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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에서 평화로운 지구로 출퇴근합니다4화

아포칼립스에서 평화로운 지구로 출퇴근합니다

아포칼립스에서 평화로운 지구로 출퇴근합니다

4화: 무게를 재는 법

보일러실 너머에서 정화기가 비명을 질렀다.

끼이이익.

낡은 금속이 뼈를 갈아내는 듯한 소리였다. 강민혁은 방수천 안쪽에 숨겨 둔 생수병에서 손을 뗐다. 투명한 플라스틱 표면에는 붉은 먼지 한 점도 스며들지 않았다.

송도 쉘터의 젖은 콘크리트와 녹슨 배관 사이에서 그 매끈함은 너무 낯설었다.

한소희는 방수천 밖에 서 있었다. 헝클어진 단발머리와 기름때 묻은 작업복. 이마에 얹은 열화상 고글에는 금이 갔지만 눈빛만은 새 부품처럼 날카로웠다.

"조건부터 말해요."

민혁은 작은 생수병 하나를 들어 올렸다.

"정화기 2번 필터 치수. 고장 난 부품 목록. 정비반 폐부품 보관함을 직접 볼 시간."

"선불은요?"

"이 병."

소희의 시선이 병목의 투명한 홈을 훑었다. 라벨은 뜯어냈지만 바닥 성형 자국과 새 플라스틱 특유의 빛은 감출 수 없었다.

"멸망 전 물류 기록에는 저런 병 없어요."

"북쪽 창고에도 기록 안 된 물건은 있겠죠."

"그 말 길어지면 거짓말 티 나요."

"그럼 짧게 하겠습니다. 출처는 묻지 마십시오."

소희는 웃지 않았다. 정화기가 다시 한 번 쇳소리를 냈다. 이번에는 마른 기침처럼 끊기더니 안쪽 배관에서 거품이 터지는 소리가 섞였다.

그 소리에 소희의 표정이 먼저 변했다.

"따라와요."

정비반 창고는 지하 주차장 가장 안쪽에 있었다. 찌그러진 셔터를 밀고 들어가자 폐배관과 펌프 모터와 부러진 밸브가 사람 허리 높이로 쌓여 있었다. 소희는 그 틈을 망설임 없이 지나가 녹슨 작업대 위에 원통 하나를 올렸다.

"이게 2번 필터예요. 정확히는 죽기 직전인 필터."

원통 표면에는 검붉은 찌꺼기가 들러붙어 있었다. 금속망 안쪽에는 회색 균사가 굳어 돌처럼 막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젖은 흙냄새와 썩은 버섯 냄새가 동시에 올라왔다.

민혁은 손을 뻗다 멈췄다.

"맨손으로 만져도 됩니까?"

"손끝 저리고 싶으면요."

소희가 구멍 난 고무장갑 한 짝을 던졌다. 민혁은 장갑을 끼고 원통 가장자리를 들었다. 물을 잔뜩 먹은 진흙 덩어리처럼 묵직했다.

"완제품을 구해야 합니까?"

"같은 모델은 못 구할 거예요. 멸망 전에 쓰던 소형 산업용 정수 라인이거든요. 대신 여과 카트리지를 여러 개 묶고 패킹만 맞추면 임시로 살릴 수 있어요."

소희가 줄자를 펼쳤다.

"길이 삼십이 센티. 지름 구 센티. 입구 나사산은 거의 죽었어요. 변환 어댑터가 있으면 좋고 없으면 호스 밸브를 물려서 우회하면 돼요. 고무 패킹은 무조건 새거여야 해요. 여기 남은 건 다 삭았어요."

민혁은 숫자를 머릿속에 눌러 담았다.

삼십이 센티. 구 센티. 여과 카트리지. 패킹. 호스 밸브. 변환 어댑터.

현대 서울의 철물점이나 공구 상가라면 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문제는 돈이었다. 주머니에 남은 현대 지폐는 많지 않았다. 대신 품 안쪽에는 검푸른 광석 조각 두 개가 있었다.

그 돌이 정말 돈이 된다면.

"이걸 살리면 물이 얼마나 늘어납니까."

"지금보다 두 배는 버텨요. 적어도 오염수 마시고 배를 움켜쥐는 사람은 줄어요."

소희는 작업대 아래의 작은 물통을 발끝으로 밀었다. 뚜껑 틈에서 흙탕물 냄새가 올라왔다.

