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의 만능 보급상인

시놉시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찢어지며 시작된 '대재앙'.
차원의 왜곡 속에서 쏟아진 괴수들과 이상 현상으로 현대 문명은 단 일주일 만에 붕괴했다.
아비규환이 된 세상 속에서 중소 물류 유통업체 '대아로지스'의 물류창고 직원이었던 한강진은 독자적인 생존 능력을 지닌 '만능 보급 상점'의 주인이 된다.
물과 식량이 마르고 총탄 한 발이 목숨의 가치보다 귀한 종말의 시대.
강진은 자신이 가진 독점적 보급 권능을 무기 삼아 아포칼립스 세상을 지배하는 최강의 보급상인으로 거듭난다.
1화: 대재앙의 날과 보급의 시작
"한 대리! 아직도 멀었어? 오늘 내로 남양주 지점으로 보낼 박스 다 실어야 한다고 몇 번을 말해! 맨날 그렇게 굼떠서 얻다 쓰나?"
귀청을 때리는 날카로운 쇳소리. 대아로지스 마포 제3물류창고의 터줏대감이자 온갖 잔소리를 도맡아 하는 김 부장의 목소리였다.
한강진은 이마에서 턱 끝으로 뚝뚝 흐르는 땀을 거친 손등으로 대충 훔쳐내며, 5kg짜리 건조 식자재 박스를 탑차 안으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습도가 80퍼센트를 육박하는 7월의 한여름. 에어컨 필터에서는 곰팡이 냄새가 섞인 미적지근한 바람만 간신히 흘러나오고 있었고, 창고 내부의 열기는 거대한 찜통을 연상케 했다.
"예, 부장님. 이제 거의 다 끝났습니다. 이 파레트 하나만 더 실으면 됩니다."
강진의 대답은 건조했다. 감정이 섞이지 않은, 직장인 특유의 기계적인 말투였다. 3년째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그는 감정을 거세하는 법을 배웠다. 남들은 스마트폰 앱으로 주문만 하면 다음 날 새벽에 현관문 앞으로 물건이 배송되는 편리한 세상이라고 칭송하지만, 그 편리함의 이면에는 강진처럼 좁고 어두운 물류창고에서 땀독이 오른 팔목을 긁어가며 상하차를 반복하는 이들의 노동이 있었다.
대기업인 '숨성물류'나 '롯디로지스' 같은 곳으로 이직하라는 친구들의 조언도 있었지만, 서른 살이 되도록 이렇다 할 스펙도 학벌도 없는 강진에게는 이 허름한 중소기업조차 소중한 밥줄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꾸구구구궁-!
창고 바닥 아래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듯한 기괴한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강하게 전해졌다.
"어, 어? 지진인가?"
지게차 위에서 짐을 내리던 계약직 동료가 깜짝 놀라 운전대를 붙잡았다.
진동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점점 강도가 거세지더니, 창고 천장을 지탱하던 H빔 철골 구조물들이 끼이익, 끼이익 비명을 지르며 요동쳤다. 천장에 쌓여 있던 먼지와 정체불명의 가루들이 눈송이처럼 사방으로 흩날렸다.
"야, 야! 지진이다! 일단 다들 밖으로 대피해! 얼른!"
김 부장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창고 출입구 쪽으로 헐레벌떡 뛰어 나갔다. 강진 역시 직감적으로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장갑을 벗어 던진 채 도끼다시 바닥을 박차고 달렸다.
창고를 벗어나 야외 주차장으로 발을 디딘 순간, 강진은 머리를 강타당한 듯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하늘이 비현실적이었다.
맑고 푸르던 여름 하늘이 아니었다. 서울 마포구 상공 전체를 뒤덮은 하늘이 마치 거대한 거울이 깨지듯 쩍쩍 갈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 벌어진 갈라진 틈새 사이로, 마치 썩은 피를 연상케 하는 진득하고 붉은 빛줄기들이 대지로 거침없이 쏟아져 내렸다.
