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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에서 평화로운 지구로 출퇴근합니다5화

아포칼립스에서 평화로운 지구로 출퇴근합니다

아포칼립스에서 평화로운 지구로 출퇴근합니다

5화: 값이 붙는 돌

청동 문이 가슴 안쪽에서 마지막으로 울렸다.

강민혁은 보일러실 벽에 긁어 둔 시간을 한 번 더 훑었다. 열두 시간. 쉘터에서는 하루를 버티는 데도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정화기 2번 라인은 그 시간보다 짧을지도 몰랐다.

방수천 바깥에서 누군가 물통을 끄는 소리가 났다. 바닥을 긁는 플라스틱 소리 끝에 아이가 칭얼거리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민혁은 천으로 감싼 검푸른 광석 두 조각을 품 안쪽에 넣었다.

생수는 남겨 둔다. 이번에 돌아올 때는 그보다 많은 물을 들어야 했다.

낡은 폐철 꾸러미도 함께 챙겼다. 현대 서울에서 쓸 수 있는 현금은 많지 않았다. 필터 부품과 물을 사려면 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값으로 바꿔야 했다.

청동 문이 열렸다.

푸른 균열이 계단참의 어둠을 가르자 민혁은 망설이지 않고 발을 옮겼다.

다음 순간 코끝을 찌른 것은 곰팡이와 녹 냄새가 아니었다. 젖은 아스팔트 냄새와 늦은 저녁의 찬 공기였다.

마포의 낡은 빌딩 비상 계단 아래로 자동차 불빛이 지나갔다. 횡단보도 신호음이 일정하게 울렸고 건너편 편의점 유리문은 사람들이 드나들 때마다 따뜻한 빛을 토했다.

너무 평범해서 잠깐 멈춰 서고 싶어지는 풍경이었다.

민혁은 난간을 세게 잡았다. 평온한 곳에 올 때마다 몸이 먼저 긴장을 풀려 했다. 하지만 귀 한쪽에는 보일러실의 쇳소리가 남아 있었다.

끼이이익.

정화기가 마지막으로 지르던 비명.

그는 계단 밑에 대검을 천으로 감춰 두고 폐철 꾸러미만 들었다. 사람들 사이에 칼을 차고 다닐 이유는 없었다. 여기서는 눈에 띄지 않는 것이 가장 싼 안전이었다.

골목 끝 고물상은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사장이 폐철을 자석 막대에 대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상태가 너무 안 좋아요. 어디서 주워 왔어요?"

"철거 현장입니다."

"철거 현장도 요즘은 이런 거 안 나와."

사장은 투덜거리면서도 저울에 꾸러미를 올렸다. 낡은 눈금이 흔들리다 멎었다. 손에 쥐어진 돈은 지폐 두 장과 동전 몇 개였다.

민혁은 돈을 세지 않았다. 손바닥 감각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걸로는 필요한 부품 하나를 고르고 나면 생수는 제대로 사기 어렵다.

주머니 안에는 서울에서 남겨 둔 현금이 조금 더 있었다. 식료품을 사고도 아껴 둔 돈이었다. 합치면 오늘 밤은 버틸 수 있다. 대신 다음번에는 검푸른 돌이 진짜 값이 있는지 알아내야 했다.

그는 고물상 유리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봤다.

평범한 패딩 차림의 남자가 주머니 속 돌 하나에 기대고 있었다. 쉘터에서는 물 한 병이 권력이었다. 이곳에서는 숫자가 찍힌 지폐가 권력이었다.

결국 둘 다 없는 사람의 목을 조르는 방식만 달랐다.

민혁은 휴대폰 메모를 열었다. 한소희가 적어 준 목록이 짧게 떠 있었다.

여과 카트리지. 고무 패킹. 호스 밸브. 가능하면 변환 어댑터.

그는 큰 철물점 대신 골목 안쪽의 작은 설비 자재점으로 들어갔다. 한 번에 많은 물건을 사면 기억에 남는다. 지금부터는 물건보다 동선을 나눠야 했다.

벽면 선반에는 원통형 카트리지와 배관 부속이 빽빽하게 걸려 있었다. 민혁은 휴대폰에 적어 둔 길이와 지름을 번갈아 보다가 직원에게 물었다.

"이 정도 크기 통에 넣을 만한 여과재가 있습니까? 물은 깨끗하진 않습니다."

