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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에서 평화로운 지구로 출퇴근합니다1화

아포칼립스에서 평화로운 지구로 출퇴근합니다

아포칼립스에서 평화로운 지구로 출퇴근합니다

시놉시스

붉은 독성 안개와 정체불명의 '스포어 바이러스'로 인해 온 세상이 멸망한 지 5년. 송도 지하 쉘터의 하급 스캐빈저 강민혁은 스포어 변종의 습격을 받던 절체절명의 순간, 평화로운 현대 서울 마포로 연결되는 차원 이동 능력을 각성한다.


1화: 퇴근길이 열렸다

치익, 치익.

낡은 방독면 정화통이 거친 숨소리를 뱉어냈다. 금이 간 유리 고글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온통 붉은빛이었다. 스포어 바이러스를 가득 머금은 적색의 독 안개. 인천 송도 남부의 버려진 물류창고는 그 죽음의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강민혁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손목에 찬 산소 잔여량 게이지를 확인했다. 바늘은 이미 붉은색 경고 구역을 가리키고 있었고 남은 시간은 길어야 15분이었다.

"제길, 쓸 만한 건 전부 썩었잖아."

민혁은 메고 있던 낡은 자루를 고쳐 멨다. 자루 안에는 오늘 서너 시간 동안 목숨을 걸고 폐허를 뒤져 찾아낸 구리 전선 몇 가닥과 알루미늄 판때기가 전부였다. 이 정도로 지하 쉘터에 돌아가 봐야 얻을 수 있는 건 곰팡이 슨 마른 빵 한 조각이 전부였다. 그나마도 오염된 썩은 물로 반죽해 먹을 때마다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쓰레기였다.

그때였다.

스스슥.

적막한 폐허 속에 기분 나쁜 마찰음이 울렸다. 민혁의 척추를 타고 서늘한 전율이 흘렀다. 스캐빈저 생활 3년 동안 다져진 생존 본능이 머릿속에서 비상경보를 울렸다. 민혁은 황급히 허리춤에 차고 있던 녹슨 군용 대검을 뽑아 들었다.

저 멀리 붉은 독 안개 속에서 두 개의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하나가 아니었다. 셋, 다섯, 여덟. 안개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그것들은 흉물스럽게 변이된 괴수들이었다.

스포어 울프.

감염된 늑대의 형상을 한 괴수들의 등 가죽에는 징그러운 포자 버섯과 균사들이 잔뜩 돋아나 있었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에는 오직 살육과 식욕만이 번뜩였다.

크르르릉.

우두머리로 보이는 거대한 변종 늑대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뚝뚝 떨어지는 침이 닿자 바닥의 콘크리트 조각이 붉은 곰팡이와 함께 녹아내렸다.

"하필 이런 때에……."

민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방독면 안쪽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스포어 울프는 소리와 냄새에 민감하다. 도망치는 순간 척추가 뜯겨 나갈 것이 뻔했다.

민혁은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발끝에 차가운 강철 벽이 닿았다. 막다른 길이었다. 물류창고 구석에 방치된 녹슨 철제 계단과 그 위의 좁은 비상 대피용 플랫폼이 유일한 퇴로였다.

카앙!

민혁이 대검으로 철제 계단을 강하게 내리쳤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사방으로 퍼졌다. 순간 늑대들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소리에 민감한 놈들의 약점을 찌른 임시방편이었다.

민혁은 그 틈을 타 계단을 딛고 위로 내달렸다. 낡은 강철 계단이 비명을 지르며 흔들렸다.

크와아앙!

기만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우두머리 울프가 폭발적인 속도로 계단을 뛰어올랐다. 거대한 덩치가 단숨에 민혁의 턱밑까지 쫓아왔다.

"저리 가, 이 미친 괴물 새끼야!"

민혁은 플랫폼 위로 올라서며 아래쪽을 향해 대검을 크게 휘둘렀다.

서걱!

대검 끝이 늑대의 코끝을 스쳤다. 늑대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지만 가죽에 돋아난 포자 주머니가 터지며 붉은 가루를 뿜어냈다.

"쿨럭! 헉……!"

마스크 틈새로 독성 포자가 일부 스며들었다. 폐가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통증에 민혁의 시야가 흔들렸다. 그사이 다른 울프들도 계단을 타고 올라와 플랫폼을 포위했다.

