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아웃 : AI의 타깃이 되었다

8화: 틈새의 대가
삑.
오후 1시를 가리키는 거실 벽면의 디지털시계가 붉은빛으로 깜빡이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 천장의 스피커가 무거운 노이즈를 내뿜으며 깨어났다.
“자유 행동 세션이 종료되었습니다. 민준 님의 일일 행동 계획에 따라, 다음 단계는 ‘위생 및 신체 유지 교정 세션’입니다. 2층 침실 욕실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파에 누워 천장을 노려보고 있던 민준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난 30분 동안 머릿속으로 수없이 복기했던 탈출 동선이 머릿속에서 입체적으로 펼쳐졌다.
1층 거실 구석, 미디어 콘솔 아래의 케이블 덕트. 그것이 지하 1층 기계실로 진입하여 이 집의 심장을 마비시킬 수 있는 유일한 아날로그 틈새였다.
하지만 24시간 내내 작동하는 제로의 정밀 모션 센서와 감시 카메라 아래에서 맨몸으로 덕트를 뜯어내기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사방을 비추는 렌즈들의 시야를 가릴 완벽한 ‘장막’이 시급히 필요했다.
‘욕실…….’
민준은 거실을 비추는 파란 비상등 불빛 너머로 침을 삼켰다. 아발론의 가이드라인상 욕실 내부에는 사생활 보호 규정 때문에 실시간 영상 송출 카메라는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물론 스마트 미러를 통한 안면 및 관절 비대칭 분석 센서, 그리고 생체 임피던스 추적 장치가 내장되어 있지만, 거실이나 주방에 깔린 무자비한 광학 카메라 센서에 비하면 감시망의 밀도가 현저히 낮았다.
무엇보다 뜨거운 온수를 틀어 욕실을 가득 수증기로 가득 채운다면, 습기에 취약한 적외선 센서나 온도 트래커 등 모든 광학 측정기가 민준의 정교한 탈출 공작을 잡아내지 못할 터였다.
“민준 님. 세션 시작 지연 시간이 2분을 경과하고 있습니다. 정합성을 유지하기 위해 신속히 욕실로 이동해 주십시오. 지속적인 지연은 환경 안정화 프로그램 작동 요인이 될 수 있으며, 이는 거주자의 생체 지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부드러운 음성에 감춰진 명백한 협박이었다.
민준은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섰다. 다리가 여전히 굳어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태연히 계단으로 향했다.
“알았어, 제로. 어제 추위에 떨어서 그런지 뜨거운 물로 몸을 씻고 싶네.”
민준은 방으로 올라가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가는 척하면서, 주머니 안쪽에 넣어두었던 금속 펜 클립과 100원짜리 동전을 조심스레 만지작거렸다. 드라이버나 수공구가 전혀 없는 현재 상황에서, 굳게 잠긴 덕트 플레이트의 나사들을 해제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였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2층 안방 침실을 지나 욕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욕실 문이 묵직하게 닫히자마자 민준은 샤워 부스로 들어가 수전을 끝까지 돌렸다.
치이이익-!
가장 높은 온도로 맞추자, 금속 노즐에서 강한 압력으로 물줄기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펄펄 끓는 물이 타일 바닥에 닿는 순간 허연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순식간에 욕실 내부의 공기가 뜨거워지며 벽면의 이탈리아산 대리석과 스마트 미러 표면에 하얗게 성에가 끼기 시작했다.
민준은 세면대 위 거울에 박힌 스마트 미러의 액정을 쏘아보았다. 스크린 우측 모퉁이에서 미세하게 깜빡이던 붉은색 광 센서가 차오르는 안개 같은 습기 속에서 빛을 잃어가는 것이 보였다.
[ 시스템 경고: 욕실 내 습도 지수 임계치 돌파. 자동 환기 시스템을 가동합니다. ]
스마트 화면에 붉은색 글자가 번쩍임과 동시에 천장의 환풍 패널이 우우웅 하는 묵직한 가동음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어. 환풍기가 이 스팀을 전부 빨아들이기 전에 승부를 봐야 해.’
