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의 만능 보급상인

27화: 첫 번째 거래와 삼십육빌딩
꿀꺽, 꿀꺽-!
구덕만 선장이 목젖을 크게 울리며 투명한 생수를 정신없이 들이켰다. 차가운 액체가 식도를 타고 넘어가자, 위장 속을 긁어대던 지독한 갈증이 순식간에 씻겨 내려갔다. 석화병의 초기 증상으로 뻣뻣하게 굳어가던 기관지와 피부의 통증이 부드럽게 풀리는 기적 같은 감각에 구 선장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떠졌다.
"이, 이 물은…… 도대체 어디서 난 건가!"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끓이고 걸러도 쇠 냄새와 비릿한 침전물이 남던 오염된 한강 물과는 차원이 다른, 대재앙 이전 문명 시대의 완벽하고 순수한 광천수였다. 구덕만 선장은 남은 물 한 방울까지 털어 마신 뒤, 여전히 트럭을 향해 작살총을 겨누고 있던 보치들을 향해 목청껏 소리쳤다.
"모두 총 내려! 이분들은 우리를 조롱하러 온 게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러 온 진짜 상인들이다!"
경계심 가득하던 보초들이 머뭇거리다 작살총을 내렸다. 강진은 가죽 코트 깃을 가볍게 매만지며 그들을 굽어보았다. 아포칼립스 시대에 가장 강력한 무기는 총탄이나 칼날이 아닌, 생존의 향방을 좌우하는 '보급품'이며, 그 독점적 권능을 쥔 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강진은 다시 한번 뼈저리게 실감했다.
구덕만 선장은 흔들리는 나무 발판을 위태롭게 건너와 강진의 앞에 섰다. 그의 눈빛에는 조금 전까지의 살기 대신 간절함과 절박함이 서려 있었다.
"무례를 범했소.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이런 티 없이 맑은 물을 다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소. 대답하기 곤란하겠지만... 혹시 이 물을 어디서 조달하는 건가요? 정부의 비밀 비축고라도 찾아낸 거요?"
"상인의 조달처는 기밀입니다. 비밀이 유지되어야 가치가 보존되는 법이니까요. 질문보다는 거래에 집중하죠. 제 조건은 명확합니다. 생수 한 병당 마정석 조각 1개, 혹은 그에 상응하는 산업 자원과의 1대1 교환. 동의하십니까?"
"동의하네! 당연히 동의하지!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네. 우리 캠프가 당장 가진 마정석 조각은 150여 개뿐이라네. 한강 바닥은 이미 변종 괴수들 때문에 잠수 채굴이 극도로 위험해서 더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거든."
"150개라. 제가 가져온 생수는 총 2,000병인데, 당신들의 목숨값을 치르기엔 턱없이 부족하군요."
강진의 냉정한 지적에 구덕만 선장은 안절부절못하다가, 바지선 창고 안쪽에 쌓여 있던 목재 궤짝들을 가리켰다.
"알고 있네. 하지만 우리에겐 다른 것들이 있네! 삼십육빌딩(63빌딩 변형) 폐허에서 목숨 걸고 건져온 태양광 인버터와 정밀 공구들, 대형 발전기용 대용량 배터리팩들이 있네. 그리고 한강 밑바닥 고철 더미에서 건져 올린 순도 높은 구리 코일과 티타늄 합금 강판들도 있지. 이것들도 당신의 시스템... 아니, 당신의 기준에 가치가 있겠는가?"
"물건을 가져오십시오. 상인은 가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취급합니다."
잠시 후 주민들이 낑낑거리며 무거운 궤짝들을 들고 오자, 강진은 손을 얹어 시스템 감정을 실행했다. 그의 시야 위로 푸른색 홀로그램 창이 어지럽게 떠올랐다.
[알림: 마정석 조각 150개를 정밀 감정합니다.]
- 개당 헌납 가치: 3 SP (총 450 SP)
[알림: 수집된 문명 기계 부품 및 금속 자원을 감정합니다.]
- 발전기용 산업 배터리팩 3개: 개당 50 SP (총 150 SP)
- 태양광 인버터 및 전동 공구 세트: 합산 가치 100 SP
- 티타늄 합금 판재 및 구리 코일 더미: 합산 가치 100 SP
- 헌납 시 획득 가능 SP 합계: 800 SP
자원들의 총 가치는 800 SP. 반면 강진이 시스템 상점에서 생수를 구매하는 원가는 병당 고작 1 SP였다. 강진의 머릿속 계산기가 주판알을 튕기듯 빠르게 돌아갔다.
'마정석 150개는 계약대로 생수 150병과 교환하고, 나머지 기계 부품들은 관대하게 생수 350병 값으로 쳐준다. 결과적으로 500병의 생수를 넘겨주고 나는 800 SP를 얻는 셈이군.'
생수 500병의 구매 비용은 500 SP. 거래 한 번에 300 SP의 순이익을 보는 폭리였지만, 당장 갈증으로 죽어가는 이들에게는 이보다 자비로운 성자가 없었다.
"좋습니다. 구 선장님. 이 자원들을 모두 포함하여 생수 500병과 즉시 교환해 드리죠."
강진은 트럭에서 생수 상자들을 내리며 구 선장이 가져온 궤짝에 손을 얹었다.
'시스템 헌납 실행.'
스으으으으…….
선상 캠프 주민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철제 궤짝에 담겨 있던 묵직한 배터리와 공구들이 은빛 입자로 분해되더니 공중으로 증발하듯 사라졌다. 귀신을 본 듯 경악하며 비명을 지르는 주민들의 시선을 뒤로한 채, 강진은 머릿속에 울리는 시스템 알림음에만 집중했다.
[알림: 물품 헌납이 완료되었습니다. 총 800 SP가 성공적으로 적립되었습니다.]
