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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에서 평화로운 지구로 출퇴근합니다7화

아포칼립스에서 평화로운 지구로 출퇴근합니다

아포칼립스에서 평화로운 지구로 출퇴근합니다

7화: 값이 붙는 돌

급수 통로의 아침은 물 냄새보다 종이 냄새가 먼저 났다.

2번 라인에서 떨어지는 물은 여전히 가늘었다. 그래도 전날과 달리 컵 바닥에 녹빛은 거의 남지 않았다. 사람들은 젖은 벽에 등을 붙인 채 물표를 받아 들었다. 줄 끝의 아이는 제 차례가 오기 전에 몇 번이나 빈 컵을 들여다봤다.

윤대섭은 통로 한가운데에 낡은 접이식 책상을 펴 놓고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배급 장부와 물표 묶음이 가지런했다. 그의 손가락이 물표 한 장의 모서리를 천천히 접었다.

"정화기가 살아났으면 장부도 살아나야지."

대섭이 민혁을 올려다봤다.

"어젯밤에 들고 온 부품이 몇 개지? 남은 건 어디에 뒀고 공급처는 어딘데? 다 적어. 관리해야 하니까."

민혁은 그의 책상 위에 종이 한 장을 내려놓았다. 소희가 밤새 기름 묻은 손으로 적은 목록이었다. 호환 어댑터 두 개. 패킹 여덟 개. 예비 밸브 하나.

맨 아래에는 짧은 경고가 있었다. 압력 상승 금지. 하루 반 이상 보장 불가.

"배급량은 적으세요."

민혁이 말했다.

"부품은 정화기 관리 물자입니다."

대섭의 눈썹이 아주 조금 들렸다.

"누가 관리하는데?"

"고칠 줄 아는 사람이요."

바로 뒤에서 금속이 바닥을 치는 소리가 났다. 한소희가 렌치를 손바닥에서 놓았다. 그녀는 밤새 갈아 입지 못한 작업복 차림이었다.

"제가 관리해요."

소희는 2번 라인의 압력계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장부에 부품 수량까지 올리고 싶으면 오늘 밤에 라인이 멎었을 때 누가 뜯고 누가 다시 조일지도 같이 적으세요. 물표 쓰는 손으로는 못 합니다."

통로의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대섭도 그 눈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젯밤처럼 물이 끊긴다면 장부를 쥔 사람이 먼저 욕을 먹게 된다.

대섭은 물표를 접던 손을 멈췄다.

"말은 그럴듯하네. 하지만 누가 물자를 들여오면 쉘터 물자지. 네 개인 창고가 아니야."

"그래서 정화기에 쓰겠다고 했습니다."

민혁은 목록의 빈칸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필요한 게 확보되면 기록하고 설치합니다. 그 전까지 남은 부품 위치는 공개하지 않아요. 누가 밸브를 만졌는지도 모르는 곳에서요."

대섭의 시선이 소희에게 한번 갔다가 돌아왔다. 소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렌치를 집어 들고 통로 벽에 기대 섰다.

장재복이 대섭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대섭은 낮게 웃었다.

"좋아. 오늘은 네 정비사 말 들어 주지. 대신 열두 시간 뒤에는 내 질문에 답해. 공급처를 숨긴 물건은 결국 사고를 부른다는 것도 적어 둬."

그는 장부를 덮고 일어났다. 재복과 함께 통로 끝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민혁은 종이를 다시 접었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는 답을 미루는 편이 낫다.

다만 열두 시간 뒤에는 그 미룬 답을 대신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소희가 작은 천 조각에 싸인 부품을 내밀었다. 어젯밤 뜯어 낸 낡은 패킹이었다. 가장자리가 딱딱하게 갈라져 있었다.

"이런 건 더 못 써. 새것이 있어도 규격이 맞지 않으면 결국 또 찢어야 해."

"어댑터가 있으면요?"

"나사산만 맞추면 돼. 압력은 내가 잡을 수 있어."

소희는 말끝을 흐리지 않았다. 대신 민혁의 손에 든 목록을 바라봤다.

"구할 수 있어?"

민혁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구할 수 있다는 말은 이곳에서 약속이 된다. 약속은 곧 누군가의 몫이 된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확인만 하고 오진 마."

