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멸 예정 악녀는 연금술 카페를 엽니다

2화: 사교계 탈퇴 선언
엘리제는 아침 식탁 위에 쌓인 초대장을 독성 폐기물 보듯 내려다보았다.
분홍 봉투는 다과회. 금박 봉투는 무도회. 검은 밀랍이 찍힌 봉투는 대체로 파벌 싸움에 이름을 빌려 달라는 비밀 모임.
원래 엘리제라면 가장 화려한 봉투부터 뜯었을 것이다. 그리고 상대 영애의 드레스 색을 비웃을지 찻잔을 엎을지 고민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몸 안에 든 사람은 강지안이었다.
‘초대장이 아니라 사망 플래그 목록이네.’
엘리제는 깃펜을 들었다. 흰 종이 맨 위에는 밤새 고민한 제목이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중앙 귀족 사교회 자진 탈퇴 및 향후 비공식 모임 불참 서약서.
마리가 쟁반을 든 채 눈만 깜빡였다.
“공녀 전하, 정말 전부 거절하실 생각이십니까?”
“응. 분홍색은 반송. 금박도 반송. 검은 밀랍은 열지 말고 태워.”
“태우라고요?”
“봉인 마법 걸린 초대장은 뜯는 순간 발신자한테 확인 신호가 가. 나 참석할 생각 없다고 광고해 줄 필요는 없잖아.”
마리는 초대장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공녀가 갑자기 연금술 책을 읽는 것도 놀라웠는데 이제는 봉인 마법의 구조까지 짚고 있었다.
그때 식당 문이 조용히 열렸다.
하인장 로딘과 재무관 베른이 나란히 들어왔다. 두 사람은 이미 상황을 들은 듯했다. 베른의 품에는 장부가 끼워져 있었고 로딘의 표정에는 공작가 체면이라는 단어가 굵은 글씨로 떠 있었다.
“전하. 중앙 사교회 탈퇴는 신중히 결정하셔야 합니다.”
베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올해 사교 예산은 이미 집행되었습니다. 선물 반송비와 위약금만 최소 금화 이백 닢입니다.”
“내 보석함 두 번째 서랍에 있는 루비 목걸이를 팔아.”
베른이 숨을 멈췄다.
“그 목걸이는 수도 대장인의 한정품입니다.”
“목이 붙어 있어야 목걸이를 걸지.”
식당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엘리제는 아무렇지 않게 서약서 아래에 이름을 적었다.
엘리제 드 밸류어.
붉은 밀랍에 공녀의 인장을 누르자 종이 가장자리를 따라 얇은 빛이 번졌다. 마법 계약서가 서명을 인식한 신호였다.
로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하께서는 정말로 중앙 사교계에서 물러나실 생각이십니까?”
“물러나는 게 아니라 퇴근하는 거야.”
“퇴……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엘리제는 어제 구운 에그타르트 상자를 집어 들었다. 밤새 식었지만 연금 가마의 보온 서클 덕분에 은은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중앙 사교회 서기관이 와 있다며?”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하를 설득하라는 명을 받은 듯합니다.”
“좋아. 설득은 내가 할게.”
응접실에 앉아 있던 서기관 테오빌은 얇은 콧수염을 기른 남자였다. 그는 차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지팡이 머리만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밸류어 공녀 전하. 이런 서약은 감정이 격할 때 쓰는 문서가 아닙니다.”
“감정은 아주 안정적이야.”
엘리제는 서약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중앙 귀족 사교회 규약 제17조. 정회원은 가문 대표자의 추가 승인 없이 자진 탈퇴 신청서를 제출할 수 있고 서기관은 결격 사유가 없는 한 즉시 접수해야 한다.”
테오빌의 손가락이 멎었다.
“규약을 읽으셨습니까?”
“필요한 부분만.”
사실은 생존 논문 심사 자료처럼 외웠다.
테오빌은 곤란한 얼굴을 미소로 가렸다.
“공녀 전하의 판단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중앙의 귀부인들께서 전하의 부재를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걱정되어서입니다.”
“기뻐하겠지. 내가 찻잔을 던질 확률이 줄어드니까.”
