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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인공지능 정비사7화

멸망한 세계의 인공지능 정비사

멸망한 세계의 인공지능 정비사

7화: 나노 감염체의 경고

야적장으로 가져갈 장비는 많지 않았다.

전자기 해머와 아르케, 물 두 통, 절연 케이블 묶음. 지한은 남은 정제 촉매 한 관까지 가방에 넣었다가 다시 작업대 위에 내려놓았다.

에바의 흉부 청색등은 규칙적으로 빛났다. 그러나 그 아래 수치는 삼십일 퍼센트에서 오르지 않았다.

“고속 기동 금지. 단독 돌입도 금지.”

에바가 고개를 들었다.

“명령으로 기록하겠습니다.”

“그리고 네가 멈추라고 하면 나도 멈춘다.”

에바의 렌즈 안에 숫자가 짧게 흘렀다.

“상호 제한 명령으로 분류합니까?”

“그래.”

카이론이 천장 스피커를 울렸다.

“사용자 강지한의 제한 준수 이력은 신뢰 구간 밖입니다. 그래도 기록은 해 두겠습니다.”

지한이 가방 지퍼를 잡은 순간 무전기가 날카롭게 울렸다.

“정비사! 강지한, 들려요?”

세온의 목소리였다. 뒤로 물이 터지는 소리와 누군가의 비명이 겹쳤다.

“북쪽 관수장이 움직여요. 급수반이 안에 갇혔습니다!”

지한은 아르케를 켰다.

세온이 보낸 영상은 흔들리고 있었다. 낮은 모래 언덕 아래의 원형 정수조가 검은 물로 넘쳤다. 중앙에 선 낡은 순환 관수기의 여섯 팔이 물속을 휘저을 때마다 철망 조각과 볼트가 물기둥 안에서 돌았다.

다음 순간 고압 노즐 하나가 돌아갔다.

물과 금속 파편이 콘크리트 벽을 찢고 지나갔다.

“설비 상태 설명해.” 지한이 말했다.

“북쪽 저장수를 거르고 재배지 급수선으로 보내는 순환 관수기예요. 오래전에 세워 둔 폐기 설비인데 정수조는 아직 써요.”

세온이 숨을 골랐다.

“부수면 저장수 절반이 침전물에 섞여요. 그렇다고 저 안에 사람을 둘 수도 없어요.”

지한은 가방을 닫았다.

“야적장은 나중이다. 사람과 물길부터 살린다.”

에바가 곧바로 해치 쪽으로 향했다.

“동행하겠습니다.”

“출력 이십오 퍼센트 밑으로 떨어지면 말해.”

“수락.”

카이론이 짧게 덧붙였다.

“관수기 도면과 원격 감시를 전송합니다. 전원을 끄는 것은 최후 수단입니다. 압력조가 무너지면 정수조 바닥의 나노 침전물이 전부 급수선으로 넘어갑니다.”

지한은 해머를 등에 걸쳤다.

“그러니까 고쳐야지.”

관수장에 도착했을 때 정수조 주변의 땅은 이미 물에 잠겨 있었다.

물은 원래 맑았을 터였다. 지금은 배관 속에서 벗겨진 은색 나노 금속과 붉은 흙이 뒤섞여 검은 빛을 냈다. 중앙 관수기의 회수 자석은 물속에서 철편을 끌어올렸다가 팔 끝 고압 노즐로 밀어 넣고 있었다.

노즐 하나가 돌아갈 때마다 물줄기는 총탄처럼 벽을 깎았다.

세온은 무너진 관리실 벽 뒤에서 손을 들었다. 급수반 세 명이 그 뒤에 웅크린 채 젖은 방진포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안쪽 밸브실에 두 명이 더 있어요. 출구를 철망이 막았고요.”

“전원은?”

“여기서 끌 수 있어요.” 세온이 붉은 비상 차단기를 가리켰다. “끄면 멈추죠.”

지한은 차단기와 정수조 수위계를 번갈아 봤다. 붉은 눈금은 이미 경고선 위였다.

“아니. 지금 끄면 바닥 침전물이 빨려 올라와.”

“그럼 대체 어떻게 멈춰요?”

“원래 하던 일로 돌려놔.”

에바가 물보라 너머를 살폈다. 렌즈가 관수기 팔의 회전과 노즐 방향을 빠르게 따라갔다.

