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으로
멸망한 세계의 인공지능 정비사6화

멸망한 세계의 인공지능 정비사

멸망한 세계의 인공지능 정비사

6화: 폭주하는 대지

아르케 화면 위에서 WHITE SWORD / 응답 대기가 희미하게 깜박였다.

지한은 그 글자를 지우지 않았다. 화면을 꺼도 사라지지 않을 호출이라는 걸 알았다. 대신 작업대 위 바이오 셀의 봉인을 풀었다.

“출력 팔십삼 퍼센트. 이걸 넣으면 네가 걸을 시간은 늘어나겠지.”

에바가 셀을 바라봤다.

“감염 차단 프로토콜이 새 전력원을 침입으로 판단할 확률은 37%입니다.”

“성공 확률도 육십삼 퍼센트야.”

“그 계산은 마스터에게 유리하게 해석됐습니다.”

카이론이 천장 스피커를 울렸다.

“이번에는 동의합니다. 사용자 강지한의 낙관은 보통 부품 하나와 비명으로 끝납니다.”

지한이 인두를 집어 들려던 순간 무전기에서 거친 잡음이 터졌다.

“정비사! 강지한, 들려요?”

세온의 목소리였다. 뒤에서는 금속이 땅을 긁는 소리와 누군가의 고함이 섞였다.

“관정이 열렸어요. 그런데 재배지 쪽 농업 로봇들이 움직입니다. 사람을 잡초로 분류했어요.”

지한은 바로 고개를 들었다.

“몇 기야?”

“큰 경작기 둘. 제초 분사기까지 켰어요. 펌프 팀이 관정 안으로 못 들어가고 있어요.”

에바가 무전기를 향해 몸을 돌렸다.

“로봇의 식별 정보와 현재 위치를 전송하십시오.”

“보낼게요. 빨리 와요. 저 팔이 관정 덮개를 뜯으면 물길도 다시 막혀요.”

신호가 끊겼다. 아르케에는 세온이 보낸 조잡한 지도와 붉은 점 두 개가 떴다.

카이론이 말했다.

“농업 로봇은 원래 재배지의 토양과 급수선을 관리하는 장비입니다. 파괴하면 아이언 다이브는 채굴 로봇을 고쳤어도 농사와 물 배분을 동시에 잃습니다.”

“그러니까 고치러 가.”

지한은 바이오 셀을 들어 에바의 흉부 커버 앞에 댔다.

“지금 한다. 밖에서 멈추면 네가 들어 올려.”

“제가 동행한다는 뜻입니까?”

“넌 여기서 꺼져 있으면 더 위험해.”

에바의 렌즈가 한 번 밝아졌다.

“동행을 요청합니다.”

“수락.”

지한은 흉부 커버를 열었다. 안쪽의 낡은 바이오 셀은 붉은 결정이 얼음처럼 붙은 채 미약한 빛을 내고 있었다. 셀을 뽑는 순간 에바의 렌즈가 꺼질 수도 있었다.

그는 정제 촉매 한 관을 접점 위에 흘렸다. 은색 액체가 결정의 가장자리를 감싸자 붉은 빛이 안쪽으로 움츠러들었다.

“카이론. 격리장 최대. 외부 신호 전부 차단.”

“아르케까지 차단하면 수동 동기화가 필요합니다.”

“알아.”

새 셀이 들어가는 소리가 정비소에 작게 울렸다.

에바의 몸이 굳었다. 렌즈가 푸른색과 붉은색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

[비인가 전력원 감지.]
[감염 차단 프로토콜 작동.]
[코어 잠금까지 18초.]

“기존 차단 파형을 읽어.” 지한이 말했다.

“읽는 중입니다. 그러나 파형 일부가 외부 전술망 접속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카이론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일반적인 감염 차단 규칙이 아닙니다.”

에바가 낮게 말했다.

“그 파형을 삭제하지 마십시오.”

“이유 알아?”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삭제하면 안 된다는 판단이 있습니다.”

자동 동기화를 돌리면 파형 전체를 지우고 새 셀을 맞출 수 있었다. 대신 에바가 기억하지 못하는 선택까지 같이 지워질지 몰랐다.

지한은 이를 악물었다.

“그럼 남겨.”

그는 아르케 케이블을 새 셀의 보조 접점에 꽂았다. 손목을 타고 날카로운 저림이 번졌다. 화면이 흔들리자 에바가 왼손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마스터. 접속을 중단하십시오. 손상 수치가 상승합니다.”

“네가 상태 감시해. 내가 줄만 바꿀게.”

“그것은 위험합니다.”

“그래서 둘이 하는 거야.”

