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의 만능 보급상인

116화: 대지의 비명과 2차 대피령
하늘에서 붉은 포자가 눈송이처럼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름답지만 기괴하고 치명적인 붉은 함박눈이었다. 하늘을 가득 메운 이 미세한 포자 결정들은 지상에 닿는 모든 물리적 물질의 질감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아스팔트 도로는 딱딱하게 굳은 붉은 수정판으로 변했고, 녹슨 강철 전신주와 콘크리트 빌딩 벽면은 유리처럼 바스러지는 마력 석조로 결정화되었다.
무생물뿐만이 아니었다. 방독면 틈새나 피부 노출을 통해 이 결정형 포자를 호흡한 생물들은 몸 내부에서부터 혈관이 굳어 들어가며 돌처럼 변하는 끔찍한 석화 현상을 겪었다. 바깥세상은 이제 단순한 재난 구역을 넘어, 필사적인 생명체가 단 1초도 날것으로 노출될 수 없는 적대적인 이계의 영토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전 구역에 제2차 대대피령(Great Evacuation Order)을 선포합니다!”
인류 생존 연합의 총사령실 스피커를 통해 한강진의 단호한 명령이 울려 퍼졌다.
“용산, 여의도, 강남을 포함한 연합의 모든 외곽 지부 생존자들은 현 시간부로 모든 거점을 포기하고 철수하십시오. 피난처는 단 두 곳입니다. 대형 마력 방어막이 가동 중인 ‘대아 자치구 본대’와 지하 방어망이 보강된 ‘네오 코리아 방공호’뿐입니다. 이동 경로는 오직 지하철 노선 내부의 정화 터널로 제한합니다.”
대피령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서울 전역의 연합 지부들로 전달되었다.
바깥의 대기는 이미 붉은 결정 안개로 자욱하여 지상 차량 이동은 자살행위였다. 연합은 미리 개척해 둔 지하철 5호선과 인접 지하 노선 통로를 피난 통로로 설정하고, 그동안 구축해 놓은 마도 정화 아티팩트와 방호벽을 총가동해 지하 안전지대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피는 결코 순탄치 않았다.
- “본부! 여기는 용산 피난 열차 호위대인 3분대다! 용산역을 출발해 지하철 터널을 통해 마포 방면으로 이동하던 중, 터널 중간 지점의 선로가 무너져 열차가 멈춰 섰다! 그리고…… 균열 구역에서 붉은 수정을 몸에 두른 ‘결정형 포자 야수’ 떼가 선로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탄약이 부족하다! 구조가 필요하다!”
무전기 너머로 총성과 괴수들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지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섞여 들어왔다.
사령실 화면의 실시간 전술 맵에 용산과 마포 사이의 선로 구간이 적색 경보등으로 깜빡이기 시작했다. 열차에 탑승한 피난민의 숫자만 해도 어린이와 임산부를 포함해 500명이 넘는 대규모 인원이었다.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강진은 지체하지 않고 소총을 고쳐 멨다.
“태훈아, 장갑차 대신 지하 선로 주행이 가능한 ‘마도 궤도차’를 대기시켜라. 그리고 새로 해금된 대결정형 무기들을 적재해.”
“수신 완료!”
태훈이 거칠게 경례하며 달려 나갔다. 강진은 이동하는 동안 시스템 상점을 열어 상황에 맞는 특화 보급품들을 물색했다. 이번 적들은 일반 마수보다 강도가 몇 배는 단단하고 마법 저항력이 높은 결정체 괴물들이었다. 그들을 파괴하려면 강한 충격 진동이나 초고열이 필요했다.
[만능 보급 상점 (등급: EX) - 대결정형 병기 카테고리]
상품명: 마도 초음파 공진기 (D등급 아티팩트 소모품)
효과: 특정 진동수파를 방출하여 단단한 마력 결정 구조의 결합을 분해하고 파쇄함.
가격: 개당 120 SP
상품명: 중형 플라즈마 분쇄 소총
효과: 단단한 장갑과 수정체를 녹여버리는 초고열 마도 열선 포를 연속 발사함.
가격: 정당 350 SP
강진은 거침없이 포인트를 소모해 무기들을 소환했다.
[2,400 SP를 소모하여 마도 초음파 공진기 10개와 플라즈마 분쇄 소총 3정을 소환합니다.]
- 현재 보유 SP: 10,203.5 SP
소환된 장비들을 마도 궤도차에 싣고, 강진과 태훈은 선로를 따라 맹렬한 속도로 질주했다. 어두컴컴한 지하철 터널 내부를 궤도차의 전조등이 길게 비추었다. 터널 벽면 곳곳에 벌써 붉은 수정들이 곰팡이처럼 피어나 지하철 벽면을 갉아먹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로 중간에 멈춰 서 있는 피난 열차와 그 주변을 감싸고 전투를 벌이는 호위 대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대원들은 열차 지붕과 선로 바닥에 엄폐한 채 총을 쏘아댔지만, 온몸이 붉은 보석처럼 단단한 외피로 둘러싸인 변종 사냥개들과 고릴라 형상의 괴수들은 총탄을 맞으면서도 멈추지 않고 돌진해 왔다. 총탄이 수정 가죽에 맞고 도탄되어 터널 벽면에 불꽃을 튀겼다. 수십 마리의 괴수들이 열차 객차 유리창을 부수기 위해 발톱을 휘두르고 있었고, 객차 내부의 생존자들은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강진이 탄 궤도차가 현장에 들이닥치자마자, 강진은 마도 초음파 공진기 하나를 활성화하여 괴수 무리 한가운데로 던졌다.
우우우우우웅-!
공진기가 바닥에 닿자마자, 고주파의 미세한 은빛 진동 파동이 터널 사방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 진동 파동이 괴수들의 몸에 닿은 순간, 딱딱하게 빛나던 붉은 수정 피부에 거미줄 같은 미세한 균열이 생기며 강도가 극도로 약화되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플라즈마 소총 사격!”
강진의 명령과 함께 태훈과 정예 대원들이 플라즈마 분쇄 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화아아아아악-!
눈부신 청백색의 고열 열선이 터널을 가르며 균열이 간 괴수들의 수정 가죽을 관통했다. 유리 깨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괴수들의 단단한 몸체가 사방으로 산산조각이 나며 무너져 내렸다.
“살았다! 보급 소장님이다!”
대원들이 환호하며 더욱 맹렬하게 잔당들을 사격했다. 강진 역시 권총을 연사하며 괴수들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단 5분 만에 열차를 포위하고 있던 수십 마리의 변종 포자 괴수들은 하얀 가루와 붉은 보석 조각들로 화해 바닥에 뒹굴었다.
강진은 궤도차에서 내려 다급하게 선로 복구 작업을 지시했다.
“이곳의 붕괴된 선로는 임시 마도 레일 아티팩트로 대체하겠습니다. 신속하게 열차를 이동시키십시오.”
강진이 손을 내밀어 무너진 선로 위에 임시로 푸른 광원의 마도 레일을 소환해 연결하자, 멈춰 서 있던 피난 열차가 덜컹거리며 다시금 마포와 영등포 본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차 창가에 매달려 눈물을 흘리며 경례를 보내는 생존자들을 바라보며, 강진은 호흡기를 고쳐 썼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서울 전체가 붉은 수정의 무덤으로 변해가는 이 가혹한 대재앙 속에서, 남은 인류를 지키고 최종 승리를 거머쥐기 위한 대전쟁의 서막이 이제 막 그 핏빛 첫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