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멸 예정 악녀는 연금술 카페를 엽니다

3화: 차가운 황태자의 침입
라 보나의 문종이 느리게 흔들렸다.
폐점 준비를 하던 엘리제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방금 전까지 가게 안에는 버터와 카모마일 향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냉동고 문을 열어젖힌 듯한 찬 공기가 바닥을 타고 밀려왔다.
문밖에는 검은 망토를 두른 남자가 서 있었다.
후드가 얼굴 대부분을 가렸지만 눈빛만은 보였다. 푸른빛이었다. 촛불도 닿지 않는 골목에서 그 눈만 칼끝처럼 서늘하게 번뜩였다.
“마리.”
엘리제는 목소리를 낮췄다.
“주방 뒤쪽 문으로 가. 뛰지는 말고.”
마리는 빈 쟁반을 끌어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베른은 장부를 품에 넣고 카운터 옆으로 섰다.
“전하. 경비를 부를까요?”
“아직은.”
엘리제는 남자의 손을 보았다. 망토 밖으로 드러난 손끝이 희게 질려 있었다. 피부 아래 푸른 마력선이 실금처럼 갈라지고 다시 이어졌다.
평범한 손님의 피로가 아니었다.
‘저건 혈관이 아니라 과부하 걸린 배관이야.’
문밖의 남자가 손을 뻗었다. 폐점 후 걸어 둔 빗장이 안쪽에서 짧게 울렸다.
“영업은 끝났습니다.”
엘리제는 또렷하게 말했다.
“내일 아침에 오세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문고리에 닿은 그의 손가락 사이로 파란 서리가 번졌다. 쇠가 얼고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쩌적.
문고리가 유리처럼 부서졌다. 뒤이어 문짝이 안쪽으로 밀려났다.
쾅!
벽에 걸린 메뉴판이 흔들리고 카운터 위 동전 몇 닢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마리가 짧은 비명을 삼켰다.
남자는 문턱을 넘었다.
검은 망토 끝에서 차가운 마력 가루가 흘러내렸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룻바닥에 하얀 성에가 얇게 피었다.
“냄새.”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오래 잠기지 못한 칼집을 억지로 긁는 소리 같았다.
“그 단내는 어디 있지.”
엘리제는 부서진 문과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문 수리비. 안정석 점검비. 그리고 손님 응대 난이도 최상.’
그런 계산이 머릿속을 스치자 오히려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단내를 찾기 전에 사과부터 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방금 제 가게 문을 부수셨거든요.”
베른이 뒤에서 숨을 들이켰다.
남자의 시선이 엘리제에게 꽂혔다. 그 눈에는 노여움도 오만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깊은 곳에는 견디다 못해 바싹 마른 피로가 있었다.
“먹을 것을 내라.”
“주문은 말로 하셔야 받습니다.”
“맛은 모른다.”
엘리제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맛을 모르는데 단내는 왜 찾죠?”
남자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 사이로 가게 벽에 박힌 마력 안정석들이 희미하게 떨었다.
“느껴졌다.”
“무엇이요?”
“조용해지는 냄새.”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카운터 쪽으로 다가왔다. 바닥에 남아 있던 오래된 연금 찌꺼기가 그의 발밑에서 서걱거리며 갈라졌다.
엘리제는 도망칠 방향을 확인했다. 주방 뒤문. 창문. 그리고 화덕 옆 안정석 차단 레버.
다 쓸모없었다.
남자가 망토 안에 숨긴 검을 뽑는 순간 이 낡은 공방은 나무 상자처럼 쪼개질 것이다.
“그럼 확인해 보죠.”
엘리제는 진열대 아래에서 작은 접시를 꺼냈다. 개업 첫날 마지막까지 팔지 않고 남겨 둔 카모마일 릴렉스 쿠키 하나가 있었다.
마리가 아주 작게 속삭였다.
“공녀 전하. 그건 시험용으로 남긴…….”
“지금이 시험이야.”
엘리제는 쿠키를 접시에 올려 카운터 위로 밀었다.
“카모마일 릴렉스 쿠키입니다. 피로와 두통을 낮추는 안정 계열이에요. 독은 없습니다. 독이면 문값부터 받고 먹였겠죠.”
남자의 입매가 차갑게 굳었다.
“우습군.”
“웃기려고 한 말은 아닌데요.”
남자는 쿠키를 집었다. 손끝이 접시에 닿자 도자기 표면에 얇은 얼음막이 생겼다.
그는 쿠키를 한입에 넣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베른은 숨도 쉬지 못했다. 마리는 주방 문가에서 두 손을 꼭 모았다. 창밖에 남아 있던 주민 몇이 깨진 문틈으로 안을 훔쳐보다가 남자의 기운에 질려 뒤로 물러났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무 맛도 안 난다.”
엘리제는 그의 말보다 눈동자를 보았다. 미각이 완전히 죽은 사람치고는 반응이 있었다. 푸른 동공이 아주 미세하게 수축했다. 손목의 마력선도 한 박자 늦게 흔들렸다가 조금 가라앉았다.
‘혀는 못 받아도 신경 말단은 반응해. 향 자극이 막힌 회로 가장자리를 건드린 거야.’
“두통은요?”
“질문하지 마라.”
“손끝 떨림은 줄었습니다.”
남자의 눈이 매섭게 좁아졌다.
“네가 뭘 안다고.”
“적어도 손님이 제 가게 문을 부술 정도로 아프다는 건 알겠네요.”
공기가 얼어붙었다.
