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한 세계의 인공지능 정비사

5화: 폐기지의 메신저
수송 트럭은 해치에서 스무 걸음쯤 떨어진 곳에 멈췄다.
엔진은 죽어 있었다. 대신 적재함 옆에 볼트로 덧댄 견인 모터가 낮은 소리를 냈다. 바퀴 하나가 옆으로 틀어진 트럭을 억지로 끌고 온 흔적이었다.
지한은 해치 틈으로 전자기 해머를 내밀었다. 뒤쪽에서 에바가 한 걸음 옮겼다. 임시 의족의 관절이 짧게 울렸다.
“거기서 멈춰.”
“마스터의 사각을 줄이려면 좌측에 서야 합니다.”
“다리 무리하지 말라는 뜻이야.”
“현재 이동은 가능합니다.”
“가능한 거랑 해야 하는 건 다르지.”
카이론이 천장 스피커로 끼어들었다.
“해치를 열지 않는 쪽에 한 표입니다. 밖의 열 신호는 하나지만 군용 수송 트럭은 대화 상대가 타고 오기에는 지나치게 튼튼합니다.”
“표는 받았어.”
지한은 해치 옆 감시창만 손바닥만큼 열었다.
운전석 문이 삐걱이며 벌어졌다. 방진 고글을 쓴 여자가 천천히 내렸다. 낡은 방한포 아래에 모래가 묻은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허리의 권총은 손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여자가 양손을 들었다.
“쏘지 마요. 아이언 다이브에서 왔어요.”
“왜 여기까지 왔지?”
“북서쪽 야적장 근처에서 정비사 소문을 들었어요. 고장 난 군용 기체도 살린다는 사람 말이에요.”
그녀는 트럭 적재함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우린 채굴 로봇 하나를 살려야 합니다. 이틀째 식수 펌프까지 못 돌리고 있어요. 물통을 직접 들고 올라오는 건 오늘까지만 버틸 수 있고요.”
“이름.”
“세온. 아이언 다이브 정찰대예요.”
에바의 청색 렌즈가 세온의 손목과 허리 그리고 트럭의 적재함 순서로 움직였다.
“비무장 상태가 아닙니다.”
세온이 권총 쪽을 보더니 짧게 웃었다.
“그쪽도 해머를 들었잖아요.”
그 웃음은 에바의 프레임을 알아본 순간 사라졌다. 세온은 말없이 오른팔이 비어 있는 자리와 낯선 의족을 훑었다.
“연방 전술 안드로이드.”
지한의 손가락이 해머 손잡이를 조였다.
“고장 난 기체야.”
“그래서 더 위험할 수 있죠. 우리 쪽은 감염된 작업 로봇이 정수장 벽을 뚫은 적이 있어요. 사람 둘이 다쳤고요.”
“격리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있어.”
지한이 말했다.
“그런데 네가 데려갈 물건은 아니야.”
에바가 지한 옆으로 한 걸음 나왔다. 관절 잠금이 늦어지는 짧은 순간 몸이 흔들렸지만 발끝을 고정해 균형을 되찾았다.
“저는 이동 물품이 아닙니다.”
세온의 눈썹이 올라갔다.
“판단 권한이 있군요.”
“제한적입니다.”
“그래도 자기 소개는 하네.” 지한이 말했다. “그래서 거래할 거면 기체가 아니라 고장 난 로봇 얘기만 해.”
세온은 잠시 그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제 촉매 두 관과 군용 호환 바이오 셀 하나가 있어요. 로봇을 살려 주면 전부 드리죠.”
바이오 셀이라는 말에 지한의 시선이 에바의 흉부 커버로 향했다. 청색 경고등은 작게 깜박이고 있었다. 겨우 버티는 빛이었다.
카이론이 낮게 말했다.
“제안 물품의 규격을 확인하기 전까지 흥분하지 마십시오. 황야 상인들은 빈 셀에 반짝이는 라벨을 붙이기도 합니다.”
“너 지금 협상 망치고 있어.”
“사기 방지 서비스를 제공 중입니다.”
지한은 세온에게 손을 내보였다.
“물건부터 확인한다. 그리고 트럭 검사도.”
“트럭까지요?”
“군용 차체가 우리 해치 앞에 멈췄는데 그냥 믿으라고?”
세온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견인 모터의 전원을 끄고 두 걸음 물러났다.
“좋아요. 다만 로봇은 적재함에서 내리지 않겠습니다. 감염이 남아 있을 수 있으니까.”
지한은 해치를 반쯤 열었다. 새벽 공기가 정비소 안으로 흘러들었다. 에바는 그보다 먼저 바깥으로 나가 트럭의 그림자 쪽을 살폈다.
“에바.”
“외곽 확인입니다. 보폭을 제한합니다.”
