼자 조용히 작업했는데, 다행히 잘 고정되었나 보군요."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이 무겁고 거대한 강철판을 혼자서 소리 소문 없이 들어 올려 용접하듯 설치했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게차를 동원해도 소음이 났을 터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강진의 뻔한 거짓말에 토를 달지 못했다. 그들은 이미 강진이 자신들과는 차원이 다른 초자연적인 '각성자'의 힘을 가졌음을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 멸망한 세상에서 상식은 사치였고, 생존을 보장해 주는 힘이야말로 유일한 정의였다.

오히려 정현우의 눈에는 강진에 대한 깊은 경외심과 신뢰가 깃들었다.

"한 대리님... 정말 대단하시네요. 어쩌면 마포구 일대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바로 여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벽이라면 괴물들도 쉽게 못 들어오겠어요."

"안심하기엔 이릅니다. 안전은 노력해서 유지하는 거지, 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니까요."

강진이 태연하게 답하며 주차장 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비록 격벽이 막혀 바깥이 보이진 않았지만, 격벽에 내장된 미세한 마력 감지 장치—시스템의 권능이 강진의 뇌리에 날카로운 적색 경보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알림: 창고 주변 50m 이내에 다수의 마력 반응이 감지됩니다.]
[마력 반응 수: 12]
[대상: 고블린 군락의 약탈 분대]

단순한 정찰병이 아니었다. 마포구 일대를 훑으며 먹잇감을 찾던 고블린 무리가 어제 쓰러진 동료들의 피비린내를 쫓아 마침내 이곳 대아로지스 물류창고를 완전히 포위하기 시작한 것이다.

강진은 도끼 손잡이를 꽉 쥐며 싸늘한 살기를 번뜩였다.

"다들 각자 무기 챙기십시오. 전투 준비합니다. 불청객들이 단체로 찾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어제보다 좀 더 거친 손님들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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