소희가 낡은 패킹을 다시 감쌌다.

"2번은 기다려 주지 않아."

민혁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방수포 아래에 숨겨 둔 상자를 꺼내 남은 물건을 세었다. 설치하지 못한 카트리지 둘. 밸브 하나. 고무 패킹 몇 묶음. 정확한 규격을 맞추지 못하면 손에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는 물건들이었다.

그날 민혁은 쉘터 가장 안쪽의 비어 있는 침상에 누웠다. 머리맡에는 소희의 목록과 이진우의 명함이 있었다. 옷 안쪽에는 감정소 보관증과 검푸른 광석 한 조각을 따로 넣었다. 맡겨 둔 조각보다 더 작은 파편이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전부를 한곳에 두지 않는 것은 이곳에서 배운 버릇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청동 문은 열리지 않았다. 눈을 감을 때마다 가슴 안쪽에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열두 시간이라는 제한은 시계보다 정확했다.

민혁은 누운 채로 계산했다. 어댑터와 패킹. 철물점까지 오가는 교통비. 다음번에 들고 갈 식량. 광석이 고철값 정도라면 이번 계획은 시작도 못 한다.

그러나 그 조각이 정말 값을 가진다면 물을 병째로 나눠 주는 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부품을 사고 고치고 다시 물을 흐르게 할 수 있다.

그 차이는 쉘터 사람들의 컵에 담길 물보다 먼저 민혁 자신을 바꿀지도 몰랐다.

열두 시간이 찼을 때 가슴 안쪽에서 낡은 문고리가 풀리는 감각이 왔다.

민혁은 몸을 일으켰다. 통로 쪽에서는 소희가 압력계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다가오는 기척을 듣고 고개만 돌렸다.

"반 이상 올리지 않았어요?"

"안 올렸어. 네가 돌아올 때까지 멀쩡하게 남겨 둬야 하니까."

민혁은 목록을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대섭이 또 오면요."

"정화기 소리 때문에 못 들었다고 할게."

소희의 눈이 잠깐 가늘어졌다.

"대신 돌아오면 목록부터 보여 줘. 네가 뭘 숨기는지는 몰라도 지금 필요한 건 안 숨겨야 해."

민혁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상은 약속하지 않았다.

천막 그림자가 그의 발끝을 덮었다. 다음 순간 푸른 균열이 어둠 속에서 조용히 열렸다.

현대 서울의 계단참에는 보일러 소리도 배급 줄도 없었다. 계단창으로 들어온 햇빛이 난간의 먼지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민혁은 한참 그 빛을 보고 있다가 명함에 적힌 주소로 향했다.

마포의 감정소는 작은 상가 건물 2층에 있었다. 유리문에는 희귀 광물 감정과 매입이라는 글자가 붙어 있었고 안쪽에서는 기계가 낮게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직원이 민혁의 보관증을 확인하더니 안쪽 방으로 안내했다.

방 안에는 서류보다 케이블이 더 많았다. 모니터 앞에 앉은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듯한 셔츠 소매와 달리 눈가에는 며칠째 잠을 못 잔 사람 같은 그늘이 있었다.

"강민혁 씨죠. 이진우입니다."

명함에서 본 이름을 직접 듣자 민혁은 고개만 끄덕였다.

진우는 책상 한가운데 놓인 투명 상자를 가리켰다. 검푸른 조각이 검은 스펀지 위에 얹혀 있었다. 그 옆에는 손바닥만 한 측정 장비와 얇은 케이블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보관 상태는 그대로입니다. 다른 데 보내지 않았고요."

그는 화면을 돌려 민혁 쪽으로 보였다. 흐린 곡선 하나가 화면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일반 광물은 여기서 끝납니다. 열을 주거나 전기를 흘리면 반응이 올라왔다가 꺼지죠. 그런데 이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수치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진우가 장비 옆의 버튼을 눌렀다. 아주 약한 빛이 조각 위를 훑었다. 화면의 그래프가 순간 튀어 올랐다가 일정한 선을 유지했다.

"전기가 나오는 겁니까?"

"그렇게 단순하면 좋겠네요. 전압으로도 설명이 안 됩니다. 에너지가 남아 있다는 쪽에 가까워요."

