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의 만능 보급상인

2화: 늑대 사냥과 선긋기
물류창고 내부의 공기는 피비린내와 매캐한 밀가루 먼지로 가득 차 있었다.
첫 번째 그림자 늑대의 거대한 몸뚱이가 바닥으로 쓰러지며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강진이 쥐고 있는 도끼날에서 시퍼런 마력의 안개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마수의 단단한 가죽과 뼈를 두부 베듯 갈라버린 위력이었다.
그러나 안도할 틈은 없었다.
"크르르르..."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 두 번째 그림자 늑대가 낮게 으르렁거리며 강진의 주위를 맴돌았다. 녀석의 붉은 안광에는 방금 전의 흉포함 대신, 사냥감에 대한 경계와 낯선 적의 힘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강진은 터질 듯이 요동치는 심장을 억누르며 도끼자루를 쥐어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당황하지 마라. 한강진. 시스템은 분명히 내 정신력이 최상이라고 했다.'
실제로 그랬다. 사지가 찢겨 나가는 인간들의 비명이 들려오고, 바로 앞에 목숨을 위협하는 마수가 으르렁거리는 이 미쳐버린 상황 속에서도 강진의 머릿속은 소름 돋을 정도로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녀석의 빳빳한 회색 털의 움직임, 침을 흘리는 주둥이의 각도, 뒷다리에 들어가는 힘의 방향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쉬익-!
두 번째 그림자 늑대가 기회를 엿보다 마침내 바닥을 박차고 도약했다. 녀석은 첫 번째 늑대처럼 정면으로 들이받는 대신, 창고 측면의 랙(Rack)을 딛고 방향을 꺾으며 강진의 사각지대를 노렸다. 입을 크게 벌린 늑대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강진의 목덜미를 향해 쇄도했다.
"하압!"
강진은 뒤로 물러서는 대신 몸을 낮추며 앞으로 굴렀다.
스치듯 머리 위를 지나가는 괴수의 무거운 몸뚱이와 피비린내 나는 바람. 굴러 착지함과 동시에 강진은 상체를 틀며 도끼를 수평으로 크게 휘둘렀다. [+1 야수 사냥꾼의 도끼]의 날카로운 서릿발 같은 궤적이 어둠을 갈랐다.
서걱-!
"깨애강!"
허공에서 착지하려던 늑대의 뒷다리 하나가 빗겨 나간 도끼날에 단숨에 잘려 나갔다. 균형을 잃은 늑대가 시멘트 바닥 위를 보기 좋게 뒹굴며 고통 섞인 비명을 질렀다.
기회였다. 강진은 늑대가 자세를 추스르기 전에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잘린 다리에서 피를 흘리며 발버둥 치는 늑대의 정수리를 향해, 양손으로 거머쥔 도끼를 수직으로 내려찍었다.
퍼억-!
마치 단단한 수박을 깨뜨리는 듯한 파열음과 함께 늑대의 두개골이 박살 났다. 녀석의 몸뚱이가 몇 번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그림자 늑대(F급)를 처치했습니다.]
[15 SP를 획득했습니다.]
눈앞에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강진의 몸속으로 미약한 열기가 스며들었다. 피로가 조금 가시고 손끝의 저림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강진은 도끼를 바닥으로 내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남은 포인트는 이제 40 SP인가.'
초기 지급받은 100 SP 중 도끼(40)와 강화석(50)을 사고 남은 10 SP. 거기에 그림자 늑대 두 마리를 사냥하며 얻은 30 SP가 더해져 총 40 SP가 되어 있었다. 생명줄과도 같은 재화가 늘어난 것을 보며 강진은 가슴 한구석이 든든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 저기... 한 대리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강진은 고개를 돌렸다.
구석에 넘어져 있던 여직원 임민지 씨가 먼지와 밀가루 범벅이 된 채 떨리는 눈으로 강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강진의 얼굴을 거쳐 그가 들고 있는, 기묘한 푸른 안개를 뿜어내는 소방 도끼에 머물렀다.
"괜찮습니까, 민지 씨? 다친 데는 없고요?"
강진이 도끼를 비스듬히 쥔 채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민지는 강진의 손을 잡고 일어서면서도 다리가 풀려 비틀거렸다.
"네... 네.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그 도끼는... 그리고 방금 그 괴물들은 대체..."
"저도 잘 모릅니다. 갑자기 하늘이 찢어지더니 세상이 미쳐 돌아가네요. 일단 안쪽으로 이동하죠."
그때, 창고 안쪽 사무실 구역의 문이 빼꼼 열리더니 낯익은 얼굴들이 기어 나왔다. 김 부장과 다른 남성 직원 두 명이었다. 그들은 바닥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거대한 괴수 두 마리의 사체와,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채 도끼를 들고 서 있는 강진을 번갈아 보며 침을 삼켰다.
"어... 한 대리. 자네 정말로 저 괴물들을 혼자 잡은 건가?"
김 부장이 조심스럽게 걸어오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까처럼 강진을 하대하던 기색은 싹 사라져 있었다. 대신 기묘한 두려움과 탐욕이 섞인 눈빛이 그 자리를 채웠다.