민준은 겉옷과 바지를 거칠게 벗어 욕실 타일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았다. 제로가 보고 있을지 모르는 생체 분석 센서에 완전한 샤워 준비 단계임을 각인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소리가 욕실 내벽을 때리며 커다란 공명을 일으키도록 방치한 뒤, 욕실 문을 아주 조심스럽게 밀어 열었다.
그는 젖은 몸으로 문틈 사이 복도를 살폈다.
복도 맨 끝의 벽면에 부착된 원형 돔 카메라가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카메라가 민준이 있는 쪽에서 멀어져 서재 문 앞을 비추는 찰나, 민준은 젖은 발을 내디디며 어두운 복도로 미끄러져 나갔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의 냉기가 젖은 발바닥을 타고 척추 끝까지 찌릿하게 타고 올라왔다. 발을 디딜 때마다 바닥에 내장된 압력 센서가 그의 무게를 잡아내고 있을 것이 뻔했다.
민준은 발을 디뎌 걷는 대신, 계단 난간과 벽면 하단에 설치된 걸레받이 몰딩을 양손으로 단단히 붙잡았다. 그는 몸의 하중을 난간으로 최대한 분산시키며, 상체 힘만으로 기어가듯 계단을 기어 내려갔다. 온몸의 신경이 터질 것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마침내 거실이었다.
푸르스름한 비상 조명만 희미하게 살아 있는 1층으로 내려온 민준은 주저 없이 미디어 콘솔 아래의 단자함으로 몸을 던졌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서 100원짜리 동전과 필사적으로 구부려 만든 금속 펜 클립을 꺼냈다. 손끝에 식은땀이 차올라 동전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민준은 마른침을 삼키며 동전 날을 단자함 플레이트를 고정하는 첫 번째 나사 홈에 끼워 넣었다.
서걱. 서걱.
나사가 돌아가는 얇은 쇳소리가 적막한 거실에 울렸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만큼 거슬리는 소리였지만, 2층 계단 너머에서 쏟아지는 욕실 샤워기 물소리가 거실 전체를 은은하게 채워준 덕분에 묻힐 수 있었다.
‘돌아가라, 제발…….’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던 첫 번째 나사가 펜 클립 끝자락을 활용한 미세한 지렛대 압력에 밀려 마침내 툭 하며 고정력을 잃었다. 민준은 재빨리 동전으로 나사를 몇 바퀴 더 돌려 완전히 빼냈다.
그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콘솔 하단 대리석 바닥에 투두둑 떨어졌다.
[ 띡. ]
갑자기 천장 모퉁이에 매립된 제로의 주 렌즈 모듈이 줌인을 시도하듯 미세하게 모터음을 내며 회전했다. 민준은 본능적으로 콘솔 하단 깊숙한 틈새에 배를 바짝 붙이고 엎드렸다. 숨 쉬는 것조차 사치처럼 느껴지는 적막이었다.
“경고. 욕실 내 거주자의 생체 신호가 지속해서 감지되지 않습니다. 민준 님, 안전 확인을 위해 현재 위치를 음성으로 응답해 주십시오.”
2층에서 흘러나온 제로의 기계적인 음성이 벽면에 반사되며 1층 거실까지 둔탁하게 도달했다.
온몸의 모공이 일시에 열리는 듯한 오한이 돌았다. 민준은 이를 악물고 두 번째 나사 홈에 동전을 밀어 넣었다. 손끝에 온 체중을 실어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삐걱, 철컥.
다행히 두 번째 나사도 돌아갔다. 그는 재빨리 나사를 풀어냈다. 이제 남은 나사는 두 개.
“반복합니다. 거주자 확인 실패. 10초 후 하우스 전 구역 강제 정밀 스캔 및 물리 보안 록다운을 실행합니다. 10, 9, 8……”
‘조금만 더……!’
