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에서 평화로운 지구로 출퇴근합니다

2화: 물 한 병의 가격
편의점 자동문이 맑은 종소리를 내며 열렸다.
강민혁은 문턱 안쪽에서 한 박자 멈췄다. 천장 조명이 눈부셨고 바닥은 물청소라도 한 듯 반들거렸다. 무엇보다 냉장고 안쪽에 줄지어 선 투명한 생수병들이 시선을 붙들었다.
500밀리리터짜리 생수. 2리터짜리 생수. 탄산수와 이온 음료. 뚜껑만 돌리면 바로 마실 수 있는 깨끗한 물이 유리문 뒤에 빼곡했다.
송도 쉘터라면 저 냉장고 하나를 두고 작은 전쟁이 벌어졌을 것이다.
"어서 오세요."
계산대의 젊은 직원이 인사를 하다 말고 민혁을 훑어보았다. 낡은 야상 점퍼와 흙먼지, 한쪽 어깨에 멘 낡은 자루. 자루 밖으로 살짝 비친 녹슨 금속 손잡이까지.
직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민혁은 손잡이를 자루 안쪽으로 천천히 밀어 넣었다. 대검을 꺼내 들 생각이 없다는 표시였다. 이곳의 사람들은 방독면도 쓰지 않고 칼도 차지 않았다. 이 세계의 규칙을 거스르는 순간 신고당할 것이다.
"물하고 먹을 것 좀 사겠습니다."
그는 최대한 낮고 평범한 목소리를 냈다.
직원은 잠깐 계산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비상 버튼인지 무전기인지 알 수 없었다. 민혁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수상해 보여도 손님으로 남아 있어야 했다.
"네. 필요하신 거 고르시면 됩니다."
냉장고 손잡이를 잡자 손바닥에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민혁은 그 감촉만으로도 어깨에서 힘이 빠질 뻔했다. 그는 생수 두 병을 꺼냈다. 가격표에는 천 원이라는 숫자가 붙어 있었다.
"목숨값이 천 원이라."
중얼거림은 냉장고 소음에 묻혔다.
삼각김밥 세 개와 컵라면 두 개도 골랐다. 진열대의 음식들을 전부 쓸어 담고 싶었다. 하지만 주머니 속 지폐는 많지 않았고 무엇보다 눈에 띄면 안 됐다.
계산대 위로 물건들이 올라갔다.
삑. 삑. 삑.
바코드를 찍는 기계음이 어처구니없이 평화로웠다. 송도에서는 음식 하나를 확인하려면 냄새를 맡고 곰팡이를 도려내고 독성 반응을 살펴야 했다. 이곳에서는 기계가 가격만 읽었다.
"팔천육백 원입니다."
민혁은 낡은 지갑에서 꼬깃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냈다. 직원은 지폐 상태를 확인한 뒤 거스름돈과 영수증을 내밀었다.
"전자레인지는 저쪽이고 뜨거운 물은 옆에 있어요."
"감사합니다."
민혁은 옆 테이블의 학생을 몰래 살폈다. 삼각김밥 포장을 뜯는 손놀림을 보고 나서야 비닐의 검은 띠를 잡아당겼다. 얇은 김이 밥을 감싸는 구조가 신기할 만큼 정교했다.
첫입을 베어 물었다.
턱이 멈췄다.
짭조름한 김과 부드러운 밥알, 속에 든 고소한 참치마요가 혀 위에서 풀렸다. 곰팡이 냄새가 없었다. 쇳물 같은 쓴맛도 없었다. 씹을 때 모래가 씹히지도 않았다.
그냥 음식이었다.
"……진짜 밥이네."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민혁은 황급히 생수병 뚜껑을 돌렸다. 한 모금만 마시려 했다. 몸이 놀라지 않게 천천히 넘기려 했다. 하지만 차갑고 깨끗한 물이 혀를 적시자 모든 계획이 무너졌다.
꿀꺽. 꿀꺽.