마리가 뒤에서 작게 기침했다.
엘리제는 에그타르트 상자를 열었다. 버터 향과 카모마일 릴렉스의 부드러운 향이 응접실 공기를 바꾸었다.
테오빌의 눈이 자신도 모르게 상자 쪽으로 움직였다.
“접수 전에 하나 드세요.”
“독입니까?”
“독이면 서류부터 받게 한 다음 먹였겠지.”
이번에는 로딘이 눈을 감았다.
테오빌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손목 안쪽의 푸른 마력선이 끊어질 듯 이어졌다. 지안의 눈에는 그것이 피로 누적과 마력 순환 불량의 그래프처럼 보였다.
“잠을 못 잤군요.”
“그걸 어찌 아십니까?”
“손목 마력선이 갈라져 있어요. 지금 잉크 냄새도 역하게 느껴질 겁니다.”
테오빌의 얼굴에서 비웃음이 사라졌다.
엘리제는 접시를 밀었다.
“효과가 없으면 탈퇴 신청을 하루 미루죠.”
테오빌은 한참 망설이다 아주 작은 조각을 베어 물었다. 바삭한 페이스트리가 무너지고 커스터드가 혀에 닿는 순간 그의 어깨가 움찔했다.
손끝의 떨림이 멎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마력 안정제입니까? 그런데 왜 달죠?”
“디저트니까요.”
엘리제는 서약서 하단을 가리켰다.
테오빌은 더 버티지 못했다. 그는 품에서 청동 인장을 꺼내 서약서에 눌렀다.
중앙 귀족 사교회 접수 완료.
붉은 글자가 종이 위에 떠올랐다.
“이로써 공녀 전하는 올해 중앙 사교회 정기 명부에서 제외됩니다. 후회하셔도 복귀는 어렵습니다.”
“완벽하네요.”
엘리제는 서약서를 접어 마리에게 건넸다.
“복사본 세 부. 한 부는 공작저로 보내고 한 부는 내 방에 보관해. 마지막 한 부는 주방 벽에 붙여.”
“주방 벽이요?”
“초심 잃을 때 보게.”
테오빌의 시선은 어느새 빈 접시로 돌아가 있었다.
“그 디저트는 어디서 구입할 수 있습니까?”
엘리제는 기다렸다는 듯 웃었다.
“사흘 뒤 영지 남쪽 물레방앗간 옆에서요. 이름은 라 보나. 연금술 디저트 카페입니다.”
“그곳은 십 년 전 폭발 사고 이후 버려진 공방입니다.”
“그래서 임대료가 싸겠네요.”
베른의 반대는 공방 앞에서도 이어졌다.
낡은 공방은 멀리서 봐도 폐허였다. 문짝은 한쪽으로 기울었고 창문에는 먼지가 진흙처럼 붙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오래된 연금 찌꺼기가 검은 유리 조각처럼 바닥에 굳어 있었다.
“전하. 이건 매장이 아니라 수리 견적서입니다.”
“아니. 초기 투자 비용이 낮은 매장이야.”
엘리제는 치맛자락을 묶고 안쪽 벽으로 걸어갔다. 벽돌 사이에는 푸른 돌이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 있었다.
손끝을 대자 미약하지만 고른 파동이 돌아왔다.
“마력 안정석이 살아 있어. 화덕 온도 유지에 쓸 수 있겠네.”
베른이 장부를 내렸다.
“그걸 알아보십니까?”
“공부했거든.”
로딘이 보낸 하인들이 빗자루와 물통을 들고 들어왔다. 마리는 드레스 자락을 걷어 올리며 울상을 지었다.
“공녀 전하. 정말 직접 청소하실 겁니까?”
“직접 봐야 동선을 짜지. 가마는 저쪽. 계산대는 창가. 뒤뜰에는 카모마일 릴렉스랑 블루민트 허브를 심고.”
엘리제는 깨진 실험대를 두드려 소리를 확인했다. 썩은 목재는 빼내고 남은 석판은 작업대로 쓸 수 있었다. 무너진 배출관에는 구리관을 덧대면 됐다. 화덕의 마력 회로는 원형이 아니라 나선형으로 바꾸는 편이 열 효율이 좋았다.