직원은 민혁을 한 번 훑더니 선반 아래 상자를 꺼냈다.

"완전히 같은 규격은 없어요. 이건 산업용 전처리용인데 묶어서 넣으면 쓸 수는 있을 겁니다. 다만 나사산이 다르면 어댑터가 필요해요."

민혁은 상자를 열지 않았다. 소희가 말한 것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하얀 원통 네 개와 교체용 망. 새 고무 패킹 묶음. 손바닥만 한 밸브 두 개.

"어댑터는요?"

"규격을 알아야 맞춰 드리죠."

민혁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밸브만 두 개 주세요. 현장에서 맞출 겁니다."

소희라면 할 수 있다. 아니면 적어도 죽은 나사산을 우회할 방법을 찾을 것이다.

계산대 위 전자저울이 상자 무게를 표시했다. 부품과 포장재를 합쳐 열세 킬로그램 조금 넘었다. 민혁은 영수증을 받아 접어 넣었다. 가격은 예상보다 높았지만 물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자재점 밖으로 나오자 그는 바로 반대편 길로 꺾었다. 두 블록 떨어진 생활용품점에서 줄자와 작은 손전등 그리고 얇은 방수포를 샀다. 방수포는 물 묶음을 숨길 때도 쓸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대형 할인점에 들렀다.

카트에 생수 묶음을 올릴 때마다 어깨가 먼저 무게를 계산했다. 2리터 여섯 병 묶음 하나. 1.5리터 여섯 병 묶음 두 개. 총 스물아홉 킬로그램.

물은 더 살 수 있었다. 진열대에는 같은 상자가 끝도 없이 쌓여 있었다.

민혁은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여기서는 한 병 더 사는 일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청동 문을 넘는 순간 그 한 병은 부품 하나를 버리거나 자기 몸을 망가뜨릴 무게가 된다.

그는 카트를 계산대로 밀었다.

카드 단말기가 짧게 울리고 남은 현금은 지갑 안에서 얇아졌다. 민혁은 영수증을 버리지 않고 접었다. 값과 무게를 다음번 계산에 남겨 두기 위해서였다.

밖으로 나와 인적 드문 골목에서 짐을 나눴다. 부품 열세 킬로그램. 물 스물아홉 킬로그램. 손전등과 줄자와 방수포를 합쳐도 마흔다섯 킬로그램을 넘지 않았다.

가슴 안쪽의 청동 문은 조용했다.

아직은 괜찮다.

민혁은 물 묶음 끈을 다시 조였다. 그 투명한 병들이 쉘터에서는 배급장 장부보다 무거운 약속이 될 것이다. 소희의 기름 묻은 손이 새 패킹을 끼우고 물줄기가 다시 살아나는 모습을 상상하자 걸음이 빨라졌다.

하지만 광석은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

부품과 물을 사자 남은 현금은 거의 없었다. 다음 보급 때도 같은 방식으로 돈을 끌어모을 수는 없다. 그는 짐을 비상 계단의 어두운 구석에 잠시 내려놓고 광석 한 조각만 꺼냈다.

지도에서 찾아 둔 소형 광물 감정소는 세 블록 떨어진 상가 지하에 있었다. 유리문 옆의 작은 간판에는 보석 감정과 희귀 광물 상담이라고 적혀 있었다.

문을 연 직원은 중년 남자였다. 처음에는 민혁의 손바닥 위 돌을 보고 무심하게 말했다.

"운석 조각이면 저희보다 대학 연구실이 낫습니다."

"운석인지부터 모르겠습니다. 간이 확인만 해 주세요."

직원은 장갑을 끼고 광석을 받아 들었다. 검푸른 표면에는 불빛을 삼킨 듯한 얼룩이 있었다. 휴대용 분석기를 가까이 대자 기계가 짧게 삑 소리를 냈다.

한 번.

두 번.

직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상하네."

화면에는 원소 표기가 뜨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직원은 장비를 껐다가 다시 켰다. 이번에는 숫자만 길게 늘어섰다.

"장비가 고장 난 건 아닙니다. 그런데 데이터베이스에 걸리는 게 없어요. 금속 비율도 이상하고요."

민혁은 돌을 받으려 손을 내밀었다.

"그럼 여기까지 하죠."