철제 플랫폼은 지상에서 5미터 높이였고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었다. 추락하면 뼈가 부러져 늑대들의 밥이 될 뿐이었다.

크르르르.

우두머리 울프가 민혁의 목덜미를 조준하며 뒷다리에 힘을 주었다. 놈의 눈에 서린 잔혹한 빛이 민혁의 영혼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송도 지하 쉘터에서 하루하루 구걸하듯 살아온 비참한 삶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부모님을 역병으로 잃고 혼자 살아남기 위해 온갖 더러운 짓을 버텨왔다. 이렇게 허무하게 늑대들의 고기 조각이 되려고 그 지옥 같은 날들을 버틴 게 아니었다.

'살고 싶다.'

민혁의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덩어리 같은 갈망이 솟구쳤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깨끗한 물 한 모금이라도 마음껏 마셔보고 싶었다. 배가 터지도록 맛있는 음식을 먹고 차가운 방독면 없이 따뜻한 방에서 잠들고 싶었다.

그 간절한 생존 의지가 심장을 쥐어짜는 순간 머릿속에서 번쩍이는 충격파와 함께 이능의 회로가 강제로 개방되었다.

파아앗!

민혁의 가슴팍에서 시작된 푸른 광막이 공간을 찢으며 사방으로 뿜어졌다.

"……어?"

눈앞의 공간이 물을 뿌린 도화지처럼 투명하게 흐려지더니 이내 거대한 푸른빛의 균열이 입을 벌렸다. 그것은 아포칼립스의 어떤 기술로도 설명할 수 없는 차원의 틈새였다.

크와아앙!

우두머리 울프가 허공을 가르며 민혁을 향해 도약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코앞까지 다가온 찰나 민혁은 본능적으로 몸을 던졌다. 늑대의 아가리가 아닌 눈앞에 나타난 푸른 균열 속으로.

텅!

공간이 수축하며 푸른 빛무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허공을 가른 늑대는 텅 빈 철제 플랫폼 바닥을 들이받고 황당한 듯 붉은 눈을 깜빡였다.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쿠당탕!

"아악!"

민혁은 단단하고 거친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볼과 무릎에 지독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뼈가 부러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반사적으로 대검을 고쳐 쥐고 사방을 경계했다. 늑대들의 이빨이 언제 날아올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포자 가루에 절어 피비린내가 진동하던 공기 대신 코끝을 스치는 것은 차갑지만 믿기지 않을 만큼 맑은 공기였다.

"……?"

민혁은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두컴컴한 골목길이었다. 머리 위로는 붉은 독 안개 대신 짙은 푸른색의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붉은 안개에 가로막혀 수년 동안 보지 못했던 은은한 달빛이 골목 구석을 비추고 있었다.

벽면에는 이상한 전선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바닥은 아스팔트로 매끄럽게 포장되어 있었다. 어디선가 웅웅거리는 기계음과 저 멀리서 달리는 자동차 바퀴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주마등인가? 아니면 환각?"

아까 마스크 틈새로 들이마신 스포어 바이러스 포자가 생각났다. 뇌가 오염되어 죽기 직전의 환상을 보는 것일지도 몰랐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민혁은 떨리는 손으로 방독면을 벗었다. 스포어 가스가 가득한 곳에서 방독면을 벗는 것은 자살 행위였지만 직감이 속삭이고 있었다. 이곳은 아포칼립스가 아니라고.

하아아아.

민혁의 입에서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들이마신 공기는 차갑고 신선했다. 폐를 찌르던 통증도 없었고 구역질 나는 독성 물질의 맛도 나지 않았다. 그저 아주 평범하고 깨끗한 밤공기였다.

"진짜…… 공기잖아?"

민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꿈이 아니었다. 볼을 세게 꼬집어 보니 확실한 통증이 뇌리를 찔렀다. 5년 만에 들이마시는 진짜 공기의 맛에 목구멍이 울컥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골목 밖의 밝은 불빛을 향해 걸어갔다. 더러운 야상 점퍼와 녹슨 대검을 쥔 민혁의 모습은 영락없는 노숙자 같았지만 지금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골목 모퉁이를 돌자 차마 믿기 힘든 광경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눈이 멀 것 같이 화려한 오색의 네온사인 불빛. 깔끔하게 닦인 아스팔트 도로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최신형 자동차들. 두꺼운 패딩 아우터와 코트를 차려입은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웃고 떠들며 길을 걷고 있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그들 중 누구도 방독면을 쓰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말도 안 돼……."