민혁은 상자 안의 돌을 바라봤다. 쉘터에서 마석을 꺼낼 때 손바닥에 남던 미지근한 떨림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이름을 입에 올릴 수는 없었다.

"값은요?"

진우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정확한 조성도 모르고 재현도 못 합니다. 공개 감정으로 넘기면 출처부터 묻는 곳이 많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 물건은 소문이 나는 순간 값보다 위험이 먼저 붙어요."

"출처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럴 것 같았습니다."

진우는 민혁의 닳은 운동화와 거칠어진 손등을 차례로 봤다. 캐묻는 대신 목소리를 낮췄다.

"출처를 안 묻는 매입은 가능해요. 다만 제가 감당할 위험도 있습니다. 이 조각만 정식으로 분석하고 결과가 나올 때까지 제 보관함에 두는 조건이라면 선금을 드릴 수 있습니다."

"보관함에 두는 건 이 조각 하나뿐입니다."

민혁은 주머니에서 더 작은 파편을 꺼내지 않았다.

"추가 물건이 있는지도 묻지 마세요. 연락은 내가 먼저 합니다."

진우의 입가가 굳었다. 그는 잠깐 계산기 화면을 바라보다가 숫자를 입력했다. 그리고 종이를 민혁 쪽으로 밀었다.

"이건 선금입니다. 정식 감정 결과가 나오면 매입가를 다시 제시하죠. 거절해도 됩니다."

종이에 적힌 금액을 본 민혁의 손가락이 멈췄다. 고철 더미를 팔아 손에 쥐었던 돈과는 자릿수부터 달랐다. 어댑터와 패킹은 물론이고 다음번 보급 묶음까지 계산할 수 있는 액수였다.

하지만 숫자가 크다고 손을 내밀 이유는 되지 않았다.

"독점은 아닙니다."

민혁이 말했다.

"그 조각 감정만 맡깁니다. 결과가 나오기 전에도 출처를 찾으려 들면 거래는 끝이에요."

"알겠습니다."

진우가 대답한 뒤에도 손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한 가지만. 이런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줄 생각은 하지 마세요. 제가 욕심이 나서가 아니라 이미 이쪽 업계에는 냄새 맡는 사람이 많아서요."

"당신도 그 사람 중 하나 아닙니까?"

진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맞습니다. 그래서 먼저 경고하는 겁니다."

그는 금고에서 현금 봉투를 꺼내 책상 위에 놓았다. 민혁은 봉투를 받기 전에 보관증 번호와 상자에 붙은 봉인 테이프를 다시 확인했다. 그 조각을 넘긴 것이 아니라 감정 절차를 맡긴 것임을 스스로에게도 분명히 했다.

진우는 명함 뒤에 다른 번호를 적었다.

"이 번호로만 연락하세요. 사무실 번호는 직원들이 봅니다."

민혁은 명함을 접어 넣었다.

감정소 문을 나서자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그는 바로 철물점 방향을 검색하려다 길 건너에 세워진 검은 세단을 발견했다. 짙은 유리 너머는 보이지 않았다.

민혁이 걸음을 멈추자 세단의 엔진 소리가 낮게 울렸다.

뒤에서 유리문이 열렸다. 이진우가 문턱에 서 있었다. 조금 전보다 표정이 굳어 있었다.

"강 씨."

민혁이 돌아봤다.

"다음에는 약속 시간을 정하고 오세요. 혼자 움직이는 것도 너무 눈에 띄면 좋지 않습니다."

"저 차 아는 차입니까?"

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길 건너를 한번 보고는 문을 반쯤 닫았다.

"오늘은 필요한 물건부터 사세요. 그리고 제 번호는 아무한테도 보여 주지 마시고요."

세단은 민혁이 다시 걷기 시작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주머니 속 현금 봉투는 묵직했다. 그 돈이면 소희가 적은 목록을 채울 수 있다. 하지만 보급품을 살 수 있게 된 순간부터 누군가가 그 길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 같았다.

민혁은 철물점으로 향했다.

쉘터의 2번 라인은 아직 하루 반을 버틴다.

그 하루 반이 끝나기 전에 사야 할 물건도 생겼다. 피해야 할 시선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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