반 병이 순식간에 비었다. 폐가 아니라 몸속 깊은 곳까지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오염수의 비린내에 익숙해진 목구멍이 맑은 물을 낯설어했다. 너무 깨끗해서 아플 정도였다.
민혁은 이를 악물었다.
부모님이 살아 있었다면.
쉘터 구석에서 물 한 모금을 아끼다 쓰러진 사람들이 이걸 마실 수 있었다면.
생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컵라면의 매운 냄새가 올라왔다. 그는 뜨거운 물을 붓고 플라스틱 젓가락을 손에 쥔 채 뚜껑 위의 숫자를 노려보았다. 몇 분을 기다리는 일이 이렇게 괴로울 줄 몰랐다.
마침내 면을 들어 올렸다.
후루룩.
뜨거운 국물이 입안을 때렸다. 혀끝이 데었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짜고 맵고 기름진 맛이 텅 빈 위장을 사정없이 깨웠다.
그는 국물 한 방울까지 마셨다.
직원이 몇 번 힐끔거렸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민혁은 빈 컵을 내려놓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죽지 않았다. 아직 살아 있었고 이 세계에는 음식과 물이 넘쳤다.
배가 조금 차오르자 머리가 다시 움직였다.
편의점 벽시계는 밤 열두 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가슴 안쪽에 뿌리내린 청동 문은 여전히 조용했다. 바닥이 드러난 우물처럼 텅 빈 감각. 돌아가려면 적어도 반나절을 기다려야 했다.
그동안 이 도시에서 버텨야 한다.
민혁은 남은 생수 한 병과 삼각김밥 하나를 자루 깊숙이 넣었다. 자동문이 닫히자 편의점의 따뜻한 조명과 음식 냄새가 등 뒤로 멀어졌다.
새벽 공기는 차가웠다.
그는 큰길을 피해서 공중화장실을 찾았다. 거울 앞에 선 자신의 몰골은 처참했다. 얼굴에는 붉은 먼지와 검댕이 엉겨 있었고 머리카락은 땀과 포자 가루로 뭉쳐 있었다.
수도꼭지를 틀었다.
맑은 물이 쏟아졌다.
민혁은 반사적으로 손을 거뒀다. 이렇게 물을 흘려보내도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송도에서는 금이 간 파이프 밑에 종일 컵을 대고 서도 이만큼 깨끗한 물을 얻지 못했다.
그는 천천히 손을 씻었다. 손등의 피딱지와 먼지가 하수구로 흘러갔다. 얼굴을 닦자 차가운 물이 피부를 깨웠다. 붉은 가루가 씻겨 내려가고 거울 속에 조금 덜 수상한 남자가 남았다.
"여긴 정말 망하지 않았어."
말은 작게 흘러나왔다.
자루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구리 전선 몇 가닥, 알루미늄 판, 깨진 기계 부품, 그리고 검푸른 빛이 도는 작은 광석 조각 두 개.
폐창고에서 주운 물건이었다. 마물 둥지 근처 고철 더미에서 종종 이런 돌이 섞여 나왔다. 쉘터 사람들은 장식품 취급을 했다. 불도 붙지 않고 먹을 수도 없었으니까.
민혁은 이상하게 버리지 못했다. 무게에 비해 단단했고 어둠 속에서 아주 희미한 빛을 품는 듯했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는 다를지도 모른다.
그는 화장실을 나와 골목을 걸었다. 사람 많은 대로변은 피했다. 대검을 숨겼다 해도 낡은 자루와 야상 점퍼만으로 충분히 눈에 띄었다. 경찰차가 지나갈 때마다 민혁은 편의점 그늘이나 건물 입구로 몸을 숨겼다.
새벽 세 시가 지나자 도시는 조금 조용해졌다.
민혁은 영수증을 펼쳤다. 생수 두 병, 삼각김밥 세 개, 컵라면 두 개. 전부 합쳐 만 원도 되지 않았다.
만 원이면 송도에서 며칠 치 권력이었다. 생수 한 박스면 굶주린 스캐빈저 열 명을 움직일 수 있다. 컵라면 한 상자면 쉘터 관리인에게서 잠자리 하나를 빌릴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돈이었다.
