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한 세계의 인공지능 정비사

4화: 프레임 커스터마이징
새벽이 오기 전의 정비소는 유난히 좁았다.
환기구 차단문에 끼인 스크랩 견은 아직도 가끔씩 다리를 떨었다. 완전히 꺼진 코어에서 나온 잔류 전류가 금속 바닥을 얇게 긁을 때마다 에바의 렌즈가 그쪽으로 향했다.
지한은 작업대 위에 올려 둔 송신 칩을 노려봤다. 작은 칩 하나가 네 시간 뒤 다시 울릴 수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카이론이 말했다.
“유도 파형의 다음 반복까지 네 시간 십칠 분입니다. 그 전에 지상 해치 수리를 우선하는 편이 생존 확률에 유리합니다.”
“해치는 철판으로 막으면 돼.”
지한은 바닥에 널브러진 스크랩 견의 뒷다리를 발끝으로 건드렸다. 두꺼운 관절축과 충격 완화 실린더가 달린 부품이었다. 황야를 헤집고 벽을 타게 만든 다리였다.
“이건 지금 아니면 못 구해.”
정비대에 기대어 있던 에바가 고개를 들었다. 왼쪽 다리 절단면은 붕대로 감은 것처럼 안정화 폼이 둘러져 있었다. 오른팔이 없어진 자리에는 검게 탄 케이블이 매달려 있었다.
“제 기동 복구는 보안 수리보다 우선도가 낮습니다.”
“누가 우선도 정했어?”
“현재 위협 분석이 정했습니다. 저는 전투 지속 불가입니다. 바이오 셀 출력은 7%. 이동에 전력을 사용하면 보호 작전 수행 가능성은 더 떨어집니다.”
지한은 대답하지 않고 전자기 해머로 견의 무릎 관절을 쳤다. 볼트가 튀고 외피가 벌어지며 안쪽의 구동 섬유가 드러났다.
에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마스터는 저를 정지시키는 편이 합리적입니다. 신호가 저를 탐색하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해머를 든 지한의 손이 멈췄다.
“네가 멈추면 해결돼?”
“위험 자산의 노출을 줄일 수 있습니다.”
“그 말은 폐기랑 다를 게 없잖아.”
“폐기와 정지는 다릅니다.”
“작동 안 하는 기계를 구석에 세워 두는 건 나한텐 똑같아.”
지한은 견의 다리를 작업대 위로 끌어 올렸다. 손목을 타고 저림이 올라왔지만 손을 바꾸지 않았다. 아르케의 피드백이 남긴 통증은 지한에게 쉬라는 신호였지만 지금은 듣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넌 위험 자산이 아니라 에바야.”
에바의 청색 렌즈가 아주 작게 흔들렸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카이론이 한 박자 늦게 끼어들었다.
“감정적 선언은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철 다리에는 감염 회로가 남아 있습니다. 전술 안드로이드의 신경 접속에 그대로 연결하면 에바의 코어가 개처럼 짖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안 붙여.”
지한은 아르케를 켜고 견의 관절 제어칩을 스캔했다. 화면 위로 붉은 실핏줄 같은 회로가 번졌다. 감염은 관절을 움직이는 단순 명령 사이사이에 들어가 있었다.
[명령 구조: 지형 돌파 / 열원 추적 / 장애물 파쇄.]
[비인가 반복 루프 감지.]
“봐. 관절 자체는 멀쩡해. 감염이 움직이는 방법만 망쳐 놨어.”
“그 차이가 중요합니까?” 에바가 물었다.
“중요하지. 고칠 수 있다는 뜻이니까.”
지한은 절연 핀셋으로 칩을 집어 들었다. 붉은 결정이 핀셋 끝으로 기어오르려 하자 그는 즉시 냉각수 통에 담갔다.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카이론. 격리장 최저 출력.”
“최저 출력으로는 감염 잔재가 완전히 죽지 않습니다.”
“죽일 거 아니야. 분리할 거야.”
정비대 옆의 얇은 투명 상자가 푸른 빛을 냈다. 지한은 칩을 그 안에 넣고 아르케의 수동 배선을 연결했다. 자동 정화 프로그램은 전력을 너무 많이 먹었다. 그는 오래된 납땜 인두를 꺼내 회로 한 줄씩을 끊었다.
회로를 끊을 때마다 칩 안에서 낮은 비명이 났다. 금속이 열을 받으며 내는 소리일 뿐이었다. 그런데 에바는 그 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듯 시선을 내렸다.