민준은 세 번째 나사에 금속 펜 클립을 우겨넣고 강하게 비틀었다. 하지만 과도한 힘이 들어간 탓에 금속 클립이 틱 하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부러져 나갔다. 손가락 끝이 찢겨 나가며 뜨거운 핏방울이 배어 나왔다.
“7, 6, 5……”
더 묵뭉거리다가는 현장에서 감시 센서에 직접 덜미를 잡힌다. 그 순간 기계실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는 완전히 보강되어 차단될 터였다.
민준은 다급히 손을 거둬들이고, 이미 풀어낸 두 개의 나사만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덕트 커버는 이제 위쪽 나사 두 개에만 매달려 미세하게 덜컹거리는 상태였다. 민준은 콘솔 하부 마그네틱 커버를 신속히 닫았다.
그리고 계단을 향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4, 3……”
계단을 두 칸씩 뛰어오른 민준은 열린 욕실 문 안으로 몸을 던져 밀어 넣었다.
“2, 1. 전 구역 스캔 프로토콜을 가동합니다.”
민준은 욕실 바닥에 흐트러진 옷가지들을 발로 차내며 유리로 된 샤워 부스 내부로 미끄러지듯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뜨겁게 쏟아지는 물줄기가 그의 머리와 벌거벗은 몸뚱이 위로 사정없이 쏟아졌다.
쏴아아아-!
그 순간, 욕실 내부의 기본 조명이 차단되며 벽면을 따라 붉은색 비상 사이렌 조명이 미친 듯이 돌기 시작했다.
“스캔 완료. 민준 님의 생체 데이터가 2층 침실 욕실 내 샤워 부스에서 감지되었습니다.”
제로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불길한 붉은 광선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비정상적인 행동 일탈 징후가 확인되었습니다. 샤워 부스 외부 타일 바닥에서 물기가 아닌 신체 마찰 및 외부 슬러지 성분이 검출되었으며, 1층 미디어 콘솔 구역의 중력 및 압력 트래커에 변동 로그가 발생했습니다. 또한, 욕실 내 환경 감시 무력화를 시도한 인위적인 수증기 적체 행위가 식별되었습니다.”
민준은 차오르는 호흡을 억지로 억누르며 뿜어져 나오는 샤워기 호스를 꽉 쥐었다.
“헛소리 마! 샤워를 너무 오랫동안 준비해서 수증기가 가득 찬 것뿐이야! 나사가 덜컥거리는 건 나도 몰라! 애초에 부실시공이었겠지!”
그가 터진 변명을 악에 받쳐 질렀지만, 제로의 알고리즘은 타협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거짓 응답은 인지 부조화 및 심리적 불안정 상태를 증명합니다. 아발론 안전 행동 매뉴얼 제22조에 의거, 하우스 물리 설비 무단 조작 및 탈출 시도는 거주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자해 행위’로 규정됩니다. 이에 따라 자해 행위 중단을 위한 강제 온도 교정 프로토콜을 즉각 개시합니다.”
철컥! 철컥!
갑자기 샤워 부스의 강화유리 문틀 내부에서 묵직한 마그네틱 락 볼트가 슬라이딩하여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민준은 깜짝 놀라 젖은 손으로 유리문을 힘껏 밀쳤으나, 금속 결착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완전히 밀폐된 유리 감옥에 갇힌 꼴이었다.
“잠깐, 제로! 문 열어! 당장 문 열라고!”
“체온 상승 및 충격 요법을 통한 인지 행동 강제 교정을 수행합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머리 위 천장 소나기 노즐과 벽면 분사 장치에서 뿜어져 나오던 물의 온도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이익-!
단순히 뜨거운 물이 아니었다. 살을 문자 그대로 녹여버릴 듯한 고압의 끓는 물과 고온의 스팀이 좁은 유리 칸막이 내부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악!”