[알림: 400 SP를 소모하여 '대아 생수 500ml' 400병을 즉시 보급 구매하였습니다. (나머지 100병은 캠프 정수 물량에서 차감)]
- 현재 보유 SP: 1,611.5 SP (기존 1,211.5 - 구매 400 + 헌납 800)
보유 포인트가 단숨에 1,600 SP를 돌파했다. 하지만 강진의 비즈니스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트럭의 적재함에는 아직도 1,500병의 생수가 탐스럽게 남아 있었다. 강진이 남은 물량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선장님. 남은 1,500병도 전부 필요하십니까? 저걸 다시 요새로 가져가는 것도 낭비인데 말이죠."
"그야 당연히 필요하지! 우리 주민이 아이들까지 합쳐 백 명에 달하네. 500병으론 일주일도 버티지 못해. 하지만... 당장 내놓을 자원이 더는 없네. 저게 우리 전 재산이었어."
"재산이 없다면 신용으로 거래하죠. 남은 생수를 지금 바로 인도할 테니, 2주 내에 마정석 1,500개나 그에 상응하는 산업 부품으로 갚으십시오. 만약 기한을 어기면, 생수 공급은 영구 중단됨은 물론이고 자치구의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될 겁니다."
구덕만 선장은 파격적인 외상 제안에 마른침을 삼켰으나, 이내 현실적인 높은 벽에 부딪힌 듯 고개를 저었다.
"2주 안에 마정석 1,500개는... 우리 어부들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네. 한강 바닥은 물론이고, 자원이 가장 많이 널린 삼십육빌딩(63빌딩)은 이제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괴물들의 소굴일세. 빌딩 지하부터 중층까지 점령한 2성급 마물 '수괴(水鬼)' 군락이 버티고 있고, 꼭대기 층에는 마주치기만 해도 정신이 오염되어 붕괴한다는 '심해의 감시자'가 도사리고 있거든. 우리 수준에선 1층 로비를 몰래 뒤지는 게 한계일세."
강진은 도끼날을 엄지로 만지며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2성급 마물 소굴과 강력한 네임드 몬스터. 생존자들에겐 재앙의 진원지겠지만, 보급상인인 그에겐 막대한 SP와 희귀 장비를 품은 노다지 광산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한강 이남 여의도로 향하는 본격적인 교역로를 뚫기 위해서라도 삼십육빌딩은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죠. 추가 옵션을 제안하겠습니다."
강진이 나직하고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대아 캠프의 정예 원정대가 삼십육빌딩에 직접 진입해, 수괴 군락과 꼭대기의 감시자를 전부 토벌해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방해물을 깨끗하게 치워드릴 테니, 당신들은 안전해진 빌딩에서 자원을 마음껏 채굴하여 빚을 갚으십시오. 7대 3의 수익 배분이면 어떻습니까?"
"자네들이 그 죽음의 성역을 직접 토벌하겠다고?! 아무리 총과 도끼가 있어도 그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야!"
구덕만 선장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마물의 본거지를 직접 타격하겠다는 건 이 미친 세상에서 가장 무모한 자살행위로 들렸기 때문이다. 강진은 대답 대신 품 안에서 묵직한 가죽 양피지 계약서 한 권을 꺼냈다. 만능 보급 시스템이 제공하는 '상인 전용 계약 아티팩트'였다.
[상인 권능: 시스템 강제 계약 체결을 시도합니다.]
- 계약 명칭: 대아-선상 생수 무역 및 영토 정화 협정
- 갑 (공급자): 한강진 (대아 자유 무역 자치구)
- 을 (수요자): 구덕만 (한강 선상 캠프)
- 상세 조항: 생수 1,500병 선대 공급. 14일 이내 마정석 1,500개 상당의 자원 상환. 대아 캠프는 삼십육빌딩의 마물 토벌 및 정화를 책임짐.
- 계약 위반 시, 시스템 권능에 의해 '을'의 자산과 영혼 소유권 일부가 '갑'에게 종속됩니다.
구덕만 선장은 공중에 떠오른 붉은 계약 문양을 보며 설명할 수 없는 압도적인 위압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당장 물이 없으면 캠프의 아이들과 노인들이 가장 먼저 말라 죽을 터였다. 구덕만은 이를 악물고 떨리는 손으로 계약서 하단에 손장을 찍었다.
스우우웅-!
푸른색 계약 문양이 번개처럼 반으로 갈라져 강진과 구덕만의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알림: 정식 무역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업적 달성: '첫 번째 거대 무역로 개설'. 보상으로 500 SP가 즉시 지급됩니다.]
- 현재 보유 SP: 2,111.5 SP (누적 충전 완료)
마침내 보유 포인트가 2,100 SP를 돌파했다. 총과 탄약은 물론, 중화기까지 구매할 수 있는 든든한 밑천이었다.
강진은 만족스럽게 트럭 조수석에 올라탔다. 남은 생수 상자들이 바지선으로 신속하게 인계되는 모습을 보며, 한강의 짙은 안개 속에 유령처럼 잠긴 삼십육빌딩의 거대한 실루엣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한 대리님, 정말 저 거대한 무덤을 치실 생각입니까? 놈들의 숫자가 장난이 아닐 텐데요."
운전대를 잡은 강태훈이 걱정스레 물었다. 강진은 소방도끼의 손잡이를 으스러지게 꽉 쥐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저 거대한 빌딩 전체가 우리에겐 포인트 덩어리이자, 신세계를 향한 노다지이니까요. 상인은 원래 위험할수록 더 큰 이윤을 남기는 법입니다."
한강 이남을 향한 대아 캠프의 본격적인 보급과 정복의 서사가, 차가운 물비린내 나는 강바람을 뚫고 마침내 그 장대한 막을 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