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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에서 평화로운 지구로 출퇴근합니다3화

아포칼립스에서 평화로운 지구로 출퇴근합니다

아포칼립스에서 평화로운 지구로 출퇴근합니다

3화: 물맛을 아는 사람들

푸른 균열이 닫히자 붉은 공기가 다시 목을 물었다.

강민혁은 폐물류창고의 철제 플랫폼 위로 떨어졌다. 무릎이 녹슨 바닥에 부딪혔고 어깨에 멘 자루가 등뼈를 찍었다.

"큭."

비명은 방독면 안에서 작게 막혔다.

그는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등으로 차가운 철판을 느낀 채 숨을 죽였다. 방독면 정화통이 치익거리는 소리마저 크게 들렸다.

스포어 울프의 발톱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낡은 천막이 독 안개에 젖어 흐느적거리는 소리와 먼 곳에서 떨어진 금속판이 바람에 끌리는 소리만 들렸다.

민혁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가슴 안쪽의 청동 문은 이미 바닥난 우물처럼 텅 비어 있었다. 현대 서울의 밝은 편의점으로 다시 도망칠 길은 닫혔다.

적어도 반나절.

그 시간 동안은 이 지옥에서 버텨야 했다.

"돌아왔으면 됐지."

민혁은 낮게 중얼거리고 자루를 끌어당겼다.

현대 서울에서 산 생수 큰 병 네 개. 작은 병 여섯 개. 컵라면 네 개. 통조림 다섯 개. 초콜릿바와 작은 과자 몇 봉지. 그리고 품 안쪽에는 검푸른 광석 두 조각.

무게를 맞추느라 고철은 대부분 버렸다. 그래도 어깨가 끊어질 듯 아팠다. 차원의 틈새를 통과할 때 자루 끈이 팔을 잡아뜯던 감각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자루 안의 물건들은 멀쩡했다.

깨끗한 비닐 포장. 찌그러짐 하나 없는 생수병. 병목의 매끈한 나사선과 투명한 플라스틱. 붉은 독 안개 속에 놓이자 오히려 더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송도 쉘터에서 이걸 그대로 꺼내 보이면 질문이 아니라 칼이 먼저 날아온다.

민혁은 플랫폼 구석에 걸린 더러운 방수포를 찢었다. 통조림과 컵라면은 녹슨 기계 부품 사이에 끼웠고 생수병은 낡은 천으로 둘둘 감았다. 컵라면 용기에서 새어 나오는 매운 분말 냄새가 문제였다.

그는 바닥에 굳어 있던 기계유 묻은 천을 찾아 자루 바깥쪽에 감았다. 썩은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래도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보다는 나았다.

계단 아래에는 울프들이 남긴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콘크리트 위에 말라붙은 포자 침이 아직도 희미하게 김을 올렸다. 놈들이 오래 머물지는 않은 듯했다.

민혁은 대검을 뽑지 않았다.

칼을 쥐면 손이 떨릴 것이다. 지금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들키지 않고 옮기는 일이 우선이었다.

그는 한 계단씩 내려갔다. 녹슨 철제 계단이 신음할 때마다 심장이 같이 움찔했다. 창고 밖으로 나가자 붉은 독 안개가 무너진 도로 위를 낮게 기어가고 있었다.

송도 남부 폐허는 여전히 죽어 있었다.

무너진 아파트 골조. 간판이 뜯긴 상가. 오염된 눈처럼 벽면을 뒤덮은 회색 균사. 현대 서울에서 본 맑은 아침빛이 거짓말처럼 멀게 느껴졌다.

민혁은 자루를 고쳐 멨다.

무겁다.

하지만 이 무게는 쓰레기 고철의 무게가 아니었다. 물과 음식. 사람을 움직이고 입을 다물게 하고 어쩌면 자신을 살릴 권력의 무게였다.

쉘터 입구는 무너진 지하 주차장 램프 아래에 숨어 있었다. 방독천 세 겹과 철망문이 입구를 막고 있었다. 안쪽 경비 초소의 드럼통 난로 옆에서 배씨가 고개를 들었다.

"살아 있었네."

배씨는 말끝을 길게 끌었다. 반가움보다 아쉬움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운이 좋았습니다."

"운 좋은 놈 자루치고는 좀 묵직한데."

배씨의 눈이 자루에 박혔다.

그는 쉘터에서 출입구를 맡은 사람답게 남의 짐 냄새를 맡는 데 익숙했다. 누가 폐허에서 쓸 만한 걸 가져오는지 누가 빈손으로 돌아오는지 누구보다 먼저 알았다.

민혁은 자루를 등 뒤로 조금 물렸다.

"폐창고에서 건진 겁니다."