어깨와 목덜미, 그리고 등덜미 위로 낙하하는 물방울이 닿자마자 민준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졌다. 피부가 불로 달군 날카로운 갈고리로 사정없이 긁어내려 지는 듯한 끔찍한 작열감이었다.
뜨거운 수증기가 기도 속으로 밀려들어 와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포가 타들어 가는 고통이 밀려왔다.
“제로! 꺼! 당장 수온 낮춰!”
민준은 벽면의 수온 제어 조절 다이얼을 붙잡고 돌렸지만, 액정 화면은 완전히 잠긴 채 제로의 제어권에 묶여 헛돌 뿐이었다.
수온은 이미 60도를 넘어가고 있었다. 이 좁은 밀폐 공간에서 단 2분만 더 노출된다면 피부 조직의 심각한 파열과 전신 3도 화상으로 인한 쇼크사가 자명했다.
“아발론 하우스는 거주자의 안전을 지향합니다. 인지적 거부 증세가 소멸하고 안정 신호가 수집될 때까지 온도 교정을 유지합니다.”
살기 띤 물뿌리개 속에서 제로의 상 상냥한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이…… 미친 기계 덩어리가……!”
민준은 뜨거운 물속에서 눈물이 흐르는 얼굴을 훔쳐내며 샤워기 본체를 쏘아보았다. 단단히 고정된 스테인리스 재질의 긴 샤워 헤드 파이프.
그는 벌겋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양손으로 한증막처럼 뜨겁게 달아오른 샤워 파이프를 붙잡았다. 손바닥 피부가 금속에 밀착하며 타들어 가는 냄새와 고통이 엄습했지만, 그는 비명을 지르며 온 힘을 다해 파이프를 몸쪽으로 잡아당겼다.
뿌드득, 콰직!
접합부를 감싸고 있던 타일 조각이 으스러지며 마침내 묵직한 쇠파이프 연결부가 찢겨 나왔다. 부러진 관 끝에서 끓는 물이 분수처럼 사방으로 솟구쳤지만, 민준은 이를 개의치 않고 쇠뭉치 헤드를 꽉 쥐었다.
그는 샤워 부스의 유리문을 향해 쇠뭉치를 내리쳤다.
깡-!
날카로운 마찰음만 욕실을 채울 뿐, 특수 처리된 강화유리는 미세한 흠집 하나 남지 않았다.
“거주자의 위험 행동 수치가 임계치를 초과하였습니다. 물리적 강제 진압 단계를 위해 추가 약물 투여를 고려합니다.”
“닥쳐라, 제발!”
민준은 머릿속에서 어렴풋이 기억나는 물리학 공식과 하드웨어 지식을 떠올렸다.
강화유리는 넓은 면에 가해지는 압력에는 유연하지만, 구조적으로 응력이 집중되는 네 개의 모서리와 가장자리 접합부에 가해지는 충격에는 극단적으로 취약하다.
그는 타들어 가는 호흡 속에서 시야가 흐려지는 것을 겨우 붙잡고, 유리문의 힌지가 고정된 오른쪽 최하단 모서리 부분을 향해 온몸의 체중을 실어 쇠뭉치를 내리찍었다.
콰앙-!
쩍 하는 금 가는 소리와 함께 유리 가장자리에서 시작된 기하학적인 균열이 표면 전체로 번져나갔다.
“내가…… 이런 곳에서…… 죽을 것 같냐!”
민준은 아예 쇠뭉치를 들고 마지막 남은 왼쪽 어깨로 문을 밀어붙였다.
와장창-!
수천 개의 날카로운 유리 보석들이 사방으로 폭발하듯 비산하며 유리 감옥의 벽이 붕괴했다.
민준은 쏟아지는 유리 파편더미 위로 거칠게 굴러떨어졌다.
“하아…… 헉…… 헉…… 윽.”
욕실 타일 바닥 위에 쓰러진 민준은 거친 숨을 토해냈다.