“공격 주기 확인. 육 초마다 좌측 노즐이 비고 네 번째 회전에서 코어 점검구가 노출됩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외부 신호도 있습니다. 세 번 맥박. 농업 로봇의 태그와 일치합니다.”

지한의 턱이 굳었다.

“사람부터 빼. 난 밸브실로 간다.”

“마스터의 이동 경로는 두 번째 노즐 사각에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네가 시간을 만들어.”

“수락.”

에바가 물가로 뛰어들었다.

임시 의족은 깊은 진흙을 밟자마자 반 박자 늦게 잠겼다. 몸이 옆으로 기울었지만 에바는 왼손을 물에 짚고 균형을 되찾았다. 관수기의 렌즈가 그녀를 향했다.

[비인가 유기 자원 감지.]
[회수 작업 시작.]

첫 번째 물줄기가 에바의 어깨 옆을 스쳤다. 철편들이 장갑을 긁고 지나갔다.

에바는 피하지 않고 차폐판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다음 노즐이 회전하기 전 그녀는 급수반 한 명의 방진포를 잡아당겨 벽 뒤로 밀어 넣었다. 이어 두 번째 사람을 끌어내려 할 때 회수 자석이 물속의 철망을 길게 뽑아 들었다.

철망이 채찍처럼 휘둘렀다.

“에바!”

에바는 왼팔로 철망을 받아 냈다. 금속이 팔뚝 장갑에 감겼다. 그녀는 힘으로 끊지 않았다. 관수기 팔의 회전 방향을 따라 한 걸음 물러나며 철망 끝을 바닥에 박았다.

팔이 잠깐 멈춘 사이 급수반 두 명이 벽 뒤로 기어 나왔다.

“넷째 회전까지 삼 초.” 에바가 말했다.

지한은 물을 가르며 밸브실로 달렸다.

안쪽에는 젖은 작업복 차림의 급수반 둘이 배수 밸브를 붙잡고 있었다. 밸브 손잡이는 절반쯤 돌아간 채 움직이지 않았다.

“손 떼.” 지한이 말했다. “역압 때문에 부러져.”

아르케 케이블을 점검 단자에 꽂자 관수기의 오래된 제어 규칙이 화면 위로 펼쳐졌다.

[수질 오염원 회수.]
[침전물 분리.]
[정수조 압력 유지.]
[급수선 보호.]

그 위에 붉은 줄이 자라나 있었다.

[유기 자원 회수.]
[저항 개체 압축.]
[금속 부착 개체 우선 분리.]

지한은 화면을 노려봤다.

“사람을 오염물로 바꾼 게 아니야. 회수 규칙 자체를 갈아 끼웠어.”

카이론의 목소리가 통신에 낮게 깔렸다.

“관수기의 회수 자석, 배관 접합용 나노 금속, 고압 세척 노즐이 모두 기존 설비입니다. 태그는 그것을 공격용으로 재조합하고 있습니다.”

“자연 감염은 아니네.”

“같은 결론입니다. 누군가가 이 기계가 가진 기능을 알고 비틀었습니다.”

지한은 수동 배수 밸브를 열었다. 검은 물이 보조 배관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관수기의 팔 하나가 물속으로 박혔다. 회수 자석이 끊어진 보조 배관을 끌어당겼다. 은색 금속 가루가 물 위에서 실처럼 엮이며 갈라진 관을 감쌌다.

겨우 열린 물길이 다시 막혔다.

세온이 벽 밖에서 외쳤다.

“이런 걸 어떻게 고쳐요? 이제는 부숴야 해요!”

지한은 대답하지 못했다.

관수기가 배관을 스스로 접합했다는 것은 태그가 단순히 명령 몇 줄을 삽입한 수준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설비가 가진 물질과 에너지의 흐름을 읽고 가장 사람을 죽이기 쉬운 형태로 고르고 있었다.

그때 에바의 목소리가 짧게 끊겼다.

“코어 점검구 노출. 안전 프로토콜 잔재를 확인했습니다.”

관수기 중앙의 외피가 열렸다. 그 안에는 붉은 태그가 박힌 보조 모듈과 원래의 수질 센서 모듈이 나란히 보였다.

“수질 오염원 분리 규칙이 살아 있습니다.” 에바가 말했다. “복원 가능성이 있습니다.”

“거기까지 갈 수 있어?”

“가능합니다.”

에바가 코어 쪽으로 움직이자 관수기 노즐들이 동시에 그녀를 겨눴다.