"저게... 대체 뭐야? 촬영인가? 영화 홍보야?"
"야, 스마트폰 봐봐. 인터넷 먹통인데?"
길가에 차를 대놓고 내린 운전자들과 인근 주민들이 너도나도 하늘을 향해 스마트폰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경이로움과 호기심이 공포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치이이이이이익-!
귀를 찌르는 고압 전류 소리와 함께 소름 끼치는 이명이 강진의 고막을 뚫고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강진의 손에 쥐여 있던 스마트폰의 액정이 파지직 소리를 내며 완전히 꺼져 버렸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로 위를 달리던 수많은 차량의 비상등이 일시에 소등되었고, 교차로의 신호등이 빛을 잃었다. 통제력을 잃은 차량들이 굉음과 함께 연쇄 추돌을 일으켰고, 가로등 유리창이 파지직 깨져 내렸다. 현대 문명을 지탱하던 전자기기와 인프라가 단 일순간에 호흡을 멈춘 것이다.
그리고 그 붉은 하늘의 틈새 속에서, 그것들이 내려앉았다.
처음에는 그저 빗방울이나 검은 얼룩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상에 가까워질수록 그것들은 끔찍한 날갯짓을 하며 형체를 드러냈다. 깃털 대신 파충류의 가죽을 덧댄 것 같은 날개, 썩은 살점이 뚝뚝 떨어지는 주둥이를 가진 거대한 익룡 형상의 마수들이었다.
끼에에에에엑-!
고막이 찢어질 듯한 괴성과 함께 낙하한 마수 한 마리가 길가에서 어리둥절해하던 한 남자의 어깨를 발톱으로 낚아챘다.
"으아아악! 살려줘! 살려..."
남자의 처절한 비명은 허공 속으로 허망하게 사라졌다. 공중에서 찢겨 나간 남자의 몸에서 붉은 피가 소나기처럼 아래로 쏟아졌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아스팔트 바닥 곳곳이 흐물흐물한 진흙처럼 변하더니, 그 안에서 회색의 빳빳한 털을 기른 늑대만 한 괴수들이 떼를 지어 튀어나왔다.
"괴물이다! 괴물이 나타났다!"
"으아악! 내 다리! 내 다리!"
순식간에 마포대로 일대는 붉은 피와 살점이 튀는 아비규환의 지옥도로 변했다.
"한 대리! 뭐 해, 얼른 안 들어오고!"
창고의 무거운 철제 방화 셔터 근처에서 김 부장이 사색이 된 얼굴로 소리치고 있었다. 강진은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고 뒤를 돌아 창고 안으로 다시 뛰어 들어갔다. 그가 발을 들이자마자 직원들이 달라붙어 무거운 셔터를 아래로 쾅 하고 끌어내렸다.
쿵!
단단한 철판이 바닥에 맞닿으며 외부의 끔찍한 소음과 비명을 차단했다. 하지만 내부는 비상 발전기조차 돌지 않는 완전한 암흑이었다. 오직 깨진 틈새 사이로 들어오는 희미한 붉은빛만이 창고 안을 유령처럼 비추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전쟁인가? 북한이 쳐들어온 거야?"
"아니야, 아까 그 괴물들 못 봤어? 그게 어떻게 사람이야!"
"내 휴대폰도 완전히 고장 났어. 액정이 뜨거워지더니 켜지질 않아!"
패닉에 빠진 직원들이 어둠 속에서 웅성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강진은 묵묵히 창고 벽면에 기댄 채 머리를 굴렸다.
대아로지스 물류창고는 샌드위치 판넬로 지어진 가건물이 아니었다. 철근 콘크리트 외벽에 내진 설계가 되어 있는 튼튼한 건물이다. 게다가 식자재와 생필품 유통을 담당하는 곳이라 창고 내부에는 수천 병의 생수와 통조림, 라면 등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외부와 차단된 상태에서 버틴다면 몇 달은 거뜬히 버틸 수 있는 환경이었다.
