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의 만능 보급상인

15화: 방어막 외부의 포식자
"전원, 바닥에 엎드리세요! 소리 하나라도 밖으로 새어 나가면 우린 여기서 전부 몰살입니다!"
강진의 가라앉은 나직한 명령에 물류창고 내부의 19명의 생존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숨을 들이켰다. 정현우는 다급하게 돌아가던 간이 발전기의 메인 스위치를 내리고 모든 통신 기기의 전원을 차단했다. 순식간에 창고 내부는 무거운 암흑과 눅진한 침묵으로 채워졌다. 오직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와 요동치는 심장 박동 소리만이 창고의 넓은 천장을 유령처럼 맴돌았다.
쿠구구구궁-! 쿠웅!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창고 시멘트 바닥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창고 중앙을 지탱하던 굵은 H빔 철골들이 비명을 지르듯 끼이익 소리를 냈다.
대아 물류창고 주변을 감싸고 있는 투명한 푸른색 마력 방어막 너머 마포대로변에서, 수십 마리의 괴수들이 일제히 대로를 짓밟으며 질주하는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마포대교 위의 거대 고치들에서 부화하여 쏟아진 '진화된' 괴수 무리였다.
"키샤아아아-!"
"우르르릉! 콰직!"
이전에 보았던 왜소하고 비겁한 고블린이나 그림자 늑대 따위가 아니었다. 굵은 팔다리에 질긴 악어가죽을 덧댄 것 같은 이족 보행 마수들과, 거대한 멧돼지만 한 크기에 등 뒤로 날카로운 가시 뼈가 돋아난 갑각 괴수들이 거칠게 주차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녀석들이 아스팔트를 짓밟을 때마다 돌가루가 사방으로 튀었고, 찌그러진 차량들이 녀석들의 발밑에서 깡통처럼 뭉개졌다.
괴수들의 무시무시한 포효와 거친 발걸음이 철제 격벽 바로 앞을 스쳐 지나갔다.
피난민들은 격벽 틈새로 바깥을 내다보다가 공포심에 심장을 움켜쥐었다. 괴수들의 거대한 몸뚱이가 셔터 격벽에서 불과 수 미터 거리의 주차장을 가로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녀석들 중 한 마리라도 고개를 돌려 이쪽을 들이받는다면, 문명 시대의 건축물 따위는 단숨에 무너져 내릴 기세였다.
하지만 마력 방어막의 '탐색 차단 필터'는 완벽하게 제 기능을 수행했다.
내부의 빛도, 소리도, 심지어 생존자들의 생생한 체취조차 방어막 표면에서 정교하게 굴절되어 밖으로 단 1%도 새어 나가지 않았다. 괴수들은 눈앞에 거대한 물류창고가 버젓이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아무것도 없는 빈 공터나 폐허 더미를 지나치듯 킁킁거리며 그냥 마포대로 앞쪽으로 질주해 지나갔다. 그들에게 이 창고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지... 지나간다... 살았어..."
박 대리가 안도하며 다리가 풀려 랙 선반을 짚었다. 사람들의 얼굴에 맺혀 있던 식은땀이 그제야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강진의 선견지명으로 밤새 400 SP라는 거금을 들여 방어막 생성기를 설치해두지 않았다면, 이 거대한 학살자 무리와 정면으로 조우해 캠프 전체가 짓밟혀 전멸했을 터였다.
그렇게 거대한 무리가 다 스쳐 지나가며 위기를 넘기나 싶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쿵-!
주차장 바닥을 딛는 다른 것들보다 압도적으로 육중하고 끈적한 발소리가 격벽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강진은 미세하게 빛나는 시스템 마력 감지 판넬을 보았다. 감지 판넬의 한가운데, 방어막의 경계선 바로 위에 거대한 붉은 점 하나가 멈춰 서서 불길하게 이글거리며 명멸하고 있었다.
강진은 격벽의 좁은 관측구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몸길이가 4미터에 육박하는 괴수—E급 상위 몬스터이자 마포구 일대의 포식자로 군림하기 시작한 '심연의 불독'이었다. 머리가 전체 몸통의 절반을 차지하는 기괴한 불독 형상의 괴수로, 턱 밑에는 썩은 가시들이 종양처럼 돋아나 있었고 세 개의 핏빛 안광이 얼굴 전면에 불규칙하게 배열되어 번뜩이고 있었다.