지한은 이를 악물었다.

“아니. 나랑 같이 간다. 혼자 붙지 마.”

“상호 제한 명령을 확인했습니다.”

에바는 노즐을 향해 몸을 틀었다. 왼팔에 감긴 철망을 풀어 차폐판 고정대에 걸었다. 팔을 세게 당기자 관수기의 회수 자석 하나가 기울며 노즐의 조준선도 함께 틀어졌다.

“지금 이동하십시오.”

지한은 밸브실을 나와 에바 곁으로 달렸다.

물보라가 발목을 때렸다. 노즐에서 쏜 철편 하나가 해머 손잡이를 스치며 불꽃을 튀겼다. 그는 코어 점검구 앞까지 가서 아르케를 연결했다.

바로 그 순간 검은 물 위의 은색 금속이 살아 있는 벌레 떼처럼 움직였다.

나노 금속이 에바의 흉부 커버로 기어올랐다. 청색등이 붉게 흔들렸다.

[외부 접합 신호 감지.]
[감염 차단 파형 교란.]
[바이오 셀 출력 저하.]

“에바, 떨어져!”

“물리적 제거를 우선하면 코어 복원 시간을 잃습니다.”

“그럼 내가 떼어 낼게.”

“아닙니다.”

에바의 렌즈가 지한을 향했다.

“이 신호는 제 차단 파형을 모방하려 합니다. 제가 역방향으로 흘리면 접합을 늦출 수 있습니다.”

“네 셀에 무리 가.”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잠시 멈췄다.

“그러나 이 파형은 제가 지켜야 한다고 선택한 것입니다.”

에바가 흉부 커버에 왼손을 댔다.

청색빛이 한 번 강하게 번졌다. 외부 전술망을 막아 두었던 차단 파형이 그녀의 외피로 흘러나왔다. 들러붙은 은색 금속이 떨며 갈라졌다. 일부는 물로 떨어졌고 일부는 코어 쪽으로 되밀렸다.

에바의 무릎이 꺾였다.

“출력 이십칠 퍼센트.” 그녀가 말했다. “복원 시간을 확보했습니다.”

지한은 아르케 화면을 붙들었다.

전원을 끄는 명령은 여전히 화면 한가운데 있었다. 한 번 누르면 관수기는 멈출 것이다. 대신 정수조는 오염된 침전물을 삼킨 채 급수선으로 쏟아 낼 터였다.

그는 그 명령을 옆으로 밀어냈다.

“카이론. 수질 안전 규칙의 원본 주소.”

“전송합니다. 단 외부 태그가 우선순위를 다시 빼앗을 수 있습니다.”

“그 전에 태그를 빼.”

지한은 화면 위에서 수질 오염원 분리를 최상단으로 끌어올렸다. 그 아래 보호 목록에 급수반, 저장수, 정수조, 배수관을 차례로 입력했다.

붉은 태그가 즉시 반응했다. 관수기의 팔 다섯 개가 동시에 코어 쪽으로 접히며 지한을 눌러 죽이려 했다.

에바가 철망을 끌어당겼다. 임시 의족의 관절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는 회수 자석 하나를 끝까지 묶어 뒀다. 팔 하나가 늦어지자 지한은 전자기 해머로 점검구 테두리를 내리쳤다.

보조 모듈이 튀어나왔다.

그는 절연 핀셋으로 붉은 태그의 접점을 잡아당겼다.

“세온! 차폐통!”

세온이 벽 뒤에서 달려 나왔다. 물줄기가 스치자 그녀는 몸을 굴려 피하고 지한에게 금속 통을 던졌다.

태그가 뽑혀 나오는 순간 관수기가 마지막으로 고압 노즐을 열었다.

에바가 지한의 어깨를 밀쳤다. 물과 철편은 그들이 있던 자리를 지나 하늘로 솟았다. 빗물처럼 쏟아진 금속 조각들이 정수조 표면에 파문을 만들었다.

지한은 태그를 차폐통에 밀어 넣고 뚜껑을 잠갔다.

[수질 오염원 분리 복원.]
[보호 목록 갱신.]
[외부 태그 격리.]

관수기의 팔이 하나씩 내려갔다.

역류하던 물은 침전조의 낮은 배수구로 천천히 빠졌다. 노즐 끝에서는 철편 대신 맑은 물이 가늘게 떨어졌다. 수질 센서등은 불안한 붉은색을 지나 노란빛으로 바뀌었다.