이번에는 지한이 말리지 않았다. 그녀는 의족을 끌지 않았다. 느린 속도로 바퀴 사이를 지나며 모래에 남은 흔적과 트럭 하부의 열을 읽었다.
“비정상 열원 감지.”
에바가 왼손을 들었다.
“차량 하부 중앙. 견인 모터와 독립된 전력원입니다.”
지한은 트럭 아래로 몸을 낮췄다. 차축 뒤편에 손바닥만 한 검은 상자가 자석 고리로 붙어 있었다. 표면에는 새 긁힌 자국이 있었고 먼지가 덜 쌓여 있었다.
세온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저건 우리 물건이 아니에요.”
“언제부터 붙어 있었지?”
“야적장에서 빠져나온 뒤에는 못 봤어요. 거기서 폐기 버스 한 대를 지나쳤는데….”
그녀가 말을 멈췄다.
“버스 지붕 위에 뭔가 붙어 있었어요. 금속 덩어리인 줄 알았죠.”
지한은 아르케를 꺼내 검은 상자에 케이블을 물렸다. 화면이 잠시 흔들린 뒤 붉은 파형을 토해 냈다.
[탐색 보조 신호.]
[대상 응답 수집 중.]
[연방 전술 자산 / 식별 불완전.]
작업대 위 송신 칩에서 봤던 파형이었다. 세 번 튀고 잠잠해지는 맥박도 같았다.
카이론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발신기가 아닙니다. 지나가는 차량에 붙어 주변의 군용 규격 응답을 모으는 수집기입니다.”
“우리한테 붙은 거야?” 세온이 물었다.
“트럭이 미끼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지한은 화면의 숫자를 확대했다. 검은 상자는 에바의 프레임을 감지한 뒤 작은 응답값을 북서쪽으로 쏘고 있었다. 정비소 좌표를 직접 보내지는 않았지만 대상이 반응할 만한 방향을 계속 찍었다.
“이건 찾는 게 아니라 끌고 가는 거야.”
세온이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뭘요?”
“에바 같은 걸.”
에바가 발신기를 내려다봤다.
“제 전술 식별자는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이 장치는 제 프레임을 대상 후보로 분류했습니다.”
“그래서 네가 찾아낸 거야.”
지한이 말했다.
에바의 렌즈가 그에게 향했다.
“분석 결과를 보고했을 뿐입니다.”
“그런 판단을 하는 게 중요하지.”
짧은 말이었지만 에바는 바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세온도 그 모습을 보고는 권총 벨트를 풀어 트럭 발판 위에 올려 두었다.
“격리 요구는 취소할게요.”
그녀가 말했다.
“우리도 뒤를 밟힌 채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그 발신기부터 떼어 내고 로봇을 봐줘요.”
“발신기는 격리한다.”
“그 다음은?”
지한은 적재함을 가리켰다.
“그 다음에 거래지.”
적재함 안에는 채굴 로봇 한 대가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둥근 몸체 아래의 바퀴 둘은 붉은 먼지로 뒤덮여 있었고 굴삭 팔 하나는 어깨 관절에서 꺾여 있었다. 로봇의 배면에는 식수 펌프용 급수 호스 연결구가 붙어 있었다.
“이게 물을 길어 올린다고?” 지한이 물었다.
“깊은 관정의 막힌 흙을 파내요. 움직이기만 하면 펌프 팀이 다시 연결할 수 있어요.”
카이론이 로봇을 스캔했다.
“감염 잔재가 구동선에 분포합니다. 정비소 반입 금지. 적재함에서 원격 격리 수리를 권장합니다.”
“동의.”
지한은 적재함 턱에 올라앉았다. 아르케의 분리 케이블을 로봇 옆구리 단자에 연결하자 화면에 엉킨 제어선이 떠올랐다. 스크랩 견의 관절 칩에서 봤던 것과 같은 붉은 루프가 바퀴 구동 명령 사이에 박혀 있었다.
다만 이번 것은 더 깊었다. 흙을 파는 힘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할 로봇에게 계속 과출력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대로 돌리면 펌프 말고 관정 벽을 먼저 부수겠네.”
세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고칠 수 있습니까?”
“감염을 죽이는 건 못 해. 원래 회로에서 떼어 낼 수는 있어.”
“그게 다릅니까?”
지한은 납땜 인두의 전원을 올렸다.
“살아 있는 건 함부로 꺼 버리면 안 된다는 뜻이지.”
에바가 적재함 아래에서 말했다.
“마스터의 손목 떨림이 증가했습니다. 작업 가능 시간은 십이 분입니다.”
“시간 세.”
“수락.”
지한은 자동 정화 프로그램을 열지 않았다. 그것을 돌리면 로봇의 코어도 같이 태울 수 있었다. 대신 루프가 갈라지는 지점을 하나씩 짚어 절연 핀셋과 인두 끝으로 끊었다.
