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의 만능 보급상인

4화: 거래의 조건과 첫 피난민
"제발 문 좀 열어주세요! 뒤에 괴물들이 쫓아와요! 제발!"
문틀을 사정없이 두드리는 손발의 다급한 마찰음과 비명 섞인 울음소리가 굳게 닫힌 방화 셔터 너머로 생생하게 울렸다. 창고 안의 공기가 한순간에 팽팽한 긴장감으로 얼어붙었다.
"한 대리, 열어주면 안 되네! 저 밖의 목소리가 진짜 사람인지, 아니면 아까 그 괴물들이 흉내 내는 건지 어떻게 아나? 설령 사람이라 해도 뒤에 괴물들이 쫓아온다잖아! 문을 열었다가 괴물들이 떼거지로 들이닥치면 우리 다 죽어!"
김 부장이 사색이 된 얼굴로 강진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다급하게 속삭였다.
"부장님 말이 맞아요. 지금 함부로 문을 열기엔 너무 위험합니다."
조금 전까지 고블린의 사체를 수습하는 데 협력했던 박 대리마저 잔뜩 질린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임민지는 셔터 쪽과 강진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강진은 김 부장의 손을 냉정하게 뿌리쳤다.
"일단 상황을 보죠."
강진은 셔터 틈새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바깥 동태를 살폈다. 찢어진 방화 셔터 하단의 좁은 틈새와 찌그러진 틈으로 바깥 주차장의 풍경이 어렴풋이 보였다.
주차장 아스팔트 위를 필사적으로 달리는 세 명의 인영이 있었다. 찢어진 양복 정장 상의를 휘날리는 삼십 대 초반의 남성, 가방을 품에 꼭 껴안은 여고생, 그리고 구두 한쪽이 벗겨진 채 절뚝거리며 달리는 이십 대 후반의 남성이었다.
그들의 등 뒤로 강진이 쓰러뜨렸던 녀석들과 같은 녹색 가죽의 고블린 세 마리가 조잡한 몽둥이와 쇠파이프를 치켜든 채 광기 어린 울음소리를 내며 쫓아오고 있었다. 고블린들의 입가에는 이미 다른 희생자의 피로 보이는 붉은 흔적이 가득했다.
거리상으로 몇십 미터도 남지 않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강진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공짜로 사람을 구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사치다.'
하지만 시야를 넓혀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첫째, 저 생존자들은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생생한 정보를 쥐고 있는 정보원들이다. 둘째, 그들이 소지하고 있는 가방이나 소지품 중 쓸모없는 쓰레기라도 시스템 상점에 판매하여 추가 SP를 확보할 수 있다. 셋째, 저 생존자들을 쫓아오는 고블린 세 마리는 마리당 20 SP, 즉 60 SP에 해당하는 걸어 다니는 노다지였다.
사냥해서 SP를 벌고, 사람들을 구해 쉘터의 일손으로 삼는다. 충분히 수지타산이 맞는 비즈니스였다.
강진이 뒤를 돌았다.
"문 열 겁니다."
"미쳤어? 한 대리! 자네가 괴물 좀 잡았다고 눈에 뵈는 게 없나 본데, 이건 자살행위야!"
김 부장이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
"부장님. 밖의 생존자들은 바깥 사정을 아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그리고 저 괴물들이 셔터를 두드리다 보면 결국 셔터는 완전히 무너집니다. 그 전에 제가 입구에서 녀석들을 요격하는 게 훨씬 안전합니다. 박 대리님, 지게차 뒤의 쇠 지렛대 들고 제 뒤에 대기하세요. 민지 씨는 셔터 스위치를 조작해 주세요. 딱 1미터만 올립니다. 제가 신호를 주면 즉시 닫으세요."
강진의 목소리에는 거스를 수 없는 압도적인 확신과 명령 조가 실려 있었다. 그의 서늘한 눈빛에 압도된 박 대리는 침을 삼키며 쇠 지렛대를 고쳐 잡았고, 민지 역시 셔터 제어반 앞에 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민지 씨, 올리세요!"
위이이이잉-!
수동 레버와 모터가 삐걱거리며 셔터가 위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셔터 밑으로 먼지바람과 함께 바깥의 매캐한 매연 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가 훅 끼쳐왔다.
"어? 열린다! 안으로 들어가!"
밖에서 비명을 지르던 피난민들이 셔터가 들리자마자 바닥을 기며 안쪽으로 슬라이딩하듯 들이닥쳤다. 양복을 입은 남자와 여고생이 먼저 들어왔고, 절뚝거리던 이십 대 남성이 마지막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키샤아아아!"
그 뒤를 바짝 추격하던 첫 번째 고블린이 셔터 밑 틈새로 대가리를 들이밀며 몽둥이를 휘둘렀다.
스각-!
강진은 망설임 없이 도끼를 수직으로 내리찍었다. 예리한 [+1 야수 사냥꾼의 도끼]가 고블린의 정수리를 갈라놓았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괴수가 바닥에 고꾸라졌다.
[고블린 정찰병(F급)을 처치했습니다.]
[20 SP를 획득했습니다.]
"닫아!"
강진이 소리치자 민지가 다급하게 하강 버튼을 눌렀다. 셔터가 굉음을 내며 아래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밖에는 두 마리의 고블린이 더 있었다. 녀석들은 동료의 죽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셔터가 닫히기 전에 들어오려고 발버둥을 쳤다.
강진은 좁아지는 셔터 틈새 사이로 도끼를 수평으로 강하게 찔러 넣었다.
푹-!
