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에서 평화로운 지구로 출퇴근합니다

6화: 새 패킹의 값
푸른 균열이 꺼지자 강민혁의 무릎이 먼저 꺾였다.
어깨에 멘 생수 묶음이 콘크리트 바닥을 세게 찍었다. 방수포 아래에는 필터 부품 상자가 있었다. 물 스물아홉 킬로그램과 부품 열세 킬로그램. 손전등과 줄자와 방수포까지 더한 무게가 허리를 아래로 끌어당겼다.
청동 문은 닫혔다. 가슴 안쪽의 압박도 사라졌다.
하지만 민혁은 바로 일어서지 못했다. 문을 넘을 때마다 남는 피로는 마치 누군가가 어깨에 손을 올리고 한참 뒤에야 떼는 것 같았다.
보일러실 바깥에서 발소리가 멎었다.
"또 나갔다 왔나 보네. 이번에는 뭘 들고 왔어?"
천막 틈으로 장재복의 얼굴이 보였다. 윤대섭 밑에서 심부름을 하던 남자였다. 그의 시선은 민혁보다 방수포에 먼저 붙었다.
민혁은 몸을 일으켜 짐 앞을 막았다. 방수포 끝을 발로 밟은 뒤 생수 두 병만 꺼내 바닥에 굴렸다.
"통로 지나는 값입니다. 더 묻지 마세요."
재복은 병을 들어 라벨을 훑었다. 투명한 플라스틱과 선명한 글자가 지하의 흐린 전등 아래에서 유난히 눈에 띄었다.
"대섭 형님은 출처를 궁금해하시는데. 물만 나오는 구멍도 아니고."
"궁금한 건 아침에 해도 됩니다. 지금은 정화기가 먼저예요."
그때 천막 반대편이 들렸다. 한소희가 기름 묻은 장갑을 낀 채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는 녹슨 렌치가 들려 있었다.
"말 시킬 거면 네가 2번 라인 돌릴래?"
소희의 목소리가 보일러실에 차갑게 울렸다.
"아침 물도 없이 사람들 깨우고 싶으면 계속 잡아 둬."
재복은 입술을 비틀었다. 그래도 생수 두 병을 품에 안고 천막 밖으로 물러났다. 발소리가 멀어진 뒤에도 민혁은 잠시 방수포를 놓지 않았다.
소희가 그 손을 흘끗 봤다.
"그렇게 지킬 만한 게 들었나 보네."
"일단은요."
"일단이라는 말은 싫지만 들어와. 2번이 방금 또 울었어."
보일러실 안은 이전보다 더 축축했다. 바닥 홈을 따라 검은 물이 흐르고 철제 하우징 아래에는 누렇게 부푼 걸레가 널브러져 있었다. 소희가 손전등을 비추자 필터 통 옆 이음새에서 물방울이 빠르게 맺혔다.
"기존 카트리지는 막혔어. 압력은 자꾸 새고 우회 밸브는 잠가 놨지. 이대로 두면 새벽 전에 완전히 멎어."
민혁은 부품 상자를 열었다. 하얀 원통 네 개와 고무 패킹 묶음, 손바닥만 한 밸브 두 개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소희는 카트리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잠깐 기대가 스친 얼굴이 곧 굳었다.
"길이는 맞아. 지름도 크게 틀리지 않고."
그녀가 카트리지의 끝을 기존 하우징에 대 봤다.
"그런데 나사산이 달라. 이대로는 못 끼워."
"고칠 수 있습니까?"
"고친다는 말이 편하네. 지금부터는 망가진 걸 덜 망가지게 만드는 거야."
소희는 낡은 분배관 끝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얇아진 금속에서 둔한 소리가 났다.
"여기 관을 잘라서 패킹을 겹쳐 물리고 밸브 하나를 옆으로 빼야 해. 압력을 나누면 버틸 수는 있겠지. 대신 패킹 두 개는 묻어 버리는 셈이야."
"필요한 만큼 쓰죠."
"나중에 없다고 하지 마."
"그 말은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소희의 입가가 잠깐 움직였다.
"말은 잘하네. 물부터 퍼."
작업은 말보다 느렸다. 민혁은 바닥에 고인 물을 양동이로 퍼냈다. 소희는 쇠톱으로 분배관 끝을 잘라 내고 새 패킹을 두 겹으로 접어 이음새에 밀어 넣었다. 잘린 배관의 날카로운 끝이 그녀의 장갑을 긁을 때마다 고무 냄새가 습기 속에 번졌다.
"빛 더 위로."
민혁이 손전등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비추면 네 그림자만 보여. 왼쪽으로."
"처음부터 왼쪽이라고 하든가요."
"지금 정확하게 말하고 있거든."
빈정거림은 이어졌지만 손은 멈추지 않았다. 민혁은 수동 펌프 손잡이를 잡았다. 소희가 새 밸브의 손잡이를 아주 조금 열었다.
철제 통 안에서 낮은 울림이 났다.
"천천히 돌려."
민혁은 펌프를 반 바퀴 밀었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순간 패킹을 감싼 이음새가 벌어지며 검은 물줄기가 옆으로 튀었다.
방수포가 순식간에 젖었다.
"멈춰!"
민혁은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소희가 밸브를 잠그려 했지만 녹슨 축은 반쯤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바닥으로 쏟아진 물이 통로 쪽으로 번졌다.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물 새는 거야?"
"또 끊기는 거 아니야?"
소희는 이를 악물었다.
"방수포 줘. 아니, 그건 너무 얇아. 가장자리 찢어서 감아."