"윤대섭은 숨기고 있지만 배급장 물통 절반은 이미 이 냄새예요. 오늘 밤 지나면 2번 라인은 닫아야 할 수도 있어요."

민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배급장 바닥에서 물뚜껑을 받아 들던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맑아"라고 떨던 여자의 목소리도. 그는 그 장면을 동정으로 포장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도 그 사람들이 쓰러지면 자신에게 남는 거래처도 줄어든다.

살아 있는 사람이 많아야 물의 가격도 선다.

그때 셔터 밖에서 발소리가 멈췄다.

"강민혁 씨. 안에 있습니까?"

남자 둘이 창고 입구에 섰다. 윤대섭의 배급장 근처에서 보던 얼굴들이었다. 뒤쪽에는 배씨도 있었다. 그는 난처한 표정으로 민혁과 남자들을 번갈아 보았다.

키 큰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외부 물자 개인 보관은 신고 대상입니다. 윤 관리자님이 확인하랍니다."

민혁은 필터 원통을 내려놓았다.

"배급장 앞에서 개인 거래권을 받았습니다."

"정비반 창고 출입권은 별개죠."

소희가 렌치를 집어 들었다.

"정비반 창고에서 누가 들어오고 나가는지는 내가 정해요. 윤대섭이 필터 갈 줄 알면 직접 오라고 해요."

남자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나 물러서지는 않았다. 공개적으로 빼앗지는 못해도 규칙을 들이밀어 묶어 두려는 수작이었다.

민혁은 작은 생수병 하나를 꺼냈다. 뚜껑은 열지 않았다. 창고의 흐린 조명 아래에서 물빛이 흔들렸다.

입구 바깥에 있던 주민 몇 명이 그쪽을 보았다. 배씨의 목울대도 조용히 움직였다.

"확인을 원하면 주민들 앞에서 하죠."

민혁이 말했다.

"제가 가져온 물건과 받은 대가를 장부로 적겠습니다. 누가 배급권을 냈고 누가 뭘 가져갔는지도 같이요."

키 큰 남자의 눈매가 흔들렸다.

"장부?"

"감시가 필요하다면서요. 공개 감시로 합시다. 배급권이 어디서 나오고 중간에서 누가 떼어먹는지도 다 보이겠군요."

배씨가 헛기침을 했다. 창고 밖 주민들이 더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했지만 귀는 이미 이쪽을 향해 있었다.

윤대섭은 장부를 싫어할 것이다. 배급장 창고의 물건이 어떻게 사라지는지 주민들이 알게 되는 순간 그의 열쇠는 반쪽짜리 권력이 된다.

남자 둘은 서로를 보았다.

"말이 많군."

"물은 많지 않습니다."

민혁은 병을 다시 품 안에 넣었다.

"그러니 낭비할 시간도 없습니다."

두 남자는 욕을 씹으며 물러났다. 배씨는 마지막까지 남았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윤대섭이 그냥 안 넘어갈 거야."

"알고 있습니다."

"나한테도 나중에 한 병."

"거래 조건을 가져오십시오."

배씨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더 말하지 않았다.

셔터 밖 발소리가 멀어지자 소희가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생각보다 더 위험한 사람이네요."

"위험한 건 물 없는 쉘터입니다."

"그 말은 맞아요."

민혁은 창고 구석에서 낡은 저울을 발견했다. 눈금판 한쪽이 깨졌지만 대략적인 무게는 잴 수 있어 보였다.

"저울 빌려도 됩니까."

"갑자기요?"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를 알아야 합니다."

소희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저울을 밀어 주었다.

민혁은 남은 생수병과 통조림 몇 개 그리고 폐철 조각을 묶었다. 먼저 30킬로그램. 어깨가 무겁기는 해도 걸을 수 있었다.

40킬로그램.

허리와 무릎이 당겼다. 계단을 오르려면 속도가 크게 떨어질 것이다.

50킬로그램 가까이 맞추자 다른 감각이 왔다. 단순한 근육의 부담이 아니었다. 가슴 안쪽 깊은 곳에 뿌리내린 청동 문이 억지로 조여드는 느낌. 아직 열리지 않은 문이 미리 경고를 보내는 듯했다.

여기까지.

더 욕심내면 통로가 아니라 자신이 찢긴다.