"보시다시피 그렇습니다."
강진은 무뚝뚝하게 답했다.
김 부장은 바닥에 쓰러진 늑대의 사체를 발로 툭툭 건드려 보더니, 강진의 손에 든 도끼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한 대리, 그 도끼는 어디서 난 건가? 아까는 그런 걸 안 들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소방 도끼가 왜 그렇게 파랗게 빛이 나?"
"창고 구석에 있던 걸 주웠을 뿐입니다. 불빛은 창고 틈새로 들어오는 붉은 하늘 빛이 반사된 거겠죠."
강진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만능 보급 시스템'의 존재를 이들에게 알릴 이유는 전혀 없었다.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자신의 패를 남에게 쉽게 보여주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었으니까.
"주웠다고? 그럴 리가..."
김 부장이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헛기침을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튼, 대단하네 한 대리! 역시 젊은 친구라 몸놀림이 달라. 자, 상황이 상황인 만큼 내가 부장으로서 지시를 내리겠네. 일단 셔터 구멍이 뚫렸으니 다른 괴물들이 들어올지 모르잖아? 저기 있는 캐비닛이랑 무거운 상자들 다 끌고 와서 여기 셔터 구멍부터 막세. 그리고 한 대리는 그 도끼 나한테 잠깐 줘 봐. 내가 들고 경계를 설 테니까."
김 부장이 손을 내밀었다.
강진은 그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불과 몇 분 전, 괴수가 침입했을 때 가장 먼저 비명을 지르며 여직원을 버려두고 사무실로 도망쳤던 자였다. 그런 자가 상황이 정리되자마자 다시 상사 노릇을 하며 무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강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부장님."
"어, 왜 그러나?"
"싫은데요."
"뭐, 뭐라고?"
김 부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뒤에 서 있던 직원들도 당황한 듯 서로 눈치를 보았다.
"한 대리! 지금 자네가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비록 세상이 좀 흉흉해졌어도 직장은 직장이야! 내가 자네 상관이라고! 게다가 이 위기 상황에서는 통제에 따라야..."
"상관이요?"
강진이 도끼를 바닥에 가볍게 쿵 찍었다. 묵직한 쇠붙이가 시멘트 바닥을 때리는 소리에 김 부장이 움찔하며 뒤로 반 걸음 물러섰다.
"방금 저 괴수들이 들이닥쳤을 때, 부장님은 민지 씨를 버리고 가장 먼저 도망치셨습니다. 기억 안 나십니까?"
"그, 그건 불가항력적인 대피였지! 내가 힘없는 민간인인데 어쩌란 말인가!"
"예, 맞습니다. 힘없는 민간인이시죠. 그러니까 그냥 구석에 얌전히 계십시오. 굳이 힘쓰는 일에 끼어들지 마시고."
강진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제 무기는 제 목숨줄입니다. 이걸 왜 부장님께 넘겨야 합니까? 세상이 변했습니다. 폰도 안 터지고 신호등도 다 꺼졌습니다. 밖에서 저런 괴물들이 사람을 찢어 죽이고 있는데, 아직도 회사 직급 타령을 하시는 겁니까?"
강진의 단호한 태도에 김 부장은 입을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평소 묵묵히 시키는 일만 하던 '한 대리'의 눈빛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눈빛은 마치 늑대를 사냥할 때처럼 날카롭고 서늘했다.
뒤에 서 있던 남직원 한 명이 슬그머니 나섰다.
"저, 한 대리님... 그래도 부장님 말씀대로 일단 셔터 구멍은 막아야 하지 않을까요? 다른 괴물들이 들어오면 우리 다 죽습니다."
"그건 맞습니다. 셔터 구멍은 막아야죠. 다들 몸을 움직이세요. 단, 부장님은 지시 내리지 마시고 직접 박스 나르십시오. 놀고먹는 사람은 이 창고에 둘 생각 없습니다."
강진은 그렇게 말하며 차갑게 돌아섰다.
김 부장은 부들부들 떨면서도 강진의 도끼날이 무서워 더 이상 대꾸하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강진의 눈치를 보며 창고 구석에 쌓여 있던 목재 파레트와 대형 철제 드럼통들을 끌고 와 찢어진 셔터 틈새를 빽빽하게 막기 시작했다.
강진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남몰래 시스템 상점을 다시 띄웠다.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는 건 자살행위다. 일단 이 창고를 임시 요새로 삼고, 내 능력을 시험해보며 힘을 길러야 해.'
그는 보관 중인 40 SP를 어떻게 쓸지 고민했다. 상점에 있는 생필품과 무기들의 목록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물류창고 대리로서의 경력이 '만능 보급 시스템'의 특성으로 반영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이 시스템은 단순히 물건을 사는 것뿐만 아니라, 이 넓은 창고 안의 수많은 물자들을 다루는 데도 특화되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때였다.
창고 구석의 어둠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기괴한 마찰음이 다시 한번 들려왔다. 강진의 고개가 번개처럼 그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