민혁은 방수포 끝을 양손으로 잡아 뜯었다. 젖은 천을 이음새 위로 여러 겹 감고 팔꿈치까지 밀어 넣었다. 차가운 물이 손목을 타고 흘렀다.
소희가 렌치로 밸브 축을 두드렸다. 한 번. 두 번. 금속이 비명을 내더니 손잡이가 아주 조금 돌아갔다.
"지금!"
민혁은 온몸을 이음새에 실었다. 소희가 밸브를 닫자 물줄기는 가느다란 떨림으로 줄었다. 방수포 틈으로 새는 물이 손등을 적셨지만 더는 바닥으로 뻗지 않았다.
통로 입구에 재복이 다시 나타났다. 그의 뒤에는 빈 물통을 든 사람들이 서 있었다. 고인 물을 보고 불안해진 눈들이 보일러실 안을 훑었다.
"대섭 형님이 물었습니다. 이거 누구 물건이냐고."
민혁은 대답 대신 생수 묶음 하나를 끌어당겼다. 여섯 병 중 두 병은 이미 재복에게 건넸다. 남은 네 병을 통로 바닥에 내려놓았다.
"오늘 밤 줄 물입니다. 줄 서서 나눠요. 여기 들어오면 다 같이 못 마십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병에 붙었다.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도 들렸다. 재복은 더는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소희는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금속 고리를 패킹 위로 조였다.
"다시 돌려. 이번에는 숨 쉬듯이."
민혁은 펌프를 밀었다. 물이 필터 통을 지나가는 소리가 났다. 이음새는 젖었지만 터지지 않았다.
소희가 출수관 아래에 컵을 받쳤다.
처음에는 갈색 물이 몇 방울 떨어졌다. 그녀는 컵을 비웠다. 두 번째 물줄기는 흐렸고 세 번째부터는 바닥의 녹빛이 조금씩 옅어졌다.
소희는 컵을 들어 냄새를 맡았다. 한 모금은 마시지 않고 입술에만 적셨다.
"완전한 물은 아니야. 그래도 배급용으로는 버틴다."
민혁은 컵 바닥에 남은 맑은 물을 오래 봤다. 현대에서 병째로 가져온 물과는 달랐다. 그래도 이 물은 이곳의 배관을 타고 더 많은 사람에게 갈 수 있었다.
통로의 아이 하나가 어른들 다리 사이에서 컵을 내밀었다. 컵 가장자리는 여러 번 깨진 것을 철사로 묶어 둔 모양이었다. 물이 한 모금 담기자 아이는 바로 마시지 않고 옆에 선 여자에게 먼저 내밀었다.
민혁은 시선을 거두었다. 저 물을 공짜로 준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다음번에도 같은 말을 요구할 것이다. 그렇다고 물이 흐르는 순간만 보고 돌아서면 오늘 밤 들인 부품도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물이 아니라 시간을 내준 셈으로 생각했다. 정화기가 돌아가는 시간. 소희가 필요한 목록을 적을 시간. 윤대섭이 손을 뻗기 전에 다음 물자를 계산할 시간.
그 시간의 끝에는 반드시 대가가 붙을 것이다. 민혁은 그 대가를 남에게 정하게 둘 생각이 없었다.
소희는 하우징 옆 바닥을 가리켰다. 우회 밸브 아래에 젖은 발자국 하나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이상하네."
"뭐가요?"
"밸브 위치가 내가 잠가 둔 곳이랑 달라. 내가 틀렸을 수도 있지만."
그녀는 말을 끝내지 않았다. 민혁도 발자국만 바라봤다. 누가 일부러 만졌다는 증거는 없었다. 다만 정화기가 멎으면 물 배급표를 새로 쥘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통로 밖에서 재복이 누군가에게 낮게 보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민혁은 남은 부품 상자를 방수포 아래로 밀어 넣었다.
"오늘 쓴 건 기록합시다. 다음에 같은 걸 더 구해야 하니까."
"같은 것만 있어서는 안 돼. 호환 어댑터가 있어야 해. 패킹도 더 필요하고."
소희는 젖은 장갑을 벗었다.
"이건 하루 반 정도 버티는 임시야. 그 뒤에는 다시 뜯어야 해."
"그동안 필요한 걸 적어 주세요."
소희가 민혁을 똑바로 봤다.
"정말 구해 올 수 있어?"
민혁은 방수포를 정리했다. 설명할 수 없는 길을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구할 수 있는 것과 못 구하는 것을 나눠 적어 주세요. 내가 판단하겠습니다."
잠시 뒤 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대신 네 물자는 내 정화기 안에서만 써. 대섭 쪽 장부로 넘기면 내일은 네가 아니라 물건부터 뺏겨."
"그건 나도 원하지 않습니다."
새벽이 가까워질 무렵 2번 라인의 물은 가느다란 줄기로 계속 떨어졌다. 통로의 사람들은 작은 컵을 들고 줄을 섰다. 민혁은 생수 네 병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손해를 세지 않았다.
그 병들이 만든 것은 고마움이 아니었다.
작업할 시간이었다.
보일러실을 나서려던 재복이 돌아보았다.
"대섭 형님이 아침에 보자십니다. 공급처 얘기, 그때는 좀 길게 합시다."
민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품 안쪽에는 젖지 않게 넣어 둔 명함이 있었다. 이진우. 다음 낮, 마포의 감정소.
정화기에는 하루 반의 시간이 생겼다. 그 시간 안에 어댑터와 새 패킹을 마련해야 했다.
그리고 값을 붙일 돌이 정말 보급로를 열 수 있는지도 확인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