민혁은 짐을 내려놓았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소희가 그를 빤히 보았다.

"왜 갑자기 그런 표정을 해요?"

"너무 무거우면 죽습니다."

"그건 누구나 그래요."

"저는 조금 더 정확히 죽을 것 같아서요."

민혁은 장난처럼 넘겼다. 소희의 눈은 여전히 의심스러웠지만 더 캐묻지 않았다.

그는 작업대 위의 기름 묻은 종이 조각을 끌어와 목록을 적었다.

물 30킬로그램 안팎.

필터 부품 15킬로그램 안팎.

남은 무게는 거래용 광석과 현금화 가능한 고철.

소희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물만 가져오면 안 돼요. 패킹 없으면 필터는 못 살려요."

"그래서 15킬로그램을 비웠습니다."

"그 정도면 여과 카트리지 네다섯 개랑 패킹 묶음은 가능해요. 호스 밸브는 금속이면 무거우니까 두 개만."

"목록으로 써 주십시오. 알아볼 수 있게."

"내 글씨가 어때서요?"

"고장 난 필터보다 읽기 어렵습니다."

소희가 렌치를 들었다. 민혁은 물러나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 뒤 소희가 먼저 피식 웃었다.

"좋아요. 대신 병 하나 더."

"필터가 살아나면."

"쪼잔하네."

"쪼잔해서 살아남았습니다."

가슴 안쪽의 청동 문은 아직 완전히 차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바닥난 우물에 물이 고이듯 느린 진동이 돌아오고 있었다. 현대 서울에서 송도로 돌아온 뒤 얼마나 지났는지 벽에 긁어 둔 표시와 쉘터의 교대 종소리를 맞춰 보았다.

역시 반나절.

최소 열두 시간은 필요하다.

민혁은 보일러실 옆 칸막이로 돌아와 콘크리트 벽에 새 표시를 긁었다. 이동한 시각. 회복될 예상 시각. 운반 한도. 다음 보급 우선순위.

생수.

산업용 여과 카트리지.

고무 패킹.

호스 밸브.

줄자와 손전등.

그리고 검푸른 광석 감정.

목록이 생기자 막연한 기적이 계획으로 바뀌었다. 푸른 균열은 도망치는 문이 아니라 노선을 짜야 하는 보급로였다.

방수천 밖에서는 속삭임이 이어졌다.

"물 한 병에 배급권 몇 장이래?"

"윤대섭이 저놈을 그냥 둘까."

"정화기가 멈추면 다 끝이야."

민혁은 대검을 손 닿는 곳에 놓았다. 남은 생수병은 하나씩 천으로 감쌌다. 절대 한꺼번에 보여주지 않는다. 절대 공짜로 풀지 않는다. 그러나 필요한 순간에는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쓴다.

그게 약탈을 막는 가장 싼 방패였다.

소희가 다시 찾아온 것은 정화기가 세 번째로 비명을 지른 뒤였다. 이번에는 장난기가 없었다.

"2번 라인 압력이 더 떨어졌어요."

"얼마나 버팁니까."

"모르면 좋겠는데 알아요. 내일 아침까지 못 버틸 수도 있어요."

민혁은 벽의 시간 표시를 보았다.

아직 문은 닫혀 있었다. 그러나 깊은 곳에서 푸른빛이 조금씩 차오르는 감각이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럼 오늘 밤에 다녀옵니다."

소희가 눈을 좁혔다.

"어디를요?"

민혁은 천으로 감싼 생수병을 자루 가장 깊은 곳에 밀어 넣었다.

"물이 있는 곳."

"또 짧은 거짓말이네요."

"이번엔 약속도 짧게 하죠."

민혁은 대검을 허리에 찼다.

"여기 사람들이 죽지 않을 만큼의 물과 당신이 고칠 수 있을 만큼의 부품을 가져옵니다."

소희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보일러실 너머에서 정화기가 마지막 경고처럼 낮게 떨었다.

민혁은 그 소리를 들으며 어깨끈을 조였다.

다음 문이 열리면 단순히 살아서 도망치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무엇을 얼마나 들고 돌아올지 잘못 계산하는 순간 이 쉘터의 목마른 사람들은 다시 오염수 앞에 줄을 서게 될 것이다.

이번에는 목숨보다 먼저 무게를 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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