직원이 황급히 손을 들었다.

"잠깐만요. 이런 쪽을 보는 분이 있습니다. 이진우 씨라고 희귀 광물 거래를 하는 분인데요. 제가 사진만 보내도 될까요?"

"사진은 안 됩니다."

민혁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

직원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 잡아둘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들은 눈치였다.

"그럼 직접 연결만 해 드리죠. 다만 이 정도 반응이면 저희도 그냥 돌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민혁은 잠시 광석을 내려다보았다. 이 돌을 팔면 내일의 물을 살 돈이 생길 수 있다. 반대로 출처를 캐묻는 사람에게 넘기면 보급로가 끊길 수도 있었다.

그는 품 안의 나머지 한 조각을 떠올렸다.

"한 조각만 맡기겠습니다. 보관증을 써 주세요. 손상 책임도 적고요."

직원의 표정이 굳었다가 이내 진지해졌다.

"알겠습니다. 봉인해서 보관하죠."

민혁은 투명 보관함에 광석을 넣는 과정을 끝까지 지켜봤다. 봉인 스티커의 번호와 보관증 번호를 휴대폰 메모에 적었다. 다른 한 조각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게 다시 안주머니에 넣었다.

직원이 전화를 걸었다.

잠시 뒤 수화기 너머에서 낮고 빠른 남자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직원은 몇 마디를 듣더니 민혁에게 전화기를 내밀었다.

"이진우 씨입니다."

민혁은 받자마자 말했다.

"강민혁입니다."

"돌을 직접 봤습니까?"

목소리는 다급했지만 흥분을 억누르고 있었다.

"봤습니다. 그래서 한 조각만 맡겼습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잘하셨습니다. 그 물건은 다른 곳에 먼저 넘기지 마세요. 내일 오전에 찾아가겠습니다. 가격은 직접 보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내일 낮 이후면 됩니다."

민혁은 시간을 먼저 정했다. 지금은 누구보다 송도로 돌아가야 했다.

"좋습니다. 장소는 감정소로 하죠. 그리고 가능하면 물건을 더 가져오지 마십시오. 안전한지부터 확인해야 하니까요."

민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안전이라는 말이 갑자기 친절하게 들리지 않았다. 돌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만이 쉽게 전부를 꺼낸다.

"내일 봅시다."

통화를 끊고 전화기를 돌려줬다.

직원은 이진우의 명함을 내밀었다. 희귀 광물 매입과 감정 연계라는 짧은 문구 아래 이름과 번호가 찍혀 있었다.

민혁은 명함을 지갑 가장 안쪽에 넣었다.

값이 붙는 돌이었다.

아직 얼마인지는 모른다. 다만 이진우라는 사람이 오늘 밤을 기다리지 못할 만큼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민혁은 다시 비상 계단으로 돌아왔다. 방수포 위에 짐을 차례로 놓고 무게를 손으로 확인했다.

물 스물아홉 킬로그램.

필터 부품 열세 킬로그램.

손전등과 줄자와 방수포를 더해도 마흔다섯 킬로그램 안팎.

청동 문이 허락하는 선보다 조금 남았다. 그 남는 무게가 실수할 때 자신을 살릴 여유였다.

휴대폰에는 감정소 주소와 이진우의 번호가 남아 있었다. 내일 이곳으로 다시 와야 한다. 그때 광석이 정말 돈이 된다면 부품 몇 상자가 아니라 쉘터의 보급 계획 자체를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

민혁은 푸른 균열 앞에서 생수 묶음을 어깨에 걸쳤다. 허리가 아래로 당겼지만 가슴 안쪽의 문은 닫히지 않았다.

송도에서는 한소희가 새 패킹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윤대섭의 사람들은 민혁이 어디서 무엇을 가져오는지 캐물을 것이다.

물과 부품을 들여오는 일보다 그것을 무사히 정화기에 연결하는 일이 더 어려울 수도 있었다.

민혁은 빌딩 벽에 마지막으로 시간을 적었다.

다음 이동 시각.

이진우를 만날 시각.

그리고 물이 떨어지기 전에 2번 라인을 살릴 시각.

푸른빛이 짐을 삼켰다.

값이 붙는 돌은 내일을 열어 줄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 밤 그가 들고 돌아가야 하는 것은 사람들이 당장 마실 수 있는 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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