망토 안쪽에서 검집이 살짝 드러났다. 짙은 검은색 가죽 위에 은빛 문양이 박혀 있었다. 귀족의 장식 검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실전적이었다.
그때 골목에서 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공녀 전하! 무슨 일입니까!”
영지 경비 둘이 문 앞에 도착했다. 그들은 부서진 문과 검은 망토의 남자를 보고 동시에 창을 세웠다.
남자의 마력이 폭발하듯 부풀었다.
촛불이 퍽 꺼졌다. 남은 빛은 벽의 안정석에서 흘러나오는 푸른 광뿐이었다. 화덕 아래 회로가 저음으로 울기 시작했다.
엘리제는 즉시 손을 들어 경비를 막았다.
“들어오지 마세요!”
경비가 멈췄다.
“하지만 전하!”
“한 발 더 들어오면 가게가 터집니다.”
베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전하. 지금 터진다고 하셨습니까?”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야.”
“그게 더 무섭습니다.”
엘리제는 카운터 밖으로 걸어 나왔다. 발바닥으로 차가운 기운이 올라왔다. 치맛자락 끝이 얼음 결정에 닿아 뻣뻣해졌다.
그녀는 남자 앞에서 멈췄다.
“라 보나에서는 무기 사용 금지입니다.”
남자가 낮게 웃었다.
“네가 정했나.”
“제가 점주니까요.”
“겁이 없군.”
“겁은 많아요. 그래서 규칙을 세우는 겁니다.”
남자의 눈빛이 흔들렸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엘리제는 보았다. 그는 살육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고통이 너무 오래되어 남에게 설명하는 방법을 잊은 사람에 가까웠다.
‘과포화 마력. 감각 차단. 공격성 상승. 외부 자극에 예민한데 단맛 계열 향에는 반응.’
대학원 시절 실험실에서 폭주 직전 반응기를 붙잡고 밤을 새운 기억이 떠올랐다. 반응기를 욕한다고 온도가 내려가지는 않았다. 냉각수와 촉매와 배출구를 맞춰야 했다.
사람도 지금은 다르지 않았다.
“당신 몸 안의 마력이 엉켜 있어요.”
엘리제가 말했다.
“흐르지 못하고 신경을 누르니까 감각이 꺼진 겁니다. 맛을 못 느끼는 것도 그 연장선이고요.”
“의사 흉내인가.”
“연금술사 흉내죠. 아직 면허는 없습니다.”
“그런 자에게 내 몸을 맡기라고?”
“선택지는 둘입니다. 여기서 검을 뽑고 가게를 부순 뒤 아무것도 못 느끼는 채로 돌아가거나 십오 분만 기다리고 따뜻한 걸 하나 먹어 보는 것.”
남자의 손가락이 검집 위에서 멈췄다.
엘리제는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문값은 나중에 청구하겠습니다.”
베른이 뒤에서 거의 울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청구하실 생각이십니까?”
“당연하지. 문은 공짜가 아니야.”
그 말에 경비 둘 중 하나가 얼빠진 얼굴을 했다. 마리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도 작은 쟁반을 집어 들었다.
남자는 엘리제를 오래 내려다보았다. 푸른 눈동자에는 여전히 경계가 가득했다.
“도망치면 죽는다.”
“도망칠 거였으면 문 부서졌을 때 갔죠.”
엘리제는 몸을 돌려 주방으로 들어갔다.
안쪽 화덕은 남자의 마력 때문에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안정석 회로가 버티고 있었지만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그녀는 손끝으로 화덕 옆 보조 서클을 눌러 열 흐름을 끊고 휴대용 연금 가마를 꺼냈다.
“마리. 카모마일 릴렉스 한 줌. 블루민트는 잎 세 장만. 버터는 가장 차가운 걸로 가져와. 계란은 두 개.”
“예. 예!”
마리는 울먹이면서도 움직임은 빨랐다.
베른은 주방 문가에 서서 남자와 엘리제를 번갈아 보았다.
“전하. 저자를 먹일 수 있는 물건이 정말 있습니까?”
“있어.”
엘리제는 밀가루를 체에 내렸다.
“마력 정화 에그타르트. 처음 만든 것보다 농도를 올릴 거야. 카모마일로 응집을 풀고 블루민트로 과열된 신경 자극을 낮춘 다음 커스터드의 지방층으로 향미 전달을 늦춰.”
베른은 반쯤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비싼 겁니까?”
“아주 비싸게 받아야지.”
엘리제는 가마 아래에 새 서클을 그렸다. 원형이 아니라 나선형이었다. 한 번에 마력을 밀어 넣으면 폭발한다. 남자의 마력 파동에 맞춰 아주 얇게 잘라 넣어야 했다.
가마가 낮게 울었다.
화아아앙.
금빛 열이 바닥에서 올라왔다. 버터가 녹고 카모마일 릴렉스의 향이 퍼졌다. 블루민트의 시원한 향이 그 뒤를 받치자 차갑게 얼어 있던 매장 공기가 조금 흔들렸다.
주방 밖에서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한 걸음 움직이다 멈췄다. 부서진 문가도 카운터도 보지 않았다. 오직 가마에서 흘러나오는 향만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 냄새.”
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갈라졌다. 명령이 아니라 확인에 가까웠다.
엘리제는 커스터드를 젓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맞아요. 이번에는 제대로 맡으셨네요.”
가마 속 금빛 크림이 천천히 부풀었다. 남자의 푸른 눈에 아주 희미한 빛이 번졌다.
엘리제는 속으로 시간을 세기 시작했다.
십오 분.
그 안에 굽지 못하면 라 보나의 두 번째 영업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