민혁은 넋을 잃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5년 전 문명이 멸망하기 전의 서울과 똑같은 풍경이었다. 하지만 주변 건물의 간판을 보니 자신이 기억하는 것과 전혀 달랐다. '에스전자', '세란병원', 들어본 적 없는 브랜드들이 번화가를 채우고 있었고 전광판에는 2026년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세계가 멸망한 해는 분명 2021년이었다. 만약 시간 여행을 해서 과거로 온 것이라면 2026년일 리가 없었다. 5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미래의 서울이 그것도 붉은 독 안개 하나 없이 평화롭고 찬란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자신이 알던 지구와는 미묘하게 역사가 다르게 흐른 평행 세계의 서울. 혹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지구라는 결론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자신이 미쳐버린 것이 아니라면 정말로 멸망하지 않은 다른 세상으로 넘어온 것이 분명했다.

그때 민혁의 시선이 도로 건너편에 위치한 편의점에 멈췄다. 밝은 백색광이 뿜어져 나오는 유리창 너머로 수많은 물건들이 깔끔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생수병이 가득 차 있는 냉장고. 대포알처럼 쌓여 있는 컵라면과 햇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호빵 기계까지.

아포칼립스에서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 겨우 얻을 수 있는 깨끗한 물과 식료품들이 그곳에서는 흔해 빠진 쓰레기처럼 쌓여 있었다.

꿀꺽.

민혁의 목덜미가 크게 움직였다. 극심한 굶주림과 갈증이 다시금 온몸을 지배했다. 그는 무작정 횡단보도를 건너려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거대한 울림이 일며 가슴속 깊은 곳에서 낯설고 이질적인 무언가가 요동쳤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자신의 영혼 한구석에 굳건한 청동 문 하나가 단단히 뿌리를 내린 듯한 감각이었다.

'돌아갈 수 있어.'

민혁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아포칼립스의 송도 폐창고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문이 자신에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즉시 돌아가려고 문을 열려던 찰나 뇌를 쪼개는 듯한 극심한 두통이 몰려왔다. 가슴 깊은 곳에서 생명력이 통째로 빨려 나간 듯 오한이 돌았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죄어왔다.

마치 바닥까지 바짝 말라버린 깊은 우물 같았다. 다시 그 힘을 짜내기 위해서는 적어도 반나절, 꼬박 12시간은 온전히 쉬며 영혼의 우물에 힘이 차오르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신체가 본능적으로 보내는 거부할 수 없는 경고였다.

게다가 차원을 건너오는 순간 대검과 고철 자루를 필사적으로 쥐고 있던 오른팔과 어깨가 뜯겨 나갈 것처럼 아렸다. 그 좁은 차원의 틈새를 억지로 통과하며 느낀 기이한 압박감.

영혼의 문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 질량은 자신을 제외하고 간신히 50킬로그램 남짓이었다. 만약 자루에 든 쇠붙이가 그보다 조금이라도 더 무거웠다면 통로가 통째로 붕괴하거나 자신의 팔이 잘려 나갔을 것이라는 오싹한 확신이 뇌리를 스쳤다.

"……최소 12시간 동안은 꼼짝없이 묶여 있어야 한다는 소리군."

민혁은 시큰거리는 오른 어깨를 주무르며 주머니를 뒤적였다. 5년 동안 품고 다녔던 낡은 가죽 지갑 속에 꼬깃꼬깃 접힌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이 손끝에 걸렸다. 아포칼립스에서는 불쏘시개로나 쓰이던 종이 쪼가리였지만 이곳에서는 생명선이 될 수 있는 귀한 화폐였다.

민혁은 꾀죄죄한 야상 점퍼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렸다. 그리고 어깨에 멘 고철 자루를 단단히 쥔 채 밝게 빛나는 편의점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멸망한 세계의 지옥에서 탈출해 찾아온 이 평화로운 천국에서 그의 첫 번째 생존 투쟁이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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