"크르르릉... 킁, 킁..."
심연의 불독은 방어막 경계선 바로 앞에서 코를 땅에 쳐박은 채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있었다. 녀석의 비정상적으로 예민한 후각과 감각이 방어막 표면에 일렁이는 미세한 마력 파동을 포착해낸 모양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보이지 않는 벽'의 존재가 녀석의 공격성을 자극했다.
녀석이 의심 가득한 안광을 번뜩이며 앞발을 뻗어 방어막을 툭 건드렸다.
파지직-!
푸른 마력 격벽과 녀석의 억센 발톱이 맞닿으며 공중에서 청백색의 전자기 스파크가 튀었다.
"캬아아아악-!"
자신의 앞발에 튄 마력 전류에 자극을 받은 괴수가 날카롭게 울부짖으며 두 앞발을 휘둘러 방어막을 거칠게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녀석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커먼 마기가 방어막의 표면을 잠식하듯 흘러내렸다.
깡! 깡! 파지직-!
방어막 생성기의 보조 상태판의 수치가 위험한 붉은색으로 깜빡이기 시작했다.
- 실시간 방어막 내구도: 98%... 95%... 91%... 88%!
"한 대리님! 저 괴물이 장벽을 직접 타격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두면 장벽 기둥이 뽑히거나 보호막이 깨질 것 같습니다!"
지켜보던 최덕팔이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다급하게 속삭였다.
강진의 머릿속 계산기가 차갑게, 그리고 빠르게 돌아갔다. 방어막은 침입 저항률 80%를 자랑하지만, 저 무지막지한 괴수가 지능적으로 한 지점만을 집중 타격하면 내구도가 급격히 소모되어 결국 방어막이 깨지거나 은신 필터가 해제될 터였다. 그렇게 되면 저 멀리 국도를 따라 지나가던 다른 마수들까지 이 소란을 듣고 굶주린 승냥이처럼 되돌아올 게 뻔했다.
다른 괴수들이 소리를 듣고 합류하기 전에, 저 불독 녀석을 장벽 밖으로 나가 신속하고 조용하게 처리해버려야 했다.
강진은 격벽의 수동 잠금 고리로 손을 뻗었다.
"태훈 씨, 박 대리님. 격벽 안에서 보조 철문을 사수하십시오. 제가 나가자마자 문을 닫고 안쪽에서 걸쇠를 거세요. 절대 제 허락 없이 장벽 밖으로 나오지 말고 문 뒤를 엄호하십시오. 저 녀석은 제가 장벽 밖에서 직접 처리합니다."
"자네 미쳤나? 저 괴물 덩치를 봐! 아무리 총이 있어도 혼자 나가는 건 자살행위야!"
강태훈이 놀라 강진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지만, 강진은 냉정하게 그 손을 뿌리쳤다. 그의 눈빛은 이미 사냥에 나선 맹수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방어막이 깨지면 어차피 우린 여기서 다 같이 굶주린 짐승들의 먹잇감이 될 뿐입니다. 녀석이 장벽에 정신이 팔려 있는 지금이, 뒤를 잡고 기습하기 가장 좋은 타이밍입니다. 저를 믿으세요."
강진은 가죽 코트 안쪽 권총집에서 [보급용 리볼버 권총]을 꺼내 약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오른손에는 [+1 야수 사냥꾼의 도끼]를 고쳐 쥐었다. 그가 입고 있는 [보급용 가죽 갑옷]이 은은한 마력 광을 뿜으며 그의 신체를 견고하게 보호하기 시작했다.
스윽-.
강진은 보조 철문을 소리 없이 한 뼘 정도 열고, 몸을 좁혀 방어막 밖의 축축한 안개가 서린 주차장 한복판으로 날렵하게 몸을 던졌다.
차가운 아침 공기와 비릿한 괴수의 악취가 폐부 깊숙이 스치는 순간, 방어막을 긁어대던 심연의 불독의 세 안광이 번개처럼 강진의 심장 부근을 향해 고정되었다.
"크어어어억-!"
지옥의 포식자가 누런 침을 흘리며 마침내 새로운 먹잇감을 향해 지면을 박차고 쇄도하기 시작했다. 강진은 도끼 손잡이를 으스러지게 움켜쥐며, 녀석의 미간 정중앙에 위치한 제3의 눈을 노리고 자세를 낮췄다. 생존을 건 진검승부의 서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