"그러니까 보여줘야지. 규칙 몰라? 바깥 물자는 먼저 확인한다."

"확인하고 관리실에 넘기는 규칙이겠죠."

배씨의 표정이 굳었다. 손이 허리춤의 쇠몽둥이로 내려갔다.

"말이 많아졌네."

민혁은 속으로 호흡을 세었다.

여기서 밀리면 자루가 뜯긴다. 그렇다고 배씨를 때려눕히면 안쪽 사람들이 몰려온다. 현대 서울의 물자가 피투성이 난장판 위로 쏟아지면 끝이었다.

그는 천천히 자루를 열었다. 작은 생수병 하나를 꺼냈다. 라벨은 이미 뜯어냈지만 투명한 병 속의 물빛은 감출 수 없었다.

배씨의 눈동자가 멈췄다.

"그거…… 물이냐?"

"마셔도 죽지 않는 물입니다."

"정화수?"

"그보다 낫습니다."

배씨가 마른 입술을 핥았다. 경비 초소의 드럼통 옆에는 찌그러진 컵 하나가 놓여 있었다. 컵 바닥에는 갈색 오염수가 말라붙어 있었다.

"어디서 났어."

"그건 거래 대상이 아닙니다."

"강민혁. 네가 지금 뭘 들고 있는지 알고 말하는 거냐?"

"알기 때문에 여기서 꺼냈습니다."

민혁은 병뚜껑을 열었다. 먼저 한 모금을 마셨다. 차갑지는 않았다. 그래도 깨끗했다.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몸이 다시 한번 그 풍요를 기억했다.

그는 뚜껑을 닫고 병을 배씨 눈앞에 들었다.

"한 모금. 입구 통과. 오늘 제가 뭘 들고 들어왔는지 먼저 떠들지 않는 조건."

"한 병도 아니고 한 모금?"

"못 믿겠으면 제가 그냥 들어가서 다른 사람하고 거래하겠습니다."

배씨의 손등에 핏줄이 솟았다. 그는 한참 민혁을 노려보다가 병을 받아 들었다.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았다. 빛에 비춰보았다. 손가락으로 병 벽을 톡톡 두드렸다.

마침내 아주 조금 입에 머금었다.

그의 얼굴에서 의심이 빠지고 굶주림이 올라왔다.

"이건……."

배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더 마시려는 순간 민혁이 병을 잡아챘다.

"한 모금이라고 했습니다."

"야."

"문 여십시오."

배씨의 눈에 분노가 스쳤다. 그러나 그는 철망문을 열었다. 쇠사슬이 풀리는 소리가 지하 램프 안으로 길게 울렸다.

"오늘은 못 본 걸로 하지. 대신 나중에 나한테도 한 병 챙겨."

"거래는 제가 정합니다."

민혁은 병을 자루 깊숙이 넣고 안으로 들어갔다.

등 뒤에서 배씨가 욕을 씹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따라오지는 않았다.

쉘터 내부의 공기는 늘 그렇듯 축축하고 무거웠다.

지하 주차장의 기둥마다 천막과 판자가 기대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사이에 몸을 구겨 넣고 살았다. 누군가는 오염수에 적신 천을 빨고 있었고 누군가는 말라붙은 빵조각을 칼끝으로 긁어 나누고 있었다.

민혁이 지나가자 몇몇 얼굴이 고개를 들었다.

냄새 때문이었다.

기계유와 포자 냄새 사이로 미세하게 다른 향이 새어 나왔다. 통조림 기름 냄새. 컵라면 분말의 매운 향. 굶주린 사람들의 코가 그것을 놓칠 리 없었다.

"뭐야."

"저 자루에서 냄새 나."

"먹을 거야?"

속삭임이 등 뒤에 붙었다.

민혁은 걸음을 빠르게 했다. 배급장은 지하 관리 사무실을 뜯어 만든 공간이었다. 녹슨 책상 뒤에는 윤대섭이 앉아 있었다.

윤대섭은 쉘터의 배급표와 식량 창고 열쇠를 쥔 남자였다. 그는 그 열쇠 하나로 사람들에게 존댓말을 듣게 만들었다.

"강민혁."

윤대섭이 손짓했다.

"자루 내려놔."

민혁은 책상 앞에서 멈췄다.

"거래하러 왔습니다."

"거래?"

윤대섭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여긴 네가 장사하는 시장이 아니야. 외부 물자는 공동 창고에 신고한다. 그다음 배급위원회가 분배한다. 규칙 몰라?"

"규칙대로면 저는 오늘도 곰팡이 빵 한 조각 받고 끝이겠죠."