에바의 손이 느슨해졌다. 그녀는 렌즈 안의 숫자를 느리게 정리했다.

“차단 파형의 세 번째 구간을 우회하십시오. 새 셀의 전류를 적대 신호가 아닌 내부 순환으로 분류하겠습니다.”

지한은 지시한 선을 끊지 않고 옆으로 돌렸다. 붉은 결정이 한 번 들썩였지만 정제 촉매가 빛을 눌렀다.

[바이오 셀 동기화 완료.]
[안정 출력 41%.]

에바가 천천히 일어섰다. 임시 의족의 관절음은 여전했지만 흉부의 청색등은 더는 꺼질 듯 흔들리지 않았다.

“고속 기동은?” 지한이 물었다.

“금지됩니다. 단거리 방어와 전술 분석은 수행 가능합니다.”

“그 정도면 됐어.”

“마스터.”

“왜.”

“저는 이제 이동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보고였지만 이전보다 오래 남았다.

아이언 다이브의 관정은 낮은 언덕 아래에 파인 검은 구멍이었다. 그 주변에 설치된 얕은 재배지에는 말라붙은 줄기와 녹슨 급수관만 남아 있었다.

세온은 무너진 콘크리트 벽 뒤에서 손을 흔들었다.

“저기예요!”

경작기 한 대가 관정 덮개를 향해 넓은 굴삭 팔을 내리쳤다. 흙을 뒤집는 갈퀴 끝이 철제 덮개를 긁으며 불꽃을 튀겼다.

다른 한 대는 펌프 팀을 향해 제초 분사기를 돌리고 있었다. 흰 안개가 바닥을 훑자 작업자들이 호스를 버리고 뒤로 물러났다.

“분사액은?” 지한이 물었다.

“토양 세척용이었어요. 사람 피부에 닿으면 화상 입습니다.” 세온이 말했다. “부숴도 되죠?”

지한은 아르케로 경작기의 하부를 훑었다. 코어 출력은 불안정했지만 완전히 감염된 것은 아니었다. 붉은 흔적은 센서 모듈에만 붙어 있었다.

“안 돼. 저걸 부수면 물 줄 장비가 없어져.”

“지금은 사람부터 살려야 해요.”

“그래서 멈출 거야.”

에바가 앞으로 나섰다.

“경작 팔의 회전 주기 분석 완료. 제가 첫 번째 기체를 유도하겠습니다. 마스터는 분사기 제어선에 접근하십시오.”

“무리하지 마.”

“현재 출력에서 가능한 범위입니다.”

에바가 모래 위를 달렸다. 빠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관절 잠금이 맞아떨어지는 짧은 순간마다 몸이 앞으로 미끄러지듯 나갔다.

경작기의 센서가 그녀를 포착했다.

[침입 식생 감지. 제거 작업 시작.]

굴삭 팔이 에바를 향해 떨어졌다. 에바는 몸을 옆으로 틀고 갈퀴 사이에 왼손을 끼워 넣었다. 금속 이빨이 팔꿈치 위 장갑을 긁었다.

그녀는 팔을 부수지 않았다. 돌아가는 축을 밀어 관정 반대쪽으로 궤적만 틀었다.

“지금!”

지한은 수리한 채굴 로봇 뒤로 달렸다. 로봇의 굴삭 팔은 부러져 있었지만 급수 호스 연결구는 살아 있었다. 그는 호스를 제초 분사기 쪽으로 던져 연결했다.

“세온. 펌프 압력 올려!”

“그럼 관정 안에 있는 사람들은?”

“내 신호 전까지 반만!”

호스가 떨며 맑은 물을 뿜었다. 지한은 분사 노즐 안으로 물을 밀어 넣었다. 독한 세척액이 희석돼 모래 위로 쏟아졌다.

농업 로봇이 몸을 흔들었다. 지한은 그 틈에 옆구리 정비 단자를 열었다.

아르케 화면에 식생 분류표가 펼쳐졌다. 잡초, 균류, 해충, 병든 줄기. 그 아래에 새 항목 하나가 붙어 있었다.

[침입 식생: 체온 30~42도 / 불규칙 이동 / 금속 부착.]
[집결 보조 태그 활성.]

“사람을 잡초로 만든 게 아니라 이 기준을 덧씌웠어.”

카이론이 통신으로 대답했다.

“태그의 반복 주기는 세 번의 맥박입니다. 차량 발신기와 일치합니다.”

세온의 얼굴이 굳었다.

“야적장 신호가 여기까지 들어온다고요?”

“신호가 직접 조종하는 게 아니야. 기계가 원래 하던 분류를 비틀고 있어.”