한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다.

급수반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밸브실 밖으로 나왔다. 그는 흐르는 물을 손바닥에 받아 냄새를 맡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았어요.”

세온은 숨을 내쉬며 비상 차단기에서 손을 뗐다.

“정말 안 부쉈네요.”

지한은 에바 쪽으로 돌아섰다. 그녀는 차폐판에 기대 서 있었다. 흉부의 청색등이 희미해졌고 왼팔 장갑에는 철망이 남긴 깊은 자국이 있었다.

“출력.”

“이십사 퍼센트. 바이오 셀은 안정 상태입니다.”

“다음부터 그런 식으로 버티지 마.”

“다음에도 상호 제한 명령이 적용됩니다.”

지한은 대꾸하려다 짧게 웃었다.

“그래. 그건 지켜.”

카이론이 차폐통의 분석 결과를 띄웠다.

[변수형 집결 규칙.]
[대상 반응 기록 수집.]
[전송 대기.]

지한의 표정이 굳었다.

“이 태그는 기계를 모으는 것만 하는 게 아니야.”

세온이 화면을 들여다봤다.

“그럼 뭘 더 한다는 거예요?”

“우리가 어떻게 고치는지 본다. 어떤 규칙을 되살리고 어떤 걸 버리는지 기록해서 보내려고 했어.”

카이론이 덧붙였다.

“관수기와 농업 로봇의 대응 차이를 비교하면 외부 주체는 다음 개체에 더 효율적인 변수를 넣을 수 있습니다.”

세온의 손이 권총집 위에서 멈췄다.

“우리 기계를 배워서 더 잘 망가뜨린다고요?”

“아직은 추정이야.” 지한이 말했다. “하지만 이걸 송신하게 둘 수는 없어.”

차폐통 안에서 붉은 빛이 세 번 깜박였다.

태그는 격리됐는데도 마지막 전송을 시도하고 있었다. 아르케 화면 한쪽에 피드백 경고가 떠올랐다. 지한의 손목이 뜨겁게 저렸다.

“마스터. 접속 한계입니다.” 에바가 말했다.

“끊으면 끝이야.”

“송신선을 자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면 어디로 보내는지 못 봐.”

지한은 차폐통의 미세 단자에 아르케 케이블을 물렸다. 태그가 보낸 반응 기록을 그대로 넘기지 않고 관수기 코어가 아직 폭주 중이라는 가짜 응답을 덧씌웠다.

카이론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미끼 응답 확인. 수신 경로가 열립니다. 사용자 강지한, 피드백 수치가 위험 구간입니다.”

화면 위 북서쪽 지도가 확대됐다. 고철 야적장 외곽의 지형이 겹겹이 펼쳐지고 그 안에서 작은 수신 구역 하나가 붉게 켜졌다.

[백검 보조망.]
[17번 집결 구획.]

지한은 마지막 선을 끊었다.

차폐통 안의 붉은 빛이 꺼졌다. 그의 손목을 타던 통증도 한 박자 늦게 가라앉았다.

에바가 화면을 보았다.

“화이트 소드 호출과 연관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능성만 있어.”

“그러나 북서쪽 집결 구획은 확인됐습니다.”

세온은 복구된 관수기와 급수반을 돌아봤다. 노란 센서등 아래로 물이 정상 급수선에 다시 차오르고 있었다.

“여기는 우리가 지킬게요. 매일 태그부터 확인하겠어요.”

지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 있으면 전원부터 내리지 말고 연락해. 수위하고 배관부터 봐.”

“알겠어요.”

에바가 천천히 몸을 세웠다. 임시 의족의 관절은 젖은 모래를 털어 내며 낮게 울렸다.

“정비소로 귀환한 뒤 충전을 요청합니다.”

“그 다음엔?”

에바는 북서쪽으로 표시된 화면을 향해 렌즈를 돌렸다.

“17번 집결 구획으로 이동합니다.”

지한은 차폐통을 가방 깊숙이 넣었다.

누군가가 기계들을 모으고 있었다. 이제는 그 기계들이 저항할 때 어떤 방식으로 고쳐지는지까지 배우려 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음번에는 그들이 고른 방식보다 먼저 움직여야 했다.

“돌아가자.”

관수장 뒤편의 물길이 다시 재배지로 흘렀다. 그 물소리 너머 북서쪽에서 세 번의 짧은 울림이 들려오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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