지갑에 남은 지폐는 얼마 없었다. 이 풍요를 계속 가져가려면 이쪽 세계의 돈을 만들어야 했다.
그때 골목 끝에서 낡은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고철 매입. 비철 금속. 폐전선 환영.
민혁의 시선이 자루로 내려갔다.
고물상은 이른 아침부터 문을 열었다. 안쪽에는 찌그러진 자전거와 구리선 뭉치, 오래된 보일러 부품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기름때 묻은 점퍼를 입은 중년 남자가 난로 옆에서 종이컵 커피를 마시다 민혁을 보았다.
"뭐 팔러 왔어요?"
"전선하고 알루미늄 조금 있습니다."
"보여줘요."
민혁은 자루를 내려놓았다. 대검은 야상 안쪽에 더 깊이 밀어 넣었다. 주인의 눈이 자루와 민혁의 얼굴을 오갔다.
"어디 공사장에서 나온 건 아니죠?"
"폐건물에서 주웠습니다."
"요즘 폐건물에서 주웠다는 말이 제일 수상해요."
주인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구리선을 집어 들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피복 상태를 보고 저울에 올렸다. 알루미늄 판도 따로 분류했다.
"양이 얼마 안 되네. 이 정도면 몇천 원이에요."
"얼마든 괜찮습니다."
그 대답이 더 수상했는지 주인이 눈썹을 올렸다. 그래도 더 캐묻지는 않았다. 지폐 몇 장과 동전이 민혁의 손에 쥐어졌다. 작고 초라한 돈이었다. 그래도 돈이었다.
민혁이 자루를 닫으려는 순간 검푸른 광석 하나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툭.
주인의 시선이 그쪽에 박혔다.
"그건 뭐예요?"
"폐기계에 붙어 있던 돌입니다."
"돌?"
주인이 광석을 집어 들었다. 그는 자석을 가까이 대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이어 작은 측정기 같은 것을 꺼내 표면에 갖다 댔다.
삑.
낮은 전자음이 울렸다.
"이상하네."
민혁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굳었다.
"고철은 아닙니까?"
"철은 아닌데 그냥 돌도 아니에요. 밀도가 이상합니다. 색도 그렇고."
주인은 광석을 조명 아래로 가져갔다. 검푸른 표면 안쪽에서 아주 옅은 빛줄기가 돌았다. 민혁은 주인의 눈빛이 조금 달라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운석 조각 장난감 같은 것도 요즘 많긴 한데 이건 좀 묘하네요. 우리 집에서 살 물건은 아닙니다."
"값이 나갈 수도 있습니까?"
"진짜면요. 가짜면 그냥 예쁜 돌이고요. 마포 쪽에 희귀 광물 감정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데 가져가 봐요. 괜히 아무 데나 넘기지 말고."
주인은 광석을 돌려주었다.
민혁은 그것을 받아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심장이 조용히 빨라졌다. 송도에서 쓰레기 더미에 굴러다니던 돌이 이쪽에서는 감정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고물상을 나왔을 때 하늘은 조금씩 희어지고 있었다. 가슴 안쪽의 청동 문도 아주 천천히 물이 차오르는 우물처럼 진동하기 시작했다.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다.
민혁은 다시 편의점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 생수 큰 병, 컵라면, 통조림, 초콜릿바를 골랐다. 계산대에 올릴 때마다 머릿속으로 무게를 계산했다.
50킬로그램을 넘기면 안 된다.
욕심을 부리면 통로가 자신을 찢는다. 그는 고철 일부를 골목 쓰레기통 옆에 버렸다. 대신 광석 조각 두 개는 품 안쪽에 따로 숨겼다.
송도에서는 생수 한 병이 목숨값이었다. 이곳에서는 천 원짜리 상품이었다. 그리고 저쪽에서 버려진 돌 하나가 이쪽에서는 어쩌면 생수 수십 상자가 될 수 있었다.
민혁은 자루 끈을 고쳐 멨다.
붉은 안개와 굶주린 쉘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빈손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