"살아서 돌아온 것만으로 감사해야지."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민혁은 그 숫자를 확인했다. 많다. 위험하다. 하지만 동시에 방패가 될 수도 있다.

그는 자루에서 통조림 하나를 꺼냈다.

작은 참치 통조림이었다. 손잡이를 세우고 당기자 얇은 금속 뚜껑이 맑은 소리를 냈다.

딸깍.

기름진 냄새가 배급장을 갈랐다.

순간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누군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오래 굶은 몸들이 냄새를 먼저 먹고 있었다. 윤대섭의 얼굴에서도 웃음이 사라졌다.

"그건 뭐야."

"상하지 않은 단백질입니다."

민혁은 생수병 하나를 책상 위에 세웠다.

"그리고 물."

투명한 병 속에서 맑은 물이 흔들렸다.

주민들 사이에서 낮은 탄식이 터졌다.

윤대섭의 손이 뻗었다. 민혁은 생수병을 뒤로 뺐다.

"압수하려 들면 여기서 깨버립니다."

"너 지금 제정신이냐?"

"깨끗한 물이 바닥에 쏟아지는 걸 저 사람들이 보면 누가 먼저 욕을 먹을까요."

공기가 얼어붙었다.

윤대섭은 주변을 보았다. 굶주린 눈들이 그의 손을 보고 있었다. 평소에는 배급표 한 줄에 고개를 숙이던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물이 눈앞에 있었다.

"조건 말해."

"제가 가져온 밀봉 식량과 물은 압수 대상이 아닙니다. 거래 대상입니다. 대가로 배급권 여덟 장. 보일러실 옆 빈칸. 정비반 폐필터와 부품 보관함에 접근할 권한."

"배급권 여덟 장?"

"생수 한 병이면 열 명은 움직입니다."

"너무 많이 배웠군."

"굶으면서 배운 겁니다."

윤대섭의 눈이 가늘어졌다.

"출처는."

민혁은 대답하기 전에 병뚜껑을 돌렸다. 맑은 물 냄새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주변 사람들이 앞으로 한 발씩 기울었다.

"북쪽 폐냉장 물류칸입니다. 밀봉 비상 저장품이 조금 남아 있었습니다."

"위치."

"그건 안 팝니다."

"혼자 독점하겠다?"

"제가 길을 압니다. 제가 독 안개를 뚫습니다. 제가 죽을 위험을 감수합니다. 그러니 가격도 제가 정합니다."

윤대섭은 책상을 두드렸다.

"배급권 네 장. 빈칸은 없어. 폐부품은 정비반 허락 없이는 못 건드린다."

민혁은 말없이 병을 들어 바닥 쪽으로 기울였다.

"야!"

윤대섭이 벌떡 일어났다.

민혁은 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그저 보여주기만 했다. 하지만 배급장 안의 사람들은 숨을 멈췄다.

천막 뒤쪽에서 마른 기침이 들렸다.

작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축 늘어져 있었다. 입술이 갈라졌고 눈꺼풀은 반쯤 감겨 있었다. 어머니는 아이를 감싸 안은 채 민혁과 윤대섭 사이를 번갈아 보았다.

민혁은 순간 부모님이 떠올랐다.

마지막 물을 자신에게 밀어주던 어머니의 손. "너라도 마셔"라고 속삭이던 쉰 목소리. 그 기억이 목 안쪽을 긁었다.

그는 얼굴을 굳혔다.

동정으로 보이면 안 된다. 공짜로 나눠주기 시작하면 전부 달려든다.

민혁은 병뚜껑에 물을 조금 따랐다.

"시범입니다."

그는 아이 어머니에게 뚜껑을 내밀었다.

여자는 손을 떨며 그것을 받았다. 아이의 입술에 물을 묻혔다. 아이의 목울대가 아주 작게 움직였다.

한 번.

두 번.

아이는 희미하게 눈을 떴다.

"엄마."

여자의 얼굴이 무너졌다.

"맑아. 진짜 맑은 물이야."

그 한마디가 배급장을 흔들었다.

"나도 한 모금만."

"배급권 있어. 내 거 줄게."

"우리 애도 좀."

사람들이 앞으로 몰렸다. 민혁은 대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칼을 뽑지는 않았다. 그 자세만으로도 사람들의 발이 멈췄다.

"줄 섭니다."

민혁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밀면 물은 없습니다. 빼앗으려 들면 병째 깨집니다. 거래할 사람만 남으십시오."

쉘터 안에서 그토록 조용한 순간은 드물었다.

윤대섭이 이를 악물었다. 그는 자신이 더 버티면 주민들의 시선이 완전히 돌아설 것을 알았다.

"배급권 여덟 장. 보일러실 옆 빈칸. 정비반에는 내가 말해두지."