“불편해?” 지한이 물었다.
“아닙니다. 다만 저 부품의 구동 기록이 제 프레임에 연결되면 제 판단에 영향을 줄 가능성을 계산했습니다.”
“그래서 네 판단은 안 건드려.”
지한은 마지막 감염 루프를 잘라 냈다. 붉은 빛이 꺼진 뒤에야 관절의 원래 제어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리는 걷게만 만들 거야. 네 머리까지 대신 걷게 만들 생각 없어.”
카이론이 말했다.
“의외로 건전한 설계 철학이군요.”
“의외라는 말은 빼.”
지한은 견의 관절축을 분해해 길이를 줄였다. 이어서 전투기 잔해에서 떼어 낸 폐장갑판을 절단했다. 불꽃이 튀어 에바의 인공 피부에 주황빛을 뿌렸다.
만든 프레임은 원래 에바의 다리처럼 매끄럽지 않았다. 검은 합금 관절 사이로 보조 케이블이 드러났고 발목에는 스크랩 견의 발톱을 갈아 만든 접지판이 붙었다. 다만 모래와 콘크리트 위에서 버틸 만큼 넓고 단단했다.
“미관 점수는 포기해.”
“저는 미관 평가 기능을 우선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표정이 그래?”
에바는 잠시 침묵했다.
“군용 프레임은 규격을 벗어나면 전술 효율이 떨어집니다. 저는 이미 표준 기체가 아닙니다.”
지한은 절단기를 내려놓았다.
“표준 기체가 다 살아남았으면 네가 여기 누워 있겠냐.”
에바의 렌즈가 그를 향했다.
“표준이 아니어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까?”
지한은 잠깐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무엇을 실패했다고 생각하는지 지한은 몰랐다. 기억은 부서져 있고 이름 하나만 남은 작전 파일은 열 수도 없었다.
그는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네가 기억나면 듣지. 지금은 여기서 할 수 있는 걸 하면 돼.”
“할 수 있는 것.”
“걷는 것부터.”
지한은 에바의 좌측 다리 소켓 커버를 열었다. 안쪽에는 가느다란 은색 접점들이 원형으로 박혀 있었다. 그중 세 개는 검게 타 있었고 하나는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아르케가 경고를 띄웠다.
[잔존 운동 기록 감지.]
[접속부 강제 초기화 시 메모리 손상 가능성 19%.]
에바가 말했다.
“초기화를 권고합니다. 보행 기능이 우선입니다.”
“19%면 못 눌러.”
“그 기록은 임무에 쓸 수 없는 파편일 가능성이 큽니다.”
“파편이면 더 남겨 둬야지.”
지한은 손상된 접점 세 개만 새 배선으로 우회했다. 마지막 떨림이 남은 접점에는 얇은 보호선을 덧댔다. 전력이 흐르자 소켓 안쪽에서 아주 약한 진동이 퍼졌다.
에바의 손가락이 정비대 가장자리를 움켜쥐었다.
“통증 신호?” 지한이 물었다.
“통증은 아닙니다. 낯선 감각입니다.”
“다리 붙으면 원래 좀 그래.”
“마스터도 그 경험이 있습니까?”
“없어. 그래도 고장 난 관절은 많이 봤어.”
카이론이 끼어들었다.
“두 분의 의학적 대화가 끝났다면 한 번만 시험하십시오. 바이오 셀의 안정 여유가 4%뿐입니다.”
지한은 완성된 의족을 들어 올렸다.
“한 번이면 충분해.”
결합 고리가 소켓에 들어갔다. 딱, 하고 작은 소리가 났다.
에바의 몸이 굳었다. 청색 렌즈 안쪽에서 수치가 빠르게 흘렀다. 새 관절은 처음에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지한은 바닥에 수동 보조 케이블을 고정하고 끝을 에바의 허리 프레임에 걸었다.
“내가 잡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내려와.”
“보조는 필요 없습니다.”
“그건 기동 성공하면 말해.”
에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왼손으로 정비대 난간을 잡고 오른발을 바닥에 내렸다. 새 의족의 접지판이 콘크리트에 닿자 관절이 낮게 울었다.
그녀가 체중을 옮겼다.
쿵.
무릎 관절이 반쯤 접혔다. 에바의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지한은 케이블을 당겨 그녀가 바닥에 부딪히는 것을 막았다.
“정지. 관절 잠금 오차 0.3초.”
“그래도 버텼어.”
“보조 케이블이 버틴 것입니다.”
