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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하고 싶은데 고백받았습니다2화

퇴사하고 싶은데 고백받았습니다

퇴사하고 싶은데 고백받았습니다

2화: 농담이 심하군

로잘린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의무실의 흰 천장이 아니었다.

황제였다.

칼릭스 에스토반 반 크로이츠가 침대 머리맡에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피 묻은 검을 들고 전장을 밟을 때보다 더 험악한 얼굴이었다.

로잘린은 눈만 깜박였다.

'지옥인가?'

아니었다. 지옥이라면 최소한 출근은 없을 것이다.

"깨어났군."

칼릭스의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 밤새 누구 하나 목을 친 사람의 목소리라기보다 밤새 아무도 못 죽여서 신경이 곤두선 사람의 목소리에 가까웠다.

"제가 얼마나 잤습니까?"

"네 시간."

"네 시간……."

로잘린은 눈을 감았다. 과로로 쓰러졌으면 관례상 사흘은 쉬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세계의 회복 포션은 노동자의 권리를 해치는 방향으로만 발전한 듯했다.

침대 옆에는 궁의관 베르딘이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진찰 기록지가 들려 있었다.

"보좌관님께서는 극심한 수면 부족과 영양 결핍 상태입니다. 맥박도 불규칙합니다. 위장 기능 역시 많이 약해져 있습니다. 최소 일주일은 업무에서 떨어져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일주일."

로잘린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생기가 돌았다.

"폐하, 들으셨습니까. 의학적 소견입니다."

칼릭스의 시선이 베르딘에게 향했다. 베르딘은 그 자리에서 서류가 된 사람처럼 납작하게 굳었다.

"일주일 동안 일하지 않으면 죽나?"

"아닙니다. 오히려 일하면 위험합니다."

"그 말고."

칼릭스가 손가락으로 의무실 한쪽 탁자에 쌓인 보고서 더미를 가리켰다.

"제국이 죽느냐고 물었다."

로잘린은 이불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과로 환자 앞에서 제국의 생사를 묻는 상사라니. 자신은 지금 병가를 낸 것이 아니라 국가 재난 회의에 출석한 모양이었다.

"제국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습니다."

로잘린이 대신 대답했다.

"폐하께서 지난 삼 년간 제 보고서에 도장만 제대로 찍으셨다면 말입니다."

의무실이 조용해졌다.

베르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시종장 마르셀은 문가에서 숨을 삼켰다. 평소였다면 목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발언이었다.

하지만 칼릭스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로잘린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회복 포션이 흐르는 수정관 아래로 드러난 손목은 종잇장처럼 얇았다.

"네 몸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왜 말하지 않았지."

"말했습니다."

"언제."

"일일 업무 조정 요청서 27건, 인력 충원 요청서 11건, 야간 호출 제한 건의서 8건, 수면권 보장에 관한 비공식 의견서 3건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칼릭스의 눈썹이 아주 느리게 올라갔다.

"그건 불평이 아니라 문서였지."

"폐하께서는 문서 외의 언어를 들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로잘린은 목이 칼칼해 물을 찾으려 했다. 컵은 멀리 있었다. 손을 뻗기도 전에 칼릭스가 컵을 들어 그녀의 입가에 가져왔다.

로잘린은 잠시 멈칫했다.

그가 남을 돌보는 모습은 세상이 멸망하는 장면보다 낯설었다. 하지만 목이 말랐기 때문에 일단 마셨다.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정신이 더 또렷해졌다.

"그럼 제 사표는 접수된 것으로 알겠습니다."

칼릭스의 손이 멈췄다.

컵 안의 물결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농담이 심하군."

"농담이 아닙니다."

"과로로 정신이 흐려진 것이다."

"과로로 흐려졌던 정신이 네 시간 수면으로 조금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직하겠습니다."

칼릭스는 천천히 컵을 내려놓았다.

그 동작이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위험했다. 전장의 칼릭스는 큰 소리로 명령하지 않았다. 조용히 손가락만 움직였고 사람은 그 뒤에 죽었다.

로잘린은 몸을 일으키려다 어지러움에 눈앞이 하얘졌다. 그래도 물러서지 않았다.

"원본이 훼손되었으니 사본을 제출하겠습니다. 제가 황제 폐하께 드리는 사직서를 한 장만 준비했을 리 없잖습니까."

그녀는 베개 밑을 더듬었다.

없었다.

품 안도 비어 있었다. 작은 서류 봉투도, 도주 자금 주머니도, 비상 연락망도 보이지 않았다.

칼릭스가 손을 들었다.

검은 가죽 봉투 하나가 그의 손끝에 매달려 있었다.