두 번째 고블린의 목덜미에 도끼날이 깊숙이 박혔다. 관통력 20% 증가 옵션 덕분에 두꺼운 고블린의 목뼈가 종이 장처럼 부서졌다. 강진이 도끼를 비틀어 빼내자 괴수가 피를 뿜으며 주차장 바닥으로 쓰러졌다.
[고블린 정찰병(F급)을 처치했습니다.]
[20 SP를 획득했습니다.]
마지막 남은 고블린 한 마리가 닫히는 셔터 밑으로 손을 밀어 넣으려 하자, 강진은 발로 녀석의 가슴팍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팍-!
뒤로 서너 걸음 밀려난 고블린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순간, 쾅! 하고 방화 셔터가 완전히 내려앉으며 바닥에 닿았다. 바깥 주차장과 물류창고 내부가 다시 한번 완전히 차단되었다.
"후... 하아..."
창고 안에는 새로 들어온 세 명의 피난민들과 강진 일행의 거친 숨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고블린 정찰병(F급)을 처치했습니다.]
[20 SP를 획득했습니다.]
- 현재 보유 SP: 125 SP (남은 65 SP + 처치 60 SP)
강진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순식간에 SP 잔고가 120을 돌파했다. 이 정도면 상점에서 더 강력한 장비나 방어막 주문서를 구매하는 것도 가능했다.
"살았다... 정말 살았어..."
양복을 입은 남자가 바닥에 엎드린 채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구두가 벗겨진 채 절뚝거리던 남성 역시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강진과 그의 손에 들린 도끼를 경외심 가득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강진은 피 묻은 도끼를 어깨에 걸치며 그들 앞으로 다가섰다.
"살려드린 값은 하셔야 할 겁니다. 다들 일어서시죠."
강진의 차가운 목소리에 세 사람은 몸을 흠칫 떨며 엉금엉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복을 입은 남자는 대기업 계열사인 '성송정밀'의 과장인 오태식(35세)이었고, 가방을 멘 여고생은 인근 고등학교 2학년인 한소희(17세), 절뚝거리던 이십 대 남성은 IT 기업인 '쿠쿠오플레이'의 개발자 정현우(28세)였다. (실존 기업 명칭 변형 사용)
강진은 사무실 테이블 위에 물 한 병을 올려놓았다. 상점에서 구매한 깨끗한 물이 아니라, 창고 재고로 쌓여 있던 유통용 생수였다. 세 사람은 컵도 없이 병째로 물을 들이켜며 타는 목을 축였다.
"바깥 상황은 어떻습니까?"
강진의 질문에 정현우가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지옥입니다... 완전히 지옥이에요. 하늘이 갈라진 직후에 모든 통신이 끊겼습니다. 스마트폰, 인터넷, 심지어 일반 유선전화까지 전부요. 그러더니 하늘에서 저 괴물들이 쏟아져 내렸고, 아스팔트 바닥에서도 괴물들이 기어 나왔습니다. 군대가 출동하긴 했는데... 전차가 기동하지 않더라고요. 전자기기가 다 먹통이 돼서 무전도 안 되고, 그냥 소총 사격만 하다가 괴물들의 물량에 밀려서 방어선이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정부나 경찰은요?"
오태식 과장이 고개를 저으며 헛웃음을 쳤다.
"경찰서도 마비됐습니다. 차들이 전부 길거리에서 퍼지는 바람에 도로 전체가 거대한 주차장으로 변했어요. 소방차도 못 움직이고, 불은 여기저기서 나고... 그냥 아비규환입니다. 저희도 마포역 근처 지하 상가에 숨어 있다가 괴물들이 들이닥쳐서 무작정 도망쳐 온 겁니다."
서울 전체, 아니 어쩌면 국가 전체가 단 몇 시간 만에 통제력을 잃고 붕괴했다는 뜻이었다.
강진은 턱을 괴고 조용히 분석했다. 문명이 붕괴했다는 것은 법과 질서의 소멸을 뜻한다. 이제는 힘이 곧 법이고, 식량과 무기를 쥔 자가 신이 되는 세상이 온 것이다.
그때, 김 부장이 슬그머니 다가와 세 사람을 훑어보았다.
"이봐요, 바깥 사정은 알겠는데... 우리도 지금 식량이 넉넉지 않아요. (창고 안의 거대한 라면 박스들을 가리키며) 저것들도 다 우리 회사 자산이고 유통 기한이 있는 물건들이란 말입니다. 자네들, 여기 무임승차할 생각은 하지 말라고."
김 부장의 얄팍한 계산에 정현우와 오태식은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강진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부장님. 이 창고의 물자는 이제 회사 소유가 아닙니다. 제가 목숨 걸고 지켜낸 제 물자입니다. 그리고 이분들은 그냥 얹혀살 손님이 아닙니다. 제 거래처죠."
강진은 정현우와 오태식, 그리고 한소희를 번갈아 보았다.
"여기서 안전하게 지내고 싶으시다면, 거래를 제안하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깨끗한 식수와 식량, 그리고 안전한 쉘터를 보급하겠습니다. 그 대가로 여러분은 이 창고의 방어벽을 보강하는 노동력을 제공해 주시고, 가지고 계신 소지품 중 쓸모 있는 것들을 제게 넘기십시오. 동의하십니까?"
세 사람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창고 밖에서 들려오는 아스팔트를 긁는 괴물들의 기괴한 소리가 그들의 생각을 빠르게 정리해주었다.
"동의합니다. 뭐든 시켜만 주세요.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요."
정현우가 가장 먼저 손을 내밀었다. 오태식과 한소희 역시 절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진은 정현우의 손을 맞잡으며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눈앞에 첫 거래의 성립을 알리는 듯한 푸른빛의 시스템 창이 조용히 깜빡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