“수리비 상한은 금화 오십 닢입니다.”
베른이 못 박듯 말했다.
“삼십 닢 안에서 끝낼게.”
“불가능합니다.”
“대학원생은 원래 예산 없이 실험실을 굴리는 생물이야.”
“대학…… 무엇입니까?”
“살벌한 직업 훈련소.”
마리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도 빗자루를 건넸다.
사흘 동안 공방은 조금씩 가게가 되었다.
엘리제는 먼지투성이 화덕 앞에 쪼그리고 앉아 마력 회로를 다시 그렸다. 안정석에서 나온 푸른 파동은 얇은 선을 따라 흘러 가마 아래로 모였다. 열은 급하게 치솟지 않고 부드럽게 유지됐다.
첫 메뉴도 정했다.
마력 정화 에그타르트. 카모마일 릴렉스 쿠키. 그리고 피곤한 하인들을 위해 묽게 우린 허브 밀크티.
대단한 메뉴판은 아니었다. 하지만 엘리제에게는 사교계의 독 묻은 찻잔보다 훨씬 안전하고 달콤한 무기였다.
개업 첫날 아침, 새 간판이 문 위에 걸렸다.
라 보나.
좋은 것.
엘리제는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자기 손으로 고른 다정한 말이었으니까.
문을 열었지만 손님은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길 건너편에 사람들이 모였다. 물레방앗간 주인, 시장 과일 장수, 밭일을 마친 주민들까지 모두 간판을 보고 수군거렸다.
“공녀 전하가 만든 걸 먹으면 혀가 금으로 변한다던데.”
“화나시면 사람을 개구리로 만든대.”
“그건 중앙 귀족 아가씨들한테만 그러신 거 아니야?”
엘리제는 카운터 안에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원래 엘리제. 너 진짜 열심히도 망쳐 놨구나.’
마리가 울상으로 물었다.
“제가 나가서 아니라고 말씀드릴까요?”
“소문은 말로 못 이겨. 맛으로 이겨야지.”
엘리제는 작은 접시에 쿠키를 담아 문밖으로 나갔다.
“무료 시식입니다. 독은 없고 개구리 변신 효과도 없습니다. 피곤한 사람에게만 약간 유리해요.”
주민들이 동시에 반 걸음 물러났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맨 앞에 있던 꼬마가 손을 들었다.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모험을 하는 얼굴로 쿠키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달다.”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엄마, 꽃 냄새 나. 근데 머리가 안 아파.”
그 말 한마디가 분위기를 바꾸었다.
과일 장수가 조심스럽게 쿠키를 집었다. 이어 물레방앗간 주인이 에그타르트를 반으로 잘라 먹었다. 굳어 있던 어깨가 풀리고 피곤한 눈가가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이거 먹으니까 속이 편한데?”
“마력 약 냄새가 안 나.”
“공녀 전하가 직접 만드신 거라고?”
엘리제는 카운터로 돌아와 첫 주문을 받았다.
동전 세 닢이 나무 접시에 떨어졌다.
작고 평범한 소리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단두대 칼날이 내려오는 환상보다 훨씬 선명했다.
해가 기울 무렵 준비한 쿠키와 에그타르트는 모두 팔렸다. 마리는 지쳐서 의자에 앉았지만 입가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베른은 매출 장부를 세 번이나 다시 계산했다.
“전하. 재료비와 수리비 일부를 제외해도 흑자입니다.”
“봤지? 폐허가 아니라 매장이랬잖아.”
엘리제는 마지막 찻잔을 닦으며 창밖을 보았다.
그 순간 등골을 훑는 차가운 감각이 지나갔다.
마력 파동이었다. 평범한 손님에게서 나올 수 없는 밀도였다. 칼날처럼 예리하고 얼음처럼 텅 빈 기운이 골목 끝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문밖에 검은 망토를 두른 남자가 멈춰 섰다.
후드 아래에서 푸른 눈빛이 희미하게 번뜩였다.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주변 공기가 가늘게 떨렸다.
엘리제는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았다.
‘저건 손님일까, 사고일까.’
라 보나의 문종이 느리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