'외부의 위협만 들어오지 않는다면 말이지.'
강진이 그 생각을 마친 바로 그 순간.
콰아아앙-!
두꺼운 철제 방화 셔터가 안쪽으로 크게 찌그러지며 고막을 찢는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꺄아악!"
"도망쳐!"
무언가 밖에서 셔터를 들이받고 있었다. 끼이이익, 철판을 긁는 날카로운 손톱 소리가 소름 끼치게 창고 내부를 울렸다. 이윽고 쾅 하는 충격과 함께 셔터의 하단부가 찢어지며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그 틈새를 비집고 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괴수—'그림자 늑대' 두 마리가 창고 안으로 기어 들어왔다. 괴수들의 주둥이에는 방금 전 물어뜯은 인간의 붉은 살점과 끈적한 침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크르르르..."
"도, 도망쳐!"
김 부장은 소리를 지르며 가장 먼저 창고 깊숙한 안쪽 사무실 구역으로 달아났다. 다른 직원들 역시 혼비백산하여 랙(물건 적재용 철제 선반) 사이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미처 피하지 못하고 넘어진 여직원 민지 씨의 위로, 그림자 늑대 한 마리가 무서운 속도로 도약했다.
"아..."
공포에 질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그녀를 향해 괴수의 날카로운 앞발이 내리꽂히려는 찰나.
강진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직였다. 그는 옆에 놓여 있던 플라스틱 파레트를 두 손으로 꽉 쥐고, 온 힘을 다해 늑대의 옆구리를 향해 휘둘렀다.
빡-!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늑대의 몸뚱이가 옆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견고하던 플라스틱 파레트는 단 한 번의 충격에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강진의 두 팔은 전기 충격을 맞은 듯 짜르르하게 저려왔다. 인간의 근력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 무지막지한 맷집이었다.
"크어어어억!"
공격을 당해 분노한 그림자 늑대가 붉은 눈동자를 굴리며 강진을 쏘아보았다. 괴수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썩은 고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늑대가 바닥을 박차며 강진의 목덜미를 노리고 쇄도했다.
'죽는구나.'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가 시야를 덮쳐오던 바로 그 순간, 강진의 눈앞에 세상의 모든 빛을 삼킨 듯한 파란색 시스템 반투명 창이 떠올랐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피지배 문명의 종말 선언에 따라, 행성 시스템이 설치됩니다.]
[사용자 '한강진'의 적격 여부를 심사합니다...]
- 신체 능력: 하(下)
- 정신력: 최상(最上)
- 고유 특성: 물류 관리 및 유통 (직업 이력 반영)
[심사 완료. 고유 권능 '만능 보급 상점(EX)'을 각성합니다.]
[최초 각성 보너스로 100 SP(보급 포인트)가 지급됩니다.]
"이게... 뭐야?"
눈앞의 기이한 글자들을 바라보는 와중에도, 늑대의 발톱이 강진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강진은 본능적으로 바닥을 굴러 상자 더미 너머로 몸을 던졌다. 콰직! 그가 조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에 쌓여 있던 박스들이 단숨에 찢겨 나가며 하얀 밀가루 가루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밀가루 먼지 속에서 기침을 토해내며 일어난 강진의 눈앞에 여전히 푸른빛의 상점 창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
[보급 상점 (Level 1)]
- 사용 가능 SP: 100 SP
- 판매 목록:
- 생수 500ml (1 SP)
- 군용 비상 전투식량 (2 SP)
- 보급용 구급상자 (10 SP)
- 보급용 소방 도끼 (40 SP)
- 임시 무기 강화석 [F급] (50 SP)
- 기초 물리 방어막 주문서 [일회성] (80 SP)
머리가 터질 것 같은 혼란 속에서도, 3년간 물류창고에서 단련된 강진의 이성은 빠르게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효율을 계산해내고 있었다.