"이걸 찾나?"

로잘린의 얼굴에서 피가 빠졌다.

"그건 제 사유 재산입니다."

"환자의 몸에 불필요한 물건을 지니게 할 수 없다는 의관의 판단이었다."

베르딘이 억울한 눈으로 입을 열려다 칼릭스의 시선을 받고 다시 닫았다.

칼릭스는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에는 사직서 사본 다섯 장과 후임자 교육 일정표, 비상 운영안, 각 부처별 인수인계 요약본이 순서대로 들어 있었다.

그는 첫 장을 펼쳤다.

"퇴직 희망일. 즉시."

"가능하면 어제였으면 했습니다."

"퇴직 사유. 상사의 지속적 폭언 및 비합리적 업무 지시로 인한 건강 악화."

"객관적 사실입니다."

"희망 퇴직 후 거주지. 동부 벨리아령 외곽 농가."

칼릭스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농가?"

"닭을 키우고 감자를 심을 예정입니다."

"너는 닭에게도 분기별 산란량 보고서를 쓰게 만들 여자다."

"닭은 새벽 세 시에 저를 부르지 않습니다."

칼릭스의 입가가 아주 희미하게 움직였다. 웃음 같기도 했고 이를 드러낸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사직서 사본을 한 장씩 접었다. 이번에는 찢지 않았다. 대신 검은 마력이 종이를 감싸더니 소리 없이 재로 만들었다.

로잘린은 멍하니 그 재를 보았다.

"공문서 훼손입니다."

"접수되지 않은 문서는 공문서가 아니다."

"그럼 지금 접수하십시오."

"거부한다."

너무 당연하다는 말투였다.

로잘린은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 안쪽이 욱신거렸다. 분노인지 부정맥인지 이제는 구분도 가지 않았다.

"폐하. 제국법 제12장 관료 복무 조항에 따르면 관료는 사직 의사를 표명할 권리가 있습니다."

"황제는 제국법을 개정할 권리가 있다."

"퇴사 방지법이라도 만드시게요?"

"필요하다면."

베르딘이 작게 기침했다. 마르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로잘린은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칼릭스가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눌렀다. 힘은 세지 않았다. 그런데도 로잘린은 침대에 다시 눕혀졌다.

"움직이지 마라."

"그럼 퇴사 처리부터 하십시오."

"네가 쉬는 것은 허락한다."

로잘린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정말입니까?"

"오늘 하루."

"……."

"대신 누워서 들으면 된다."

불길함은 언제나 예의를 갖추지 않고 찾아왔다.

칼릭스가 마르셀에게 눈짓했다. 마르셀은 이미 준비해 둔 것처럼 검은 가죽 서류함을 들고 다가왔다. 두께만 봐도 사람 하나를 압사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제국 전역의 행정 감찰을 시행한다."

칼릭스가 말했다.

"각 부처의 보좌 체계와 대리 결재 구조, 비상시 업무 승계 가능 여부를 전부 조사해라. 로잘린이 쓰러져도 제국이 멈추지 않게 만들겠다."

로잘린은 잠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잠시만요."

"네가 원하는 것이 그것 아닌가. 네가 없어도 굴러가는 제국."

"그걸 왜 제가 만듭니까?"

"네가 가장 잘 아니까."

완벽한 논리였다.

그래서 더 미쳤다.

로잘린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퇴사하려고 던진 사표가 제국 조직 진단 프로젝트가 되어 돌아왔다. 전생의 회사에서도 퇴사 면담 뒤에 업무 매뉴얼 만들라는 말은 들었지만 제국 단위는 처음이었다.

"저는 환자입니다."

"그래서 집무실이 아니라 의무실에서 보고받게 해주겠다."

"그걸 배려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이라 부르지?"

"노동 착취요."

의무실 안의 모두가 침묵했다. 침묵의 질감으로 보아 모두 동의하고 있었다.

칼릭스는 듣지 않은 척했다.

"황제 직속 특별 행정 감찰단을 신설한다. 단장은 로잘린 폰 벨리아."

"환자라니까요."

"부단장을 붙인다."

"누구를요?"

"네가 고른다."

로잘린의 말문이 막혔다.

후임자를 고르게 해주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실제 의미는 달랐다. 그녀가 떠날 수 없도록 그녀의 손으로 후임 후보들을 훈련시키라는 뜻이었다.

칼릭스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낮게 말했다.

"네가 내 곁을 비울 길을 찾고 있다면 먼저 네가 없어도 내 명령을 견딜 수 있는 자를 만들어 봐라."