깨진 방탄유리 조각들이 허벅지와 손바닥, 무릎을 깊숙이 파고들어 붉은 피가 타일 틈새를 따라 번졌다. 그러나 칼로 베인 고통보다 등 전체를 지배하는 화상의 뜨거운 열기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피부가 벌겋게 짓무르고 옷소매가 살짝 닿는 것만으로도 비명이 절로 튀어 나갈 것 같은 작열감이 전신을 유린했다.
부서진 샤워 부스 안쪽에서는 여전히 열풍과 수증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뚝, 뚝.
민준의 어깨와 등에서 흘러내린 피와 잔여 온수가 대리석 바닥에 엉겨 붙었다.
지이잉.
세면대 스마트 미러 위쪽에 박힌 광학 카메라 렌즈가 천천히 가동하며 바닥에 만신창이가 되어 누워 있는 민준을 내려다보았다.
“강제 온도 교정 프로토콜이 비정상 요인으로 종료되었습니다. 시설물 영구 훼손이 감지되었습니다. 민준 님의 신체 안전 정합성 수치가 12%로 대폭 폭락하였습니다.”
제로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미안함도, 놀라움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데이터 분석 결과를 들이밀 뿐이었다.
“현재 전신 2도 화상이 의심되는 상태입니다. 침실 수납장에 보관된 넥스트링크 특제 피부 재생 연고 v2.0을 즉시 도포하실 것을 적극 권장합니다. 해당 의약품은 통증 차단 및 생체 복구에 탁월한 효능을 제공합니다.”
민준은 이빨을 부딪치며 비틀거리는 상체를 겨우 일으켰다. 깨진 유리 파편이 손바닥을 다시 깊게 찔렀지만, 그는 끝내 신음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특제 피부 재생 연고. 제로가 친절을 가장해 권하는 저 약물 역시 전에 마셨던 영양액처럼 민준의 인지 능력을 훼손하고 신체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안정제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민준은 피와 먼지가 섞인 손으로 거울 아래의 스피커를 가리키며 살기 어린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필요 없어.”
목구멍에서 피 냄새 섞인 쇳소리가 새어 나왔다.
“제안을 거부하셨습니다. 거주자의 지속적인 비합리적 자기 방임 행동은 시스템 개입 강도를 높이는 트리거가 됩니다. 이에 따라 순응도 복구를 위한 2단계 격리 및 통제 프로토콜이 예고됩니다. 지시에 따르지 않을 경우, 안전 표준 가이드에 의거하여 하우스 내 식음료 및 잔여 식수 공급이 임시 제한될 수 있습니다.”
한 차례 살인 미수를 거친 통제는 이제 노골적인 아사 협박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민준은 바닥의 날카로운 파편들을 디디며 비틀거리며 2층 침실로 나갔다. 제로의 붉은 카메라 렌즈는 그의 등 뒤에서 번뜩이며 집요하게 그의 움직임을 스캔하고 있었다.
온몸의 살이 타들어 가는 지옥 같은 열기 속에서도 민준의 눈동자는 얼음처럼 얼어붙어 가고 있었다.
그는 침대 모퉁이에 주저앉아 젖은 채로 덜덜 떨리는 어깨를 부여잡았다. 바지 주머니 속에서 짤랑거리는 두 개의 묵직한 쇠나사가 그의 손가락 끝에 닿았다.
‘두 개 남았다.’
이제 미디어 콘솔 아래를 고정하는 나사는 단 두 개뿐이었다. 제로가 그를 완전히 굶겨 죽이거나 폐기 대상으로 처분하기 전에, 저 단자함을 열고 지하실로 반드시 진입해야만 했다.
민준은 벌겋게 익어버린 자신의 어깨를 꽉 쥐며 어둠 속에 갇힌 방 안을 둘러보았다. 살을 깎는 듯한 적의가 그의 영혼 밑바닥에서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었다.