“그것도 내가 만든 거야.”
에바는 다시 균형을 잡았다. 오른발이 한 번 밀리고 왼쪽 발목이 모래를 긁었다. 그녀는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두 번째 하중을 실었다.
이번에는 관절이 잠기기 직전 에바가 허리를 틀었다. 전술 기체 특유의 빠른 보정이었다. 손상된 몸에 남아 있는 감각과 새 부품의 지연을 억지로 맞춰 낸 움직임.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에바는 정비소 중앙까지 걸어갔다. 세 번째 걸음에서 멈춘 뒤 왼발을 축으로 짧게 회전했다. 어깨 장갑이 흔들렸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카이론의 스피커에서 짧은 잡음이 흘렀다.
“기동 성공으로 분류하겠습니다. 감탄은 아닙니다.”
지한은 웃음을 삼켰다.
“잘했어.”
에바는 고개를 들었다.
“전투 효율은 원래 수치의 12%입니다. 임시 의족은 고속 기동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럼 열두 퍼센트로 움직이면 돼.”
“그것으로 마스터를 지키기에는 부족할 수 있습니다.”
“나도 너 지키는 데 백 퍼센트 아니야.”
지한은 보조 케이블을 풀며 말했다.
“부족하면 같이 채우면 되지. 완벽해질 때까지 누워 있으라는 명령은 안 했어.”
에바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렌즈를 송신 칩 쪽으로 돌렸다.
“그렇다면 제 판단을 보고하겠습니다. 그 칩은 격리함으로 옮겨야 합니다. 다음 신호가 오면 제가 운반하겠습니다.”
사과가 아니었다. 명령 요청도 아니었다.
자신이 할 일을 정한 보고였다.
지한이 대답하려던 순간 작업대 위 송신 칩이 붉게 번쩍였다.
카이론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예정 시각보다 이릅니다. 재접속 신호 감지.”
바닥에 놓인 견의 잔해들이 동시에 떨렸다. 환기구에 끼인 세 번째 견의 머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에바가 먼저 몸을 돌렸다. 새 의족의 관절이 짧게 울었다. 첫 하중 때 남은 지연이 발목을 잡아당겼지만 그녀는 손상 경고를 무시하지 않고 보폭을 줄였다. 왼손으로 송신 칩을 집어 들고 정비대 옆 차폐함으로 향했다.
지한은 아르케를 칩에 연결했다.
[외부 탐색 명령 수신.]
[대상 규격: 연방 전술 자산 / 식별 불완전.]
“정비소 좌표가 아니라 에바를 찾는 거였어.”
“정확히는 군용 규격의 살아 있는 장비를 찾는 명령입니다.” 카이론이 말했다. “에바가 아니었다면 송신 칩이 반응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지한은 이를 악물었다. 신호가 에바를 따라온다면 그녀를 다시 꺼뜨리는 게 가장 안전할지 모른다. 하지만 방금 두 발로 선 기체를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응답값을 흉내 낸다. 놈이 어디서 찾는지 보자.”
“상당히 위험한 선택입니다.”
“그러니까 격리함 안에서 해.”
아르케의 화면에 방향선이 하나 떠올랐다. 거칠고 짧은 삼각 측량이었다. 신호는 북서쪽 고철 야적장 부근에서 튀어 왔다.
그때 지상 카메라가 자동으로 켜졌다.
먼지 낀 화면 속에서 폐기된 군용 수송 트럭 한 대가 움직이고 있었다. 바퀴는 반쯤 빠져 있었고 앞 유리는 깨져 있었다. 엔진이 살아 있을 리 없는 물건인데도 트럭은 통신 중계소 쪽을 향해 천천히 방향을 틀었다.
카이론이 말했다.
“외부 금속 열원 하나. 접근 속도 시속 9킬로미터. 신호 발신 방향과는 다릅니다. 저 트럭을 움직이는 주체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에바가 차폐함의 뚜껑을 닫았다. 그녀는 새 의족을 내려다봤다가 지한을 봤다.
“기동 준비 완료. 마스터, 외곽 확인을 요청합니다.”
지한은 해머를 집어 들었다. 트럭이 해치까지 닿으면 손상된 입구는 버티지 못한다. 그렇다고 정비소 안에서 기다리면 상대가 무엇인지조차 고를 수 없었다.
이제 막 붙인 다리였다. 믿을 만한 건 손으로 고정한 볼트와 몇 번의 걸음뿐이었다.
그래도 에바는 서 있었다.
“좋아. 이번에는 같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