그 순간 로잘린은 그의 얼굴에서 처음 보는 것을 읽었다.

불안.

칼릭스는 사표를 농담으로 치부했지만 사표가 가리키는 가능성은 농담으로 넘기지 못하고 있었다. 로잘린이 죽거나 사라지면 그의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는다. 그가 제 손으로 부순 제국을 수습할 사람도, 그의 폭주를 숫자와 도표로 막아낼 사람도 없다.

그 불안은 사과가 되지 않았다.

업무가 되었다.

로잘린은 웃고 싶어졌다. 너무 어이가 없으면 사람은 웃음도 아깝다.

"좋습니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명령서 문구는 제가 검토하겠습니다."

칼릭스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역시 너라면."

"단, 의관의 소견에 따라 단장은 하루 여섯 시간 이상 수면을 취해야 하며 치료 기간 중 대면 보고는 정오 이후로 제한한다는 조항을 넣겠습니다."

칼릭스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그 조항은 필요 없다."

"필요합니다. 단장이 죽으면 감찰단도 죽습니다."

베르딘이 손을 들었다.

"의학적으로 맞는 말씀입니다."

칼릭스의 시선이 베르딘에게 꽂혔다. 베르딘은 창백해졌지만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았다. 로잘린은 속으로 의관의 명복을 빌었다. 아직 살아 있었지만 미리 빌어두는 편이 효율적이었다.

긴 침묵 끝에 칼릭스가 말했다.

"네 시간."

"여덟 시간."

"다섯."

"일곱."

"여섯."

"식사 시간 별도."

칼릭스가 이를 드러내듯 웃었다.

"너는 쓰러져서도 흥정을 하는군."

"직장인의 마지막 존엄입니다."

결국 명령서에는 하루 여섯 시간 수면 보장, 치료 기간 중 정오 이전 대면 보고 금지, 식사 시간 별도 보장이 들어갔다. 로잘린은 그 세 줄을 확인하고 눈물이 날 뻔했다.

사표는 실패했다.

하지만 야간 호출 금지라니.

문명은 때때로 아주 작은 조항으로 진보했다.

그날 오후 로잘린은 의무실 침대에 기대어 감찰단 구성안을 작성했다. 일부러 대충 쓰기로 했다. 성의 없고 빈틈 많고 누가 봐도 단장으로서 의욕이 없어 보이는 문서.

첫 문장은 그렇게 시작했다.

각 부처는 알아서 잘할 것.

로잘린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삼 초 뒤 깃펜이 저절로 움직였다.

단, 알아서 잘한다는 표현은 평가 기준이 불명확하므로 부처별 결재 지연률, 보고 누락 건수, 예산 오차율을 기준으로 삼는다.

"……."

로잘린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배신자."

손은 멈추지 않았다. 한 장짜리 태업 문서는 어느새 열두 장짜리 실무 지침이 되어 있었다. 부처별 점검표, 부단장 후보 평가표, 감찰 결과 보고 양식까지 붙었다.

문밖에서 마르셀이 감탄했다.

"역시 보좌관님이십니다."

"나가세요."

"예."

마르셀은 즉시 사라졌다.

해가 기울 무렵 칼릭스가 다시 찾아왔다. 그는 완성된 초안을 읽었다. 한 장을 넘길 때마다 그의 표정이 조금씩 평온해졌다.

로잘린은 그 평온이 싫었다.

그는 그녀가 제자리에 묶였다는 사실을 문서의 완성도로 확인하고 있었다.

"훌륭하군."

"폐하. 지금 제게 필요한 말은 훌륭하군이 아니라 수고했으니 쉬어라입니다."

칼릭스가 시선을 들었다.

"수고했다."

로잘린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리고 쉬어라."

뜻밖이었다.

너무 뜻밖이라 로잘린은 잠시 말을 잃었다.

칼릭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마지막 장을 접었다.

"내일 정오에 부단장 후보들을 불러라. 네가 직접 시험한다."

역시나.

로잘린은 베개에 머리를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칼릭스가 정말 죽은 줄 알고 또 의관을 부를 것 같았다.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좋아. 이제부터 태업이다.'

완벽하게 일해서 살아남았으니 이제는 완벽하게 망쳐서 빠져나가야 했다. 문제는 그녀가 무엇을 망치려 할수록 손이 먼저 수습한다는 점이었다.

로잘린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새 종이를 꺼내 맨 위에 또박또박 적었다.

태업 계획 1호. 부단장 후보 시험을 지나치게 쉽게 낸다.

그리고 그 아래에 무심코 평가 항목을 열두 개나 적은 뒤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정말로 이 직업병부터 퇴사시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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