에바는 지한이 집중을 잃지 않게 남은 시간만 짧게 알렸다.
“칠 분.”
지한의 손목이 저렸다. 마지막 루프는 굴삭 팔이 아니라 바퀴의 감속 제어선에 숨어 있었다. 그가 선을 끊자 로봇이 갑자기 떨었다.
세온이 앞으로 나섰다.
“멈춘 건가요?”
“뒤로.”
지한은 아르케 출력을 낮추고 새 배선을 물렸다. 로봇의 붉은 표시등이 한 번 꺼졌다가 노란 점으로 바뀌었다.
남은 바퀴가 적재함 바닥을 천천히 밀었다.
굴삭 팔은 부러진 채였지만 로봇은 스스로 몸을 세웠다.
카이론이 말했다.
“기본 굴진 및 견인 기능 복구. 파괴적 과출력 명령은 분리됐습니다.”
세온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로봇의 몸체를 쓰다듬으려다 손을 멈췄다. 감염 잔재가 남았다는 경고를 기억한 모양이었다.
“이걸로 관정은 다시 열 수 있어요.”
“무리한 광맥 작업은 시키지 마. 물길만 내.”
“알겠어요.”
세온은 적재함 깊숙한 곳에서 회색 상자를 꺼냈다. 봉인을 풀자 정제 촉매가 든 투명관 두 개와 밀봉된 바이오 셀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한은 아르케로 셀의 잔량과 회로를 확인했다.
[군용 호환 바이오 셀.]
[잔존 출력 83%.]
[나노 오염 반응 없음.]
카이론이 못마땅한 듯 말했다.
“놀랍게도 사기는 아닙니다.”
“그 말은 꼭 해야 해?”
“정확한 평가는 제 의무입니다.”
세온은 새 상자를 건네며 북서쪽을 바라봤다.
“야적장에는 가지 마요. 우린 거기서 폐기 군용 장비를 봤어요. 처음에는 쓰러진 장갑차와 버려진 정찰 드론뿐이었죠.”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런데 바람이 멎고 신호가 울리자 포탑 하나가 방향을 돌렸어요. 우리를 겨눈 건 아니었어요. 북서쪽만 보고 있었죠.”
카이론이 즉시 기록을 대조했다.
“발신기 응답 방향과 일치합니다. 수집기는 전술 자산의 응답을 북서쪽으로 유도하고 있습니다.”
지한은 손안의 바이오 셀을 내려다봤다. 에바의 낡은 셀을 바꾸면 출력은 올라갈 것이다. 그러나 감염 차단 프로토콜이 새 셀의 전력 흐름을 침입으로 오인할 수도 있었다.
세온은 견인 모터를 다시 켰다.
“우린 돌아가서 펌프를 살릴게요. 발신기는 완전히 격리하세요. 저런 게 또 붙어 있으면 공동체에도 알려야 하니까.”
“알았어.”
트럭은 남쪽으로 움직였다.
정비소 안으로 돌아오자 에바가 작업대 곁에 섰다. 새 의족의 관절은 여전히 낮게 떨렸다. 그래도 그녀는 지금까지 가장 오래 서 있었다.
“바이오 셀 교체는 감염 차단 프로토콜에 위험을 줍니다.”
“알아.”
“정제 촉매를 사용해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것도 알아.”
에바는 잠시 침묵했다.
“그럼에도 진행하겠습니까?”
지한은 셀을 작업대 위에 올려놓았다.
“네가 다음 길을 고를 수 있게 해야 하니까.”
“현재도 판단은 가능합니다.”
“선택지가 적잖아.”
에바의 렌즈가 희미하게 밝아졌다. 그녀는 북서쪽이 표시된 아르케 화면을 바라봤다.
“그렇다면 야적장 동행을 요청합니다. 발신기의 대상이 저라면 제 분석이 필요합니다.”
카이론이 대답하기 전에 정비소 안쪽에서 낡은 호출음이 울렸다.
짧고 단정한 군용 음이었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아르케 화면에 깨진 글자가 떠올랐다.
[WHITE SWORD / 응답 대기.]
에바의 몸이 멈췄다. 청색 렌즈 안쪽에서 알 수 없는 숫자가 빠르게 흘렀다.
“에바?”
그녀는 한참 뒤에야 고개를 들었다.
“기록 없음. 그러나 호출음을… 알고 있습니다.”
지한은 새 바이오 셀을 꽉 쥐었다. 고철 야적장은 단순한 발신지가 아니었다. 에바의 부서진 기억을 기다리고 있는 장소일지도 몰랐다.
“먼저 네 심장부터 고친다.”
아르케의 화면에서 북서쪽 방향선이 한 번 더 깜박였다.
“그 다음에 저게 뭔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