단순히 소방 도끼만 사서는 저 괴수의 단단한 가죽과 근육을 뚫을 수 없다. 아까 파레트가 부서지던 위력을 생각하면 일반적인 철제 무기로는 유효타를 주기 힘들 터였다. 무기를 강화해야만 했다.
"4번 보급용 소방 도끼 구매! 그리고 5번 임시 무기 강화석 구매!"
강진이 속으로 다급하게 소리쳤다.
[40 SP가 소모되었습니다. '보급용 소방 도끼'가 인벤토리에 지급됩니다.]
[50 SP가 소모되었습니다. '임시 무기 강화석[F급]'이 인벤토리에 지급됩니다.]
[남은 SP: 10 SP]
그와 동시에 강진의 오른손에 묵직하고 차가운 쇠붙이의 촉감이 쥐어졌다. 붉은색 강철 자루에 날이 시퍼렇게 선 소방 도끼였다. 그리고 그의 왼손에는 은은한 푸른빛의 마력을 내뿜는 조그마한 돌멩이가 쥐어졌다.
그는 망설임 없이 왼손의 강화석을 도끼 날에 갖다 대며 마음속으로 외쳤다.
'강화!'
화아아아악-!
왼손의 강화석이 고운 모래가 되어 스러지며 소방 도끼 날 속으로 흡수되었다. 이윽고 도끼의 철제 날 위로 시퍼런 서릿발 같은 마력의 궤적이 덧씌워지며, 날 끝이 예리하게 벼려졌다.
[강화 성공!]
[보급용 소방 도끼 -> '예리하게 단련된 야수 사냥꾼의 도끼 [+1]' (등급: 일반)]
- 특수 효과: 야수형 몬스터 타격 시 물리 관통력 20% 증가.
"크르르릉!"
밀가루 먼지를 헤치고 그림자 늑대가 다시 한번 강진을 향해 날아올랐다. 거대한 입을 벌린 채 목덜미를 씹어 삼키려는 괴수의 움직임이, 이상하게도 강진의 눈에는 조금 전보다 느리게 느껴졌다. 정신력 '최상'의 효과 때문인지, 극도의 긴장감이 그의 감각을 예민하게 일깨운 덕분이었다.
강진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도끼의 손잡이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허리의 반동을 이용해 아래에서 위로 힘껏 도끼를 치켜 올렸다.
서걱-!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감각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뼈를 부수고 질긴 가죽을 짓이기는 불쾌한 저항감이 아니었다. 물 위에 칼을 긋는 듯한, 기이할 정도의 매끄러움이었다.
퍼어억!
늑대의 가슴팍부터 목덜미까지 일직선으로 깊은 자상이 그려지며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공중으로 뿜어졌다.
"깨갱!"
치명상을 입은 늑대가 바닥을 뒹굴며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시퍼런 도끼날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보급 시스템을 통해 강화된 무기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림자 늑대(F급)를 처치했습니다.]
[15 SP를 획득했습니다.]
"이게... 정말로 되는구나."
강진이 거친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피가 끓는 듯한 전율이 척수를 타고 뻗어 나갔다.
아직 한 마리가 더 남아 있었다. 동료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한 두 번째 그림자 늑대는 더 이상 무모하게 덤벼들지 않았다. 녀석은 몸을 최대한 낮춘 채, 으르렁거리며 강진의 주위를 천천히 맴돌기 시작했다. 녀석의 붉은 눈동자에는 명백한 경계와 살의가 담겨 있었다.
강진은 가쁘게 차오르는 숨을 고르며 도끼를 고쳐 쥐었다.
창고 밖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의 절박한 비명소리와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현대 문명은 무너졌고, 세상은 약육강식의 지옥으로 변했다.
하지만 그 지옥 같은 어둠 속에서, 한강진은 도끼날의 시퍼런 빛을 받으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생존을 위한 만능 보급의 상점이 이제 막 문을 열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