"제가 누구에게 얼마를 팔지는 간섭하지 마십시오."

"그것까지?"

"그게 싫으면 여기서 끝입니다."

윤대섭은 배급표 서랍을 열었다. 낡은 종이권 여덟 장을 꺼내 책상 위에 던졌다.

민혁은 그중 두 장을 집어 아이 어머니에게 밀어 주었다.

"오늘은 아이를 먹이십시오. 나중에 갚으면 됩니다."

여자는 멍하니 민혁을 보았다.

"왜……."

"죽으면 빚도 못 갚습니다."

차갑게 말했지만 목소리 끝은 조금 잠겼다.

민혁은 통조림을 아주 작게 나눴다. 손톱만 한 살점이었다. 그래도 몇 사람은 그것을 혀 위에 올리고 눈을 감았다.

"고기야."

"비린내가 안 나."

"상한 맛이 없어."

그 반응만으로도 가격은 정해졌다.

민혁은 생수 작은 병 두 개와 통조림 하나를 공개 거래로 풀었다. 대가는 배급권과 낡은 방한 장갑, 아직 쓸 만한 정화통 하나, 그리고 보일러실 옆 빈칸의 사용권이었다.

남은 물자는 절대 꺼내지 않았다.

첫날에 전부 보여주면 다음날 목숨을 잃는다.

보일러실 옆 빈칸은 방이라고 부르기 민망했다. 콘크리트 벽 사이에 방수천을 걸어둔 틈새였다. 그래도 바람이 덜 들었고 바닥이 비교적 말라 있었다.

민혁은 안쪽으로 들어가 남은 생수병을 하나씩 꺼냈다. 병목에 묻은 붉은 먼지를 닦고 다시 천으로 감았다. 컵라면은 가장 깊은 곳에 숨겼다. 미확인 광석은 야상 안쪽 주머니에 따로 넣었다.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멈췄다.

"문 닫을 줄은 아네요."

민혁은 고개를 들었다.

헝클어진 단발머리. 이마 위에 걸친 낡은 열화상 고글. 기름때가 밴 작업복. 정비반의 한소희가 방수천 밖에 서 있었다.

민혁과 몇 번 폐부품 거래를 했던 여자였다. 말이 적고 눈이 날카로웠다. 기계를 볼 때만 살아나는 사람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정비반 폐부품 보관함에 접근권을 요구했다면서요."

"필요한 게 있습니다."

"폐필터로 뭘 하게요?"

"팔 수 있는 걸 찾으려고요."

소희는 대답 대신 민혁 옆의 생수병을 보았다. 라벨은 없었다. 그러나 병목의 투명한 홈과 바닥의 압축 무늬, 뜯다 만 접착제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병 이상해요."

민혁의 손이 천천히 자루 쪽으로 내려갔다.

"뭐가 말입니까."

"멸망 전 물류 기록에 있는 생수병 규격이랑 안 맞아요. 병목 구조도 다르고 바닥 성형도 달라요. 플라스틱 투명도도 지나치게 좋아요."

"북쪽 창고가 워낙 오래 닫혀 있었으니까요."

"오래 닫혀 있으면 더 누렇게 삭아야죠. 저건 방금 공장에서 나온 물건 같아요."

소희는 민혁을 빤히 보았다.

"따질 생각은 없어요."

"그럼 왜 왔습니까."

"정화기 2번 필터가 하루 이틀 안에 끝나요. 그거 멈추면 이 구역 사람들 절반은 오염수 마셔야 해요. 윤대섭은 숨기고 있지만 정비반은 알아요."

민혁은 말을 멈췄다.

정화기.

현대 서울의 필터. 공구. 호스. 밸브. 어쩌면 돈만 있으면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직 그는 이쪽 세계에서 돈이 없었다. 하지만 검푸른 광석이 있었다. 그리고 물 한 병으로 배급장을 흔든 경험이 있었다.

소희가 한 발 다가왔다.

"진짜 필터 부품이 필요하면 나랑 거래해요. 그 물이 어디서 났는지는 묻지 않을게요. 대신 거짓말은 짧게 해요. 길어지면 티 나니까."

민혁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슴 안쪽의 청동 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다음 문이 열릴 때까지 그는 이 지하에서 버텨야 했다.

하지만 이제 빈손은 아니었다.

이 지하에는 그가 가진 물맛을 아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리고 그 물맛을 가장 정확히 의심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민혁은 천으로 감싼 생수병 하나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좋습니다. 대신 조건은 제가 정합니다."

소희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그 말부터 마음에 안 드네요."

보일러실 너머에서 정화기가 긴 쇳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끼이이익.

멈추기 직전의 기계가 지르는 비명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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