경작기 반대편에서 에바의 경고가 날아왔다.

“두 번째 기체가 관정 덮개에 과출력 명령을 수신했습니다.”

갈퀴가 붉게 달아올랐다. 관정 덮개를 부수고 지하로 떨어지려는 힘이었다.

지한은 첫 번째 로봇의 펌웨어 창을 닫지 않았다. 오래된 안전 버전이 보였다. 사람을 식생으로 분류하지 않던 시절의 코드였다.

“세온. 로봇 전원 끄지 마.”

“저게 덮개를 날리게 생겼는데?”

“꺼지면 코어가 태워져. 물길이 또 죽어.”

지한은 다운그레이드 버튼 대신 수동 전송을 눌렀다.

[농업 관리 펌웨어 2.1 복원 중.]
[외부 태그가 구동 제한을 해제했습니다.]

첫 번째 경작기의 바퀴가 갑자기 최대 속도로 돌기 시작했다. 지한 쪽으로 갈퀴가 회전했다.

에바가 관정 덮개 위에서 뛰어내렸다. 임시 의족이 모래에 깊게 박혔지만 그녀는 균형을 버리지 않았다. 왼손을 로봇의 차체에 대고 접지판 케이블을 바닥의 급수관에 감았다.

“마스터, 작업을 계속하십시오.”

“그 전류는 네 셀도 먹어.”

“알고 있습니다.”

에바의 렌즈가 갈퀴와 지한을 차례로 향했다.

“보호 명령 때문이 아닙니다. 이 방법이 제가 선택한 최선입니다.”

에바가 전류를 땅으로 흘렸다. 로봇의 과출력음이 낮아졌고 갈퀴가 지한의 어깨 앞에서 멈췄다.

지한은 손목의 통증을 무시한 채 마지막 분류표를 고쳤다. 사람, 관정, 채굴 로봇, 급수 호스. 네 항목을 보호 대상으로 옮겼다.

[보호 목록 갱신.]
[침입 식생 항목 삭제.]
[외부 태그 격리.]

경작기의 붉은 센서등이 노란빛으로 바뀌었다. 갈퀴가 천천히 접혔다.

다른 한 대도 에바가 흘려 보낸 접지 전류에 멈칫했다. 지한은 케이블을 옮겨 두 번째 단자에 꽂고 같은 펌웨어를 밀어 넣었다.

이번에는 세온이 그의 옆을 지켰다. 권총을 들었지만 로봇이 아니라 주변의 날아다니는 금속 파편을 겨눴다.

“당신 방식은 늘 이렇게 아슬아슬해요?”

“고장 난 건 대개 아슬아슬할 때 가져오잖아.”

두 번째 로봇의 분사기가 고개를 숙였다. 흰 안개는 더 나오지 않았다.

관정 쪽에서 펌프 팀의 환호가 들렸다. 물이 다시 급수관을 타고 재배지 아래로 흘렀다.

에바는 한쪽 무릎을 모래에 댄 채 흉부를 눌렀다. 청색등이 빠르게 깜박였다.

“출력은?” 지한이 다가가 물었다.

“31%. 셀은 안정 상태입니다.”

“그걸로 괜찮다는 표정 하지 마.”

“표정 기능은 우선 사용하지 않습니다.”

세온이 짧게 웃다가 복구된 경작기들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저걸 다시 믿어도 되나요?”

지한은 로봇의 센서등을 가리켰다. 노란 불빛 아래 새로 쓴 보호 목록이 떠 있었다.

“아무것도 그냥 믿지 마. 매일 확인해. 그래도 고장 났다고 바로 버리진 말고.”

아르케가 짧은 경고음을 냈다. 지한이 화면을 보자 격리한 외부 태그의 마지막 로그가 떠올랐다.

[수집 완료.]
[집결 보조: 북서 41도.]

재배지의 오래된 지도 위에서 희미한 장비 표식들이 하나씩 켜졌다. 폐기 장갑차, 정찰 드론, 경작기. 서로 다른 곳에서 멈춰 있던 물건들이 같은 방향으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표식은 하나가 아니었다. 북서쪽 고철 야적장을 향해 가는 선이 지도 위에 여러 갈래로 늘어났다.

에바가 화면을 보았다.

“야적장입니다.”

지한은 손목 보호대를 더 조였다. 관정의 물길은 살렸지만 신호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멈춰 있던 기계들을 한곳으로 모으고 있었다.

“돌아가서 준비한다.”

에바가 일어섰다. 새 바이오 셀의 청색등이 모래바람 속에서 또렷하게 빛났다.

“동행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지한도 말리지 않았다.

YOU